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베트남평화인권기행 둘째날-2
신대연
게시일 2026.05.15  | 최종수정일 2026.05.15

베트남평화인권기행 둘째날 (2)
 
빈호아한국군 증오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지에는 두 가지 종류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증오비이고 다른 하나는 위령비이다. 증오비는 대개 베트남전 종전 직후인 1980년대 초반에 만들어졌다. 반면 위령비는 1990년대 이후 대부분 세워졌다. 증오비의 특징은 한국군의 잔혹 행위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증오비는 그동안 도로 확장 등으로 인해 많이 없어지고 위령비로 대체되어 현재는 3개만 존재하며, 위령비는 60여개가 남아있다.
 
빈호아 의 한국군 증오비는 장방형으로 된 거대한 시멘트제단 위에 'CAN THU'라고 쓰여 있다. 베트남어로 'CAN()''()', 'THU()''()'를 뜻한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쓴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230명이 여성이었고, 109명이 노인이고, 182명이 아이들이었다. 그 중 7명은 임신부, 2명은 산채로 불태워지고, 80세 노인은 목이 잘려 들판에 널어놓았으며 한 명은 배가 갈라지고 두 명의 여성은 윤간을 당했고, 두 가족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몰살당했다.'(오마이뉴스 2015-05-09 박정희냐 김대중이냐, 볼수록 부끄러운 한국군 증오비에서 인용)
평화기행 참가자들은 증오비에서 참배를 마치고 그 옆에 있는 베트남민족해방전사묘를 참배하였다. 베트남민족해방전사는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베트콩이다. 물론 이들은 비무장 민간인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사진 속 주인공으로 유명한 킴 푹이 유네스코 우호대사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참배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곳에 참배를 하였다. 그리고 역시 이곳에서 가까운 영국인이 세운 위령비를 향해 도보로 이동하였다.
영국인 소설가가 세웠다는 이 위령비는 36명이 희생된 폭탄 구덩이 앞에 세워져 있었다. 우연히 이 마을을 방문한 영국인 작가는 무려 3년간의 조사를 통해 한국군에 의해 희생된 학살희생자 총 422명의 명단을 작성하였고, 위령비에는 이 명단이 적혀있다. 위령비에 적혀 있는 이름들에는 유달리 THI라는 중간이름이 많았는데 THI는 여성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중간이름이다. 위령비 뒤의 폭탄구덩이에는 1966125일경 한국군이 마을주민 36명을 집결시킨 후 폭탄구덩이에 몰아넣고 사살 한 후 흙으로 덮어버렸다고 한다. 36구의 시신은 확인되었으나 신원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구수정은 어느핸가 EBS촬영팀과 함께 이 마을에 들어왔다가 마을 곳곳에서 들려오는 아가를 재우는 자장가소리를 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가야 아가야, 너는 기억하거라. 한국군이 우리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구수정은 현재 베트남 피에타 동상(한겨레 2016115일치 참조)을 이곳 빈호아 위령비 근처에 세우고자 한다. 이 위령비는 마을 사람들이 매년 위령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시민들은 매년 빈호아 위령제를 지원하고 방문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피에타상 건립을 계기로 우리도 마을 위령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고 한다.
 
도안응이아와의 만남
빈호아 위령비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빈호아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도안응이아가 살고 있다. 도안응이아는 학살에 대한 기억은 없어서 이하는 구수정의 설명을 요약한 것이다.
