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친구들 베트남평화인권기행 둘째날(1)
아시아의친구들 베트남평화인권기행 둘째 날의 일정은 꽝아이성에서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있었던 대표적 마을인 빈호아 마을을 방문하여 증오비 등에 참배하고 생존자 도안응이아와의 만남을 갖는 것 그리고 밀라이 박물관을 돌아보는 것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하는 기행에 동행한 구수정 선생님 등의 설명을 정리한 것이다.
베트남평화인권기행의 기원
우리의 베트남평화인권기행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피스보트 운동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1982년 일본은 아시아침략을 “진출”로 표현하는 역사 교과서 파동을 겪는다. 이때 일본의 청년들이 역사를 올바르게 돌아보자는 피스보트를 1983년부터 운항하기 시작한다. 피스보트는 과거 일본의 아시아 점령지를 5개월 동안 돌아보며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프로그램으로 운영되었다. 이 피스보트에 탔던 사람들이 최근 아베정권의 역사 인식 후퇴에 반대하는 운동에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피스보트운동이 1997년에 한국의 작가들을 초청한다. 첫 번째 기착지가 바로 다낭항이었고 피스보트가 한국 작가들을 데리고 방문한 곳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지인 투이보라는 곳이었다. 아직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문제가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때 한국 작가들의 반응은 충격과 경악을 넘어서 현실 부정에 이르렀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글씨로 써있는 위령비의 내용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피스보트에서 이루어진 섹션별 토론에서 한국 작가들이 속한 섹션의 토론주제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이었다. 당시 한국 작가들은 일본인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믿을 수 없다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피스보트에 탑승한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한국인들의 반응을 이해하려고 하였으나 한국 작가들이 감정적으로 격앙된 반응을 계속 보이자 “너희들은 너희들의 역사도 모르면서 맨날 우리보고 과거를 반성, 사죄, 배상, 성찰하라고 하느냐. 너희는 성찰은 커녕 무지 아니냐”라며 한국 작가들을 비판하였다. 이에 격분한 일단의 한국 작가들이 다낭에서 중도에 하선해버린다. 하선 이후 온갖 고생 끝에 일주일여 만에 호치민에 있던 구수정을 찾아왔고 이날 호치민에서 “우리가 앞으로는 일본사람들 손에 끌려서는 가지 말자”는 결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시민 단체 “나와 우리”이다. 그리고 당시 베트남의 한국기업에 다니고 있던 구수정이 피스보트에서 들은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45일간 주요학살지를 돌아다닌 것이 그 시작이다. 그때 구수정을 만난 학살지 마을 사람들은 30여 년만에 한국 사람을 처음으로 만난 것이었다. 구수정을 만나 학살 당시의 이야기를 한 것이 심리치료의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구수정이 마을 방문을 마치고 나눠준 싸구려 인삼차를 마을 사람들은 만병통치약으로 여겼다. 나중에 더 좋은 인삼차를 사다 주었지만 마을사람들은 그것을 가짜라며 돌려주었다.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고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지만 이를 통해 이들은 일종의 치유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이들에게 당시 무슨 일이 있었고 그 동안 어떤 마음이었는지 자꾸 물어보는 것이다. 베트남 평화기행은 우리가 이 분들을 만나서 이렇게 물어보러 다니는 여행이다.
