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베트남평화인권기행 셋째날-1
신대연
게시일 2026.05.13  | 최종수정일 2026.05.13


베트남평화인권기행 셋째날-1
 
아시아의친구들 베트남평화인권기행 셋째 날은 하미 마을 위령비를 참배하고 하미 마을 학살에서 살아남았던 고()팜티호아 할머니의 큰아들 아저씨집을 방문한 후 퐁니마을 위령비를 참배하고 퐁니퐁넛마을 학살의 생존자 탄아주머니 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고 구름만 짙게 드리우고 있어 야외활동을 하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하미마을 위령비
 
오전 9시경 하미 마을 위령비에 도착하였고 인민위원회 간부가 미리 나와서 우리를 마중하였다. 이 인민위원회 간부 역시 하미 마을 학살 당시 가족을 잃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하는 위령비 참배에 앞서 구수정이 설명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하미는 세 번 죽었다고 말한다. 1차는 한국군에 의한 직접 학살이고 2차는 포크레인과 불도저로 시신을 밀어버린 것 그리고 3차는 하미 위령비 사건이다. 위령비 사건 이후 하미 위령비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관리가 안되다가 4년여 전부터 인민위원회가 다시 관리를 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가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담벼락 틈으로 들어가거나 담 밖에서 행사를 진행해왔다. 그러다가 4년 전부터 문을 열어주고 있다.
 
(비문을 가리키며)학살이 있었던 것은 1968124(음력)이라고 씌어있다. 다른 증오비들과는 달리 남조선 군대에 의한 학살이라는 문구는 빠져있다. (한국참전군인단체의 지원으로 만들어지는 위령비였으므로) 마을사람들이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하미마을에는 미군이 먼저 들어왔다. 하미해변의 프랑스군 기지를 접수하면서 이 마을까지 들어왔었다. 주민들을 소개하는 작전을 수행하였으나 학살은 없었다. 하지만 1967년 말쯤 한국군이 이 곳으로 이동해 온다. 주민들은 이미 미군이 건설한 전략촌이라는 마을에 수용된 상태였다. 전략촌이란 베트콩을 주민들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미군이 건설한 수용소 비슷한 마을이었다. 그런데 이 전략촌의 상황이 매우 열악했다. 1000여 가구 정도가 수용되었는데 통행증을 받은 사람만 낮에 나가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식량사정 등이 매우 안 좋아서 어린아이와 노인들부터 죽어나갔다. 그래서 한국군이 이 곳에 왔을 때 전략촌 사람들은 마을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물론 돈 많은 사람들은 다낭이나 호이안 같은 도시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원래 살 던 마을 뿐이었다.
 
한국군이 하미마을 사람들이 마을에 재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군인들이 함께 집을 지어주었고 식량 지원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학살 당일 날 마을 사람들이 아무 의심 없이 한국군의 지시에 따라 모였던 것도 식량을 나눠주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팜티호아 할머니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팜티호아 할머니는 학살 전날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동네 사람들 머리맡에 달걀을 놓는 꿈이었다. 그런데 베트남에서는 죽은 사람의 머리 맡에 달걀이나 알을 놓는 풍습이 있다. 팜티호아 할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불안하다고 하자 다른 주민들은 쓸데 없는 걱정 하지 말고 오늘은 무슨 곡식을 나눠줄까 걱정이나 하라. 밀가루가 지겨우니 오늘은 쌀을 나눠주면 좋을 텐데라며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을 한 곳에 모은 한국군은 한 장교가 앞에 나와서 지루한 연설을 했다고 한다. 연설이 끝나자 어떤 명령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그러자 수풀 속에 숨겨놓았던 중화기들이 나타났다. 그 자리에서 135명이 희생되었다. 총소리를 듣고 무서워서 집안 땅굴로 숨었던 사람들도 이후 한국군의 수색과정에서 모두 희생되었다. 한국군은 학살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마을에 주둔하면서 그 자리에 있었다. 음력 1월이기는 하지만 베트남의 날씨는 낮에는 햇볕도 강하고 온도와 습도도 상당히 올라간다. 그런 날씨 속에 수많은 부상자들이 그대로 방치되었다. 2~3일이 지나자 한국군은 포크레인과 불도우저를 가지고 와서 시신들을 그대로 밀어버렸다. 이날의 상황을 베트남측 자료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국군이 철수하고 나자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과 인근 마을 사람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온 사람 들이 대나무 채반과 대나무 젓가락을 들고 모여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살점과 뼛조각들을 줏기 위한 긴 행렬을 이루었다결국 수습된 시신들은 화장을 하였는데 화장하고 남은 뼛가루를 절반은 유족들이 나눠가지고 나머지는 마을에서 상자에 담아 묻었다고 한다.
 