빈호아 학살 당시 도안응이아는 젖먹이에 불과했고 그의 어머니가 아기를 보호하려고 위에서 감싼 채 희생되었다. 마을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할 때 처음에는 도안응이아를 발견하지 못했다가 3일이 지나 아기울음소리가 나는 것 같아 다시 현장에 가보니 시신더미 맨 아래에 도안응이아가 죽은 엄마의 젖을 물고 살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안응이아는 빗물에 스며든 화약으로 인해 눈을 실명하였다. 또한 학살 당시 입은 부상으로 인해 5살이 될 때까지 기어다니지도 못했고 10살이 되어서야 첫 걸음을 떼었다. 엉덩이 한 쪽이 완전히 날아가는 바람에 지금도 오래 앉아 있기 힘들다. 마을 사람들은 도안응이아를 자기 아이보다 더 정성스레 돌아가면서 키웠다. 마을에 출산한 사람이 있으면 도안응이아에게도 젖을 물렸다. 15살이 되자 마을사람들이 갹출하여 도안응이아가 살 집을 지어주었고 마을 인민위원회에서 작은 땅도 내주었다. 그런데 이런 사례는 도안응이아가 유일하지는 않다. 학살지 가는 곳곳마다 도안응이아처럼 키워진 아이들이 존재한다. 작년에 한국을 방문한 런 아저씨도 마을이 키운 고아이다. 런 아저씨는 커서 마을 인민위원회의 총서기가 된다. 지금 밀라이박물관 관장으로 있는 판탐 꼼도 비슷한 경우다. 마을사람들은 도안응이아가 앞을 볼 수 없기에 특수학교까지 보내며 공부를 시켰다. 이런 모습을 보며 우리를 돌아본다. 세월호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그들만의 것이고 제주4.3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은 이렇게 훌륭하게 크지 못했다. 베트남에서는 가장 깊은 상처를 입었던 사람들이 마을에 의해 키워져 마을을 위해 일하는 훌륭한 인재로 컸다.
공부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도안응이아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았다. 도안응이아는 농사일을 할 수 없어 농사일은 아내가 하였다. 대신 도안응이아는 대나무 공예품을 만들어 새벽에 시장에 내다파는 일을 한다. 도안응이아는 지금의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아이들이 공부까지 너무 잘해서 어떻게 뒷바라지 해야 할 지가 걱정이다. 아이들은 공부를 너무나 잘했지만 빚이 많은 집안 형편을 생각해 중도에 학교를 포기했었다. 도안응이아는 우리 부부가 더 노력할 테니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설득해달라고 구수정에게 부탁한다. 희생자 개인 지원을 하지 않는 것이 구수정의 원칙이지만 이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도 도안응이아는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현재 도안응이아의 경우 생계비 일부와 아이들 학비를 책임지고 있다. 현재 아들은 다낭에 한국국제협력단에서 지은 컴퓨터직업훈련학교에 진학하기로 했고, 딸은 다낭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 아이들의 학비만큼은 공부를 하는데 까지 지원할 예정이다. 이 장학금이 바로 지금 모으고 있는 빈호아 장학금으로 지원되고 있다. 그런데 도안응이아의 아들이 손에 땀이 많이 나는 다한증이 있어 컴퓨터활용이 어려운 관계로 다한증 수술까지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도안응이아는 독학으로 배웠다는 기타를 치며 우리에게 설 선물을 대신하여 봄이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우리 중에도 한 사람이 걱정말아요 그대라는 노래를 답가로 불렀다.
 
다음은 참여자들과의 질의 응답 내용이다.
 
참가자1 : 어머니가 생각날 때는 어떻게 견디셨나요?
도안응이아 : 가만히 누워서 손을 가슴에 대고 있으면 엄마와 같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이들 다 키우고 나면 내가 엄마를 만나러 가야지 생각한다.
참가자2 : 지금 한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도안응이야 : 평화가 왔다. 마을의 높은 분들 이야기가 한국이 이 마을에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제가 잘 해야죠. 제가 한국군 학살 피해자인데요 여러분들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참가자들 : .안아주는 것 밖에는
한국에서 박근혜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베트남 언론사들이 도안응이아를 인터뷰하기 위해 왔었다. “박정희의 딸이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비록 보지 못하지만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베트남전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우리가 한국 정부의 위안부협상을 보면서 기가 막히듯 베트남 사람들 역시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한국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또 기가막혔을 것인가.
