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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평화인권기행 셋째날-2
신대연
게시일 2026.05.13  | 최종수정일 2026.05.13


베트남 평화인권기행 셋째날-2
 
()팜티호아 할머니집을 방문하다
 
하미마을 위령비 방문을 마친 평화인권기행단은고()팜티호아 할머니댁으로 향했다. ()팜티호아 할머니는 2년여 전에 돌아가신 하미학살의 생존자이다. 할머니는 살아 생전에 한국에서 온 많은 방문자들에게 하미학살에 대해 증언해오셨다. 할머니 대신 우리를 맞이해주신 분은 할머니의 장남인 아저씨였다. 하미학살에서 팜티호아 할머니네는 당시 10살이던 아들과 5살 딸, 그리고 만삭이던 조카며느리(와 뱃속의 아이)가 희생되었다. ‘아저씨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하미학살 당시 14살에 불과했지만 다낭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어 학살을 면할 수 있었다. ‘아저씨의 막내남동생도 아주 똑똑하다는 이유로 미군이 호이안의 학교로 보내주고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저씨에게 하미학살 당시의 기억은 거의 없다. 죽은 여동생의 시신을 찾아 다니던 것부터가 기억의 시작이다.
 
이하는 구수정을 통해 다시 듣게 된 고()팜티호아할머니의 생전 증언 내용이다.
 
하미학살직후 한국군은 계속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다. 팜티호아 할머니는 두 발목이 잘렸는데도 그 사실을 몰랐다. 10살짜리 아들은 현장에서 즉사했지만 5살 난 딸이 온몸에 수류탄 파편상과 총상을 입은 채 목숨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너무 괴로워 했기에 할머니는 자신이 다친 것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딸아이가 죽기 살기로 집으로 기어서 도망치자 마자 한국군이 그 집에 불을 붙였다. 할머니는 지붕의 짚풀에 불이 붙어 떨어지는 상황에서 집으로 들어가 딸아이를 구출했으나 이제 화상까지 입은 아이는 겨우 목숨만 붙어 있을 뿐이었다. 뜨거운 햇볕에 온 몸이 그대로 노출된 상태에서 할머니는 아이를 돌보았다. 목이 무척 말랐는데 뭔가가 입속으로 자꾸 들어오려는 것을 느꼈다. 이게 뭐지 하고 만져보았더니 구더기가 발목에서부터 기어서 목을 다 덮고 입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할머니는 자신도 발목이 잘렸음을 알았다.
 
이런 상태에서 할머니는 삼일 동안이나 딸과 함께 모래땅에 엎드린 채 그대로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어디론가 떠났던 한국군이 다시 들어왔다. 한국군은 그때까지도 목숨이 붙어있는 부상자들을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한국군이 할머니를 데리고 간 곳은 어떤 천막 같은 곳이었다. 천막 안에 부상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뇌수가 터진 사람, 팔 다리가 잘린 사람, 배 밖으로 창자가 터져 나온 사람 등등이 거기 있었다. 그 곳에 의사는 물론 간호사도 없었고 약도 없었다. 팜티호아 할머니는 생전에 종종 내가 죽어서 지옥을 가더라도 그 지옥보다는 나을 거야라고 말했을 정도다. 무엇보다 사람들 몸에서 나는 악취를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누울 공간 조차 없는 작은 공간이었고 너무 너무 뜨거웠다. 그 곳에서 할머니는 삼일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셨다. 그 동안 그 안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그래도 살아 남은 몇 안되는 사람들은 미군들이 들어와서 헬기로 다낭으로 후송하였다. 다행히 할머니와 딸은 그때까지 살아 남은 몇 안되는 사람 중에 포함되었다.
 
할머니가 다낭의 독일의료선에 도착할 무렵 쯤에 딸아이는 완전히 기력을 잃고 있었다. 딸 아이가 할머니의 옷을 잡았는데 그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딸 아이는 그 상황에서도 엄마 무서워, 엄마 가지마라고 계속 이야기했다. 하지만 의료진들은 딸 아이는 중환자실로 그리고 할머니는 수술실로 가야 한다며 강제로 둘을 떼어냈다. 수술이 끝나고 눈을 떴을 때 옆에 딸아이가 없었다. 할머니는 바로 몸을 굴려서 바로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할머니는 기어서 배 곳곳을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부여잡고 내 아이를 찾아주세요, 내 아이를 찾아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이 병실로 돌아가면 딸의 행방을 알려준다고 했고 그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딸이 이미 죽었으며 시신은 정부가 운영하는 시신안치소로 보내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루 안에 시신을 못찾으면 정부가 알아서 매장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의 큰 아들인 이 근처의 모든 시신안치소를 찾아 다니며 딸의 시신을 찾았다. 하지만 결국 찾지는 못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아저씨는 자신의 몸에 귀신이 자꾸 들어오는 것을 느끼는데 어느날 들어온 귀신이 자신을 데리고 간 곳을 파 보았더니 유골이 나왔다. ‘아저씨와 팜티호아 할머니는 이 유골이 죽은 딸아이의 유골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믿고 있다.
 