빈호아마을에 대하여
1999년 봄에 구수정은 빈호아 마을에 처음 들어온다. 당시 빈호아 마을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다낭에서 빈호아 마을까지 들어오는데 지금은 3시간 반 정도이지만 당시에는 7시간이 걸렸다. 마을에 들어왔더니 마을 사람들이 온통 빨갰다. 이 지역이 유명한 반뜨엉 전투가 있던 지역이라 고엽제 등이 대량 살포된 곳이었고 그런 까닭에 장애인이 많았다. 그런데 마땅한 약이 없었던 마을 사람들이 유일한 약인 머큐롬을 온 몸에 바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을의 안 쪽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 마을의 유일한 우물인데 이 곳도 학살이 일어난 다섯 개 지점 중의 하나였다. 145명 정도가 희생되었는데 한국군이 희생된 시신을 모두 우물에 넣고 짚풀 등을 넣어 우물 안의 시신을 태워버렸다. 문제는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와서 우물을 파려고 했을 때 어디를 파도 우물이 안나오는 것이었다. 이 마을에서는 그 우물이 유일한 수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수정이 방문했을 때 이 마을 사람들은 45분 거리의 옆 마을까지 물지게를 지고 물을 길러 다니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한겨레21에 기사로 썼다. 기사가 나가고 바로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소속의 치과의사들로부터 연락이 와서 우물 파는 비용을 대겠다고 했다. 그 다음날 바로 우물비를 마련해서 왔다. 이 우물비를 전달하기 위해 구수정과 베트남 최대신문사 기자가 건치 소속 의사들과 동행하였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서 주민들이 이들을 막아섰다. 베트남 기자가 자세한 내용을 말하며 주민들을 설득했으나 주민들은 한국사람들의 돈은 필요없다며 이들을 쫓아냈다. 이 과정을 베트남신문이 기사화하였고 베트남 각지에서 성금이 모여들어 결국 우물을 파게 된다.
그런데 1999년에 구수정이 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처음 안내한 곳은 한국군 증오비가 아니라 영국인이 건립한 위령비와 일본인이 건립한 학교였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1991년경에 한국과 베트남이 정식외교수립 전단계로 연락사무소가 설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사람들이 하노이 주재 한국연락사무소로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 곳은 아직도 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고 마을의 아이들이 학교가 없어서 학교를 다니고 있지 못하므로 학교를 지어달라고. 하지만 한국연락사무소로부터는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그 후 일본의 피스보트가 이 마을에 들어와 일본 정부의 ODA자금으로 지은 것이 지금의 빈호아 초등학교이다. 물론 김대중 정부가 2002년에 빈호아 초등학교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학교를 지어주긴 하였지만 지금은 무너지고 남아있지 않다. 빈호아 초등학교는 훨씬 전에 훨씬 큰 규모로 지었지만 여전히 튼튼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의수, 의족들은 1980년대에 독일인들이 들어와서 해 준 것들이다. 이런 모든 상황들이 당시의 구수정으로서는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운 사실들이었다. 이것을 극복하게 된 것은 그 후 ‘준꼬’라는 일본 여학생을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준꼬
구수정이 투이보 마을에 들어갔을 때였다. 마을의 아이들이 어디를 가나 구수정을 ‘준꼬’, ‘준꼬’라며 따라다녔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데리고 간 곳 역시 ‘JUNKO’라는 이름이 붙여진 학교였다. 준꼬는 피스보트를 따라 이 마을에 들어왔던 일본 대학생이었다. 준꼬는 이 마을에서 한국군 수류탄에 의해 턱이 날아가 물 한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하며 평생을 독거노인으로 살고 있는 할머니 등 여러 피해자들을 만났다. 준꼬는 이 마을이 참 아팠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생으로서 준꼬가 이 마을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일본으로 돌아간 준꼬는 거리에서 이 마을을 위해 모금을 시작했다. 그러나 불의의 교통사고로 준꼬는 사망하고 만다. 준꼬의 부모는 1년이 넘도록 준꼬의 유품을 정리하지 못할 정도로 슬펐다. 1년 후 준꼬의 방을 정리하던 준꼬의 부모는 일기장을 발견한다. 일기장에는 준꼬가 이 마을에서 경험한 것들 그리고 이 마을을 돕고 싶어하는 준꼬의 마음들이 적혀있었다. 준꼬의 부모는 준꼬를 대신해 투이보 마을에 학교를 세운다. 이것이 바로 준꼬학교이다.
한홍구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꼴민족주의자들이 시작한” 이 운동이, 일본사람들에 끌려서 이곳에 오지는 말자고 시작했던 운동이 이런 경험들을 거치며 ‘탈민족주의’ 운동으로 바뀌었다. 구수정은 준꼬를 만나면서 우리가 이 학살의 진실을 알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 와서 이들의 아픔을 함께 했던 이들의 마음은 진심이었겠구나 생각하였다.
* 다음 보고 글에는 빈호아 한국군 증오비와 밀라이학살 박물관 방문 등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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