도안응이아와의 만남을 마치고 일행은 각자 도안응이와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이후 평화기행단은 인근 미캐해변에 들려 식사를 하며 한꺼번에 듣게 된 많은 무거운 이야기들로부터 잠시 벗어나 휴식을 취하였다. 평화기행단의 오후 일정은 밀라이박물관 견학이 있었고 견학을 마친 후에는 호이안으로 이동하여 식사와 잠시 자유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밀라이박물관 방문
밀라이학살은 1968316(음력 1)에 미군에 의해 504명의 마을 주민들이 희생된 학살된 사건이다. 밀라이 박물관은 베트남전 종전 직후에 세워져 미국이 주도한 베트남전쟁의 부도덕함과 참혹함을 전세계인들에게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밀라이 박물관에서 들은 설명에 대해서는 다른 자료로도 많이 소개되고 있으므로 간략하게만 정리하고자 한다. 이하는 구수정이 설명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밀라이라는 명칭은 미군이 작전지도상에 붙인 이름에서 유래한다. 원래 이 마을의 이름은 선미(山美)였다. 밀라이 학살이 밝혀지게 된 것은 Ronald Heaberle이라는 전쟁기자의 용기 덕분이었다. 당시 현장에는 2명의 기자가 있었지만 나머지 한 명의 기자는 사진 촬영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그는 사진이 압수될 것을 직감하고 만년필에 필름을 숨겨서 나오는 데 성공한다. 목숨을 건 이런 용기 덕택에 밀라이학살의 전모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밀라이학살과 관련하여 법정에서 논란이 된 것은 이 학살이 계획적인 작전이었는지 여부였다. 밀라이 박물관에 걸려 있는 사진들에는 미군이 작전 지도를 확인하며 행군하는 모습도 있었다. 마을 주위의 밭에서 작물을 뿌리채 뽑아내는 장면도 있었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미군은 3개 편대로 나뉘어 조직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미군에게 끌려 나오면서 바지를 챙겨입는 할아버지의 사진은 그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할아버지는 산채로 우물에 던져졌는데 박물관에는 우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매달렸던 손자욱이 찍힌 우물모양이 재현되어 있었다. 미군은 할아버지를 향해 사격을 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그 때 튀어오른 차가운 우물에 맞은 한 흑인 병사의 정신이 번쩍 든다. 그는 더 이상 학살에 가담할 수 없어 스스로 자신의 발에 총을 쏴서 후송된다. 그는 이후 법정에서 자신은 작전이 끝날 때까지 베트콩을 한 명도 볼 수 없었다고 용기있는 증언을 하였다.
여성들이 모여서 옷의 단추를 채우고 있는 사진 앞에 섰다. 이번 평화기행의 모집 포스터에도 사용되었던 사진이다. 나이든 할머니에서부터 어린 소녀까지 울먹이며 옷의 단추를 채우고 있다. 미군에 의해 집단 강간당한 직후의 사진이라고 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사진이 촬영되고 몇 발자국 안가서 수십발의 총소리가 들렸고 사진 속의 여인들과 아이들은 모두 학살되었다고 한다.
남베트남군 통역병이 미군들이 돌아다니는 한 가운데에서 마을 주민들을 보호하는 사진 앞에 섰다.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는 국토의 분단은 있었지만 민중의 분단은 없었다고 종종 말한다. 이 사진도 남베트남 군인이 목숨을 걸고 밀라이 마을 주민들을 보호하는 장면이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학살을 끝내고 쉬고 있는 미군들 사진 앞에 섰다. 마치 일상적인 작전을 마치고 쉬는 듯 모두 편안한 얼굴들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한 얼굴은 하나도 없다. 베트남전에 종군기자로 참여했던 서방 기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미 원정군들은 베트남 사람들을 마치 DDT(제초제)로 잡초를 제거하듯이 죽였다.” 미군들도 스스로 베트콩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부대로 복귀한 미군들은 베트콩과의 교전에서 적 504명을 사살하고 아군 1명이 부상했다고 보고한다. 이들은 모두 1계급 특진과 훈장을 수여받는다. 미군은 밀라이 학살이 외부로 알려지자 그 후로 1년 동안 밀라이 마을을 매일 폭격하였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당시 학살을 주도한 켈리 중위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가택에 연금되었고 매일 호화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그 조차 3년 만에 대통령 특사로 사면된다. 켈리 중위는 밀라이 학살에 대해 한 번도 사과를 하지 않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에야 베트남인들에게 사과하였다.