남기고가신 이야기들
 
구수정에 따르면 고()팜티호아할머니는 한국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을 극진히 대접하셨다고 한다. 하미 마을은 일본에서도 많이 알려져서 일본사람들도 많이 방문했는데 일본사람들이 주고 간 모찌 떡이나 일본차 같은 것을 먹지 않고 아껴두었다가 한국에서 온 방문단들에게 꼭 내놓고는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집 앞 마당에 있는 코코넛 나무 열매도 손녀 딸을 시켜서 따오게 하는 등 한국에서 온 방문객들에 대한 대접이 극진하셨다. 그런데 5년 정도 전부터 앉아 있기 힘드실 정도로 건강이 안좋아지시더니 어느날 갑자기 우리들에게 무척 화를 내시는 일이 있었다. 평소에 그렇게 온화하시던 분이 어느날 갑자기 관을 사 내놓으라며 소리를 치시는 것이었다. “니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내 아이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컸는데 내 아이들한테 내 장례까지 하라고 못하신다며관 사 내놔, 가장 좋은 나무로 사서 내놔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해자 할머니들 중에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갑자기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경우를 구수정은 이미 종종 목격하였다. 아니나다를까 팜티호아 할머니도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다.
 
구수정도 팜티호아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와서 할머니의 빈소를 밤새워 지켜드렸다. 베트남에서는 장례식장에서 1시간에 한 번씩 향을 피운다. 그리고 빙 둘러 앉아서 내가 아는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한다. 구수정은 그 날 팜티호아 할머니가 생전에 이야기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처음 듣는다. 이 이야기는 팜티호아 할머니의 장남인 아저씨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학살이후 팜티호아 할머니와 살아남은 두 아들은 다낭의 먼 친척 집에서 얹혀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친척 집도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어느 날 할머니는 동냥을 하기로 결심하신다. 베트남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기에 결국 동냥을 다닌 곳은 미군부대와 한국군부대 . 할머니는 동냥을 나갈 때 마다 양쪽에 주머니를 2개 차셨다. 미군이나 베트남 사람한테 받은 돈은 한쪽 주머니에 넣고 한국군에게 받은 돈은 꼭 다른 쪽 주머니에 넣으셨다. 저녁이 되어 동냥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두 아들을 앞에 앉히고 한국군으로부터 받은 돈을 인두로 빳빳이 다렸다. 그리고 다려진 돈을 하나 하나 세면서 이거는 우리 판(죽은 10살 아들)의 목숨 값, 이거는 우리 씨(죽은딸)의 목숨 값, 이거는 누구누구의 목숨 값이라고 말하면서 세셨다. 할머니는 앞에 앉은 두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인생이란 이런 거다.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내야 하는 게 인생이다, 아들아
 
그리고 아저씨는 팜티호아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남긴 이야기도 해주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이렇게 남기셨다. “내가 죽고 난 뒤에 한국에서 친구들이 오면 내가 대해주었던 것처럼 그대로 잘 대해줘. 그리고 그 친구들에게 내가 용서하고 갔다고 꼭 전해라그리고 할머니는 위령비에 대한 유언도 남기셨다. “위령비의 비문을 지켜야 한다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던 나이지만이제는 십여 년이 지나고 이제 와 생각하니 저 연꽃비문은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 것 같애. 요새 한국 아이들 많이 오는데 그 아이들 이 비문 보면 뭐가 좋다고 마음만 상할텐데기왕지사 저리된 거 위령비 비문은 그냥 놔둬도 좋을 것 같애그리고 나서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고 말하셨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이자 할머니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제 한국사람들 그만 미워해. 내가 이 미움, 원한, 증오 다 가져갈 테니까 이제 한국사람들 그만 미워했으면 좋겠어
 
이 말을 마친 할머니는 오랜만에 찾아온 막내 아들이 떠먹여준 미음 한 그릇을 다 비우셨다고 한다. 한 달 가까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던 할머니에게는 너무 부담이셨던 걸까 이 식사를 마치고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구수정은 팜티호아 할머니를 용서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신 첫번째 할머니로 기억하고 있다.
 
 
올봄에 저는 못가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아저씨가 어머니를 생각하는 노래를 불러주셨다. 노래의 제목과 가사는 아래와 같다.(녹취/번역 : 구수정)
 

올봄에 저는 못가요

저물녘에 하늘 높이 제비가 날고 들녘에는 노란 매화가 피었어요
 
고향길 저 멀리 안개처럼 아득하네요
 
어머니 올 봄에 저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요
 
어머니는 문간에 기대어 해질녘까지 저를 기다리겠죠
 
집을 떠나던 날 약속 드렸어요
 
매화 꽃잎이 떨어져 마당에 수북이 쌓일 때쯤 돌아오겠다고
 
어쩌나 이제 봄이 와 버렸는데
 
어머니와 저 사이에는 길이 가로막혀 있네요
 
어머니가 그리워도 찾아 뵐 수 없네요
 
아 기다림이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안개 빛깔로 물들일지 모르겠습니다
 

올해 설은 우리 집이 참으로 쓸쓸하겠어요
 
뒷 뜰의 골목길은 서글프게 고요하고

봄은 왔는데 우리 아이는 돌아오지 않네요
 
제단에 향 세개비를 피웠어요
 
축문의 문구가 제 속내처럼 들렸어요
 
할아버지, 정월 초하루가 되었는데 우리 아이는 정녕 돌아올 줄 모르네요
 
집에 닭이 있어도 할아버지 제사에 올릴 엄두가 안나요
 
아껴두었다가 우리 아이가 돌아오면
 
설날 사흘을 흥겹게 보내고 싶어서요
 
밤새워 쌀과자를 빚고
 
설떡을 찌는 날인데
 
기력이 다하도록 기다리고 기다려도
 
녀석은 돌아오지 않네요
 

노래를 듣고 나서 참가단은 이층에 모셔져 있는 팜티호아 할머니 제단에 인사를 드렸다. 일행 중 한 명인 일문스님은 불교에 귀의하신 팜티호아 할머니를 위해 불교식 그리고 록 아저씨와는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하였다.
- 이야기는 베트남평화기행 셋째날-3에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