베트남사람들은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을 구분한다. 나쁜 죽음이란 밖에서 객사하는 경우와 시신이 온전히 보전되지 못한 경우 등의 죽음을 말하며 베트남어로 쨋등이라고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집안에 조상의 재단을 모시는데 문 밖에는 쨋등으로 죽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위한 제단을 따로 마련해 놓는다. 사실 이런 관념은 우리에게도 있다. 나짱에 있던 한국군 야전사령부에서는 전사한 군인을 화장해서 본국으로 송환했는데 팔 다리가 잘린 시신의 경우 목각으로 팔 다리를 만들어서 온전한 시신을 만들어 화장을 했다고 한다. 이렇듯 시신을 온전하게 장사지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베트남사람들에게 한국군이 시신을 포크레인 등으로 밀어버린 행위는 2차 학살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하미 위령비에 얽힌 뒷이야기
 
하미위령비는 한국군 참전군인단체가 지원을 하여 지어진 위령비이다. 이 위령비의 비문이 연꽃 문양 대리석으로 덮어지게 된 사연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알려진 바 있다. 비문에 포함된 한국군의 학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뒤늦게 참전군인단체에 알려지게 되면서 참전군인단체가 하미 마을 주민들에게 비문 수정을 요구하였고 결국에는 마을 주민들이 비문을 대리석으로 덮어버린 사건이다.
 
우리는 당시 이 사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두 당사자인 구수정과 고경태 기자를 통해서 자세한 배경과 뒷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두 사람이 직접 지면 등을 통해 밝힐 기회가 있을 거라 보고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정리하고자 한다.
 
하미위령비가 세워진 것은 지난 2000년이다. 이 해는 참전군인들에 의해 한겨레 신문사가 습격 당한 때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 참전군인단체가 베트남에 위령비 건립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당시로서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위령비 건립은 그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참전군인단체는 베트남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인천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였는데 그 주된 내용은 이랬다. “우리는 베트남에 화해의 비를 세우러 간다. 위령비에는 베트남에서 희생된 한국군과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베트남 인들을 함께 추모하는 합동 추모비가 될 것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구수정이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전범과 조선인 희생자를 합사해 놓은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이제 막 회자되기 시작할 때였다. 그런데 화해를 말한다는 것 그것도 가해자인 우리가 벌써 화해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 어찌하여 기공식은 잘 치뤄졌고 마을 사람들은 무더운 낮시간의 씨에스타까지 반납해가며 위령비 건립에 힘을 모았다. 사단은 위령비가 만들어지고 난 후 일어났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베트남 정부에 병원과 학교 건립을 약속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베트남의 극빈지역에 짓는 것으로 이야기되었지만 병원은 한국군이 주둔했던 중부 5개성에 각 하나 씩 지어졌고, 학교는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있었던 마을에 지어졌다. 이 학교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하미마을을 방문했던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의 참사관이 하미 위령비의 비문을 읽어보고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참전군인단체에 연락한 것이다. 위령비건립을 지원한 참전군인단체는 즉시 하미 마을에 연락하여 비문을 수정하지 않으면 준공식을 열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하미 마을 사람들은 이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 후로 하미 마을 사람들의 비문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1년여 동안 진행된다. 그러나 2002년에 베트남 중앙정부가 하미 마을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교토대학교 마사꼬 교수가 쓴 논문에 따르면 당시 한국정부는 병원건설 중단과 한국투자기업의 철수를 무기로 베트남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하미 마을 사람들은 다시 마을회의를 열었다. 4차에 걸친 회의를 통해 마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비문은 한 글자도 고치지 않는다. 다만 그 위를 연꽃문양 대리석으로 덮어버린다구수정은 마을 사람들의 지혜에 탄복하였다. 이런 결정을 내린 후 마을 사람들은 구수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대리석을 걷어내는 것은 당신들이 하겠지?” 그 일이 있은 후 14년이 지났지만 비문은 여전히 차가운 대리석 아래에 덮여있다.
 
하미위령비의 비문이 대리석으로 덮이게 된 사연을 들은 평화기행 참가자 일행은 위령비 앞면의 희생자 명단 앞으로 이동하였다. 위령비에 적혀 있는 희생자명단의 숫자는 135명이었다. 대부분의 이름이 가운데에 THI라고 씌어 있었다. 여성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름이 보장이라고 씌어 있는 것도 있었다. ‘보장은 베트남말로 아무개란 뜻이다. 아직 이름조차 얻지 못한 아기들도 희생자 명단에 올려져 있었다. 학살이 19682월에 있었는데 1968년생인 아기들이 6명이다. 그리고 10살 이하의 아동도 57명이나 된다. 여성들, 아이들, 노인들이 죽는 것 이것이 바로 학살이다.
 
명단이 적힌 위령비의 앞면을 보고 나서 비문이 덮혀 있는 뒤쪽으로 이동하였다. 비문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미는 500년의 역사를 가진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먹구름이 끼더니 한국군들이 마을로 몰려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의 모가지가 야자나무에서 야자나무열매 떨어지듯이 우수수 떨어지고, 하미의 모래땅이 살점들과 뒤섞이고 하미를 흐르는 강과 바다는 모두 붉게 물들었다.(중략)그런데 다시 30년이 지나 한국인들이 먼저 우리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니 우리 그 손을 잡고 이제부터는 아름다운 미래로 나아가자.”
 
여기 나오는 한국군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묘사에 대해 한국측이 수정을 요구했고 마을 주민들은 이것은 우리의 역사이고 하나의 거짓말도 없다며 거부했었던 것이다.
 
베트남평화인권기행 셋째날-2 에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