학살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사진 앞에 섰다. 심슨이라는 병사는 9번의 자살시도 끝에 자살하는 등 학살 가담 군인 대부분이 불행한 삶을 살았다. 밀라이 학살 같은 학살사건은 참전군인들 개인의 책임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살인 기계로 만든 것은 파병을 결정한 정책 결정 책임자들이고 이들이 책임져야 한다. 바우닌이라는 작가는 <전쟁의 슬픔>이라는 작품에서 전쟁이 끔찍한 것은 너무나 평범한 청년들을 피에 굶주린 야수로 돌변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미국인이 다 야수의 편에 선 것은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필름을 빼내온 전쟁기자도 있었고 또 밀라이박물관 한편에 커다란 사진이 걸려있는 톰슨중위 같은 사람도 있었다. 톰슨 중위는 미군 헬기조종사였는데 밀라이 학살 당시 우연히 밀라이 마을 상공을 비행하다가 밀라이 학살을 목격한다. 톰슨중위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동승한 부조종사들에게 엄호사격을 부탁하고 밀라이 마을에 착륙한다. 그는 켈리 중위와 맞닥뜨려 1시간 동안 격론을 벌인다. 결국 그는 더 이상의 학살이 진행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가 도착했을때는 이미 학살의 마무리 단계였다. 그래도 그의 용기있는 노력 덕택에 수십 명의 마을 주민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그 후 본국으로 소환되어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되고 무수한 살해 협박을 받으며 살게 된다. 하지만, 그가 밀라이 30주년때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클린턴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보다 훨씬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그를 환영해주었다. 그는 정부의 명예회복 제안에 한 가지 조건을 붙였는데 그것은 미국의 모든 사관학교에서 밀라이학살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조건을 들어졌고 모든 미군 장교들은 사관학교에서 밀라이학살에 대해서 공부한다.
밀라이학살이 밝혀지고 나서 미국은 밀라이에 달러를 쏟아부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달러로 융단폭격을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밀라이 마을이 있는 꽝아이성 40~50개 현마다 최현대식 병원이 지어졌다. 읍면단위 마다 학교가 지어졌고 녹지사업도 이루어졌다. 미 참전군인회가 평화공원 등을 조성하였고 비록 정부 보상금은 아니지만 여러 기금을 통해 모든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이 전달되었다. 지금도 밀라이 위령제에 참여하는 사람의 절반 가량은 미국인이다.
반면 바로 옆마을인 빈호아 마을의 주민들은 여전히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작년에 이재갑 작가와 사진작업을 하기 위해 왔을 때도 마을주민들은 우리 가까이에 오지도 않았다. 한 아이에게 막대사탕을 건넸는데 아이가 받지 않았다. 옆에 있던 아버지가 괜찮다며 받으라고 했지만 그 아이는 싫어요 한국사람이잖아요라며 거부했다. 오죽했으면 빈호아 마을 사람들이 차라리 미군한테 당했으면이라고 말하겠는가.
 
밀라이 박물관장 판탐 꼼과의 만남
밀라이박물관에서 우리는 창백한 얼굴에 초점없는 눈을 가진 한 소년의 사진을 마주한다. 그가 바로 현재 밀라이 박물관의 관장으로 있는 판탐 꼼의 학살 직후 찍은 사건이다. 그는 그 스스로도 밀라이학살 후 1년 후까지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앞서 말한대로 판탐 꼼은 가족을 모두 잃었다. 어머니가 그를 구하기 위해 그의 위를 덮었고 그의 누이들도 그의 위를 덮었다. 심지어 그의 어린 누이들까지 집안의 하나밖에 없는 장손을 살리기 위해 그 위에 누웠다. 결국 그는 학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온 마을에 의해 키워져 고위 관리에 까지 이를 정도로 훌륭하게 자라났다. 마을에 의해 자라난 그는 도시에서의 고위관리 생활을 접고 마을로 돌아와 밀라이박물관의 가장 밑바닥 직원일부터 시작한다. 15년이 지나 지금은 밀라이 박물관의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그런 그를 우리가 방문한 날이 일요일이라 원래 출근하는 날이 아니었음에도 운좋게 만날 수 있었다. 이하는 그가 기억하는 밀라이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다. 11살이 되던 해의 어느날 미군이 마을 사람들을 한군데 모으더니 학살을 시작했다. 저희 가족 모두가 죽고 나 혼자 살아남았다. 저희 가족은 그래도 나라도 살아남았지만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 가족도 많았다.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미군은 불도우저로 마을을 밀었고 폭격기로 폭탄을 쏟아 부었다. 마을에는 생명의 그림자라고는 하나도 비치지 않았다. 그 때 저는 11살이었고 어디를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해 오던 기억이 납니다. 미군에 의해 전략촌으로 옮겨지기까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하였다. 75년에 전쟁이 끝나고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 집이 있던 터는 어디인 줄 알아보았다. 엄마도 아빠도 형제도 없는 집터 위에서 오랫동안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은 너무나 좋았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때부터 마을사람들이 나를 키워주었다. 마을사람들이 나를 학교에 보내고 나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여러 과정을 거쳐서 이 박물관에 돌아온 게 1992년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
돌아보니 이제 나는 이 아픔이 내 개인의 아픔이 아니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다. 박물관으로 돌아온 이후로 나는 나와 같은 고아들, 전쟁에서 희생된 여성들, 노인들을 위해 내 남은 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를 점령했던 일본, 그리고 학살을 일으킨 미국과도 지금은 전쟁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협력하여 일하고 있다. 이곳 꽝아이성에서 한국인에 의한 학살도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는 한국인과도 협력해서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협력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감사하다는 말이다. 여러분이 보여준 베트남 인민들에 대한 관심, 이 곳 학살지 마을을 방문하기 위해 들였던 노력과 애정 꼭 간직하고 있겠다. 감사드린다.”
 
이하는 판탐 꼼과의 질의 응답을 정리한 것이다.
참가자1 : 한국군에 대한 기억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판탐 꼼 : 매일 이 지역에 학살이 일어나 엄마와 계속 피난을 다녔던 기억이 있다. 가는 곳마다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야기가 들려왔다. 빈호아, 빈쩐 등 수십 곳의 마을에서 그런 소문들이 들려왔다. 1966년 무렵 한국군이 들어오고 나서는 한국군이 사람들을 죽인다는 소문 때문에 여기저기 피난을 다녔던 기억이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입장은 궁극적으로 이 모든 학살의 책임은 미국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군은 용병일 뿐이므로 미군 학살에 비해 한국군 학살에 대한 관심이 높지는 않다. 그리고 한국군에 의한 학살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도 미국 정부가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참가자 2 : 자녀들이 있을 텐데 베트남전쟁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판탐 꼼 : 나는 1983년에 결혼했다. 아이 셋을 낳았다. 아이들은 모두 호치민에 살고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그냥 나를 따라서 절을 하던 아이들이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왜 죽었어요?”, “겨우 2살밖에 안되잖아요. 그런데 왜 죽었어요?” 아이들이 너무 어렸을 때는 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끔찍해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고 먼저 질문을 해오고난 이후부터는 그 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더 자라서 성인이 된 후에 다시 물었다. “아버지는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아 오셨어요?” 그때 난 아 나는 이 학살의 증언자가 되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곧 출간될 예정이다.
참가자 3 : 밀라이 박물관을 방문한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기억이 있으면 이야기해달라.
판탐 꼼 : 내가 이 박물관에서 22년 동안 일했다. 정말 수 많은 사람들, 미국인들을 만났다. 미국인들은 시민들만 오는 게 아니라 정치인들도 많이 온다. 또한 참전군인들도 무척 많이 오고 있는데 밀라이 학살에 직접 참여했던 군인들도 왔다. 그들은 와서 우리는 살인자라고 말했다. 케넷이라는 이름의 참전군인이 특히 기억이 난다. 그는 그때 나는 왜 톰슨(밀라이 학살을 저지하려고 헬리콥터에서 내렸던 군인) 될 수 없었을까요?”라고 말하며 울다가 실신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학생들도 많이 찾아 온다. 그 중의 한 학생은 밀라이 학살 가담 군인들의 사진에서 할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하고 큰 충격에 빠졌다. 나는 그에게 너의 할아버지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