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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동 일대 “수봉산이 물이 많았던 곳이에요” _민후남
수봉산이 물이 많았던 곳이에요   숭의동 일대 구술자 : 민후남 (61세, 1970년대 숭의동 거주)   - 채록일 : 2019년 10월 18일(금) 오후4시, 12월 14일(토) 오후 1시 - 채록자 : 문성예 - 채록 장소 : 숭의평화시장 내 꽃차 마실     “거기가 수봉산이 물이 참 많았어요. 그래서 올라가보면 꼭대기에 이렇게 평평한 돌이.  거기가 물이 많아서 술공장도 그 밑에 있었고요. 와룡소주 공장그리고 그 밑에 미나리밭.  그 옆쪽으로 제물포 방향으로 하고있었으니까 물이 굉장히 많았던 산인데요.  사실 뭐그렇게 펑펑흐르거나 그랬던곳은 아니고 올라가 보면 늘 이렇게 골짜기에 물이  개울 흐르듯이 닿아있었어요.”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저는요, 우리 미추홀구 토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7%뿐이 안 된다고 해요. 그 7%에 속하는 사람이고요. 저는 여기 숭의동에서 태어나서 숭의교회 뒤에서 평생 살고, 학교도 다 여기 나오고, 대학만 서울쪽으로 가고 다시 여기 와서 평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평화시장에 입주한다고 할 때 숭의동이라고 하는 이유 때문에 제가 신청서를 냈어요.   아,그러셨구나? 그럼 여기서 꽃차도 하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  저는 여기서 청소년 예절 교육부터 시작해서 차 수업하고 여기가 이제 레지던시 작가들이 입주해 있는 공간이에요. 제가 레지던시 대표일을 하고 있어요.   많은 일을 하시네요.v마을을 위해서도. 그러면은 옛날에 승기천이 어땠는지 기억하시는 바를 얘기해주세요  제가 기억하는 승기천은 어렸을 적에 수봉산을 올라가는 길이 사방으로 엄청나게 많아요.독쟁이쪽, 주안쪽, 도화동쪽, 여기 제물포. 올라가는 길이 굉장히 많아요. 저는 숭의교회쪽에 살았으니까 숭의초등학교 옆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는데 어렸을적에 저는 거기가 수봉산이 물이 참 많았어요. 그래서 올라가보면 꼭대기에 이렇게 평평한 돌이. 거기가 물이많아서 술공장도 그 밑에 있었고요, 와룡 소주 공장 그리고 그 밑에 미나리밭.중국 사람들 미나리밭이 있었어요. 그 옆쪽으로 제물포 방향으로 하고 있었으니까 물이 굉장히 많았던 산인데요. 사실 뭐 그렇게 펑펑흐르거나 그랬던곳은 아니고. 올라가보면 늘 이렇게 골짜기에 물이 개울 흐르듯이 닿아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거기 꼭대기에 올라가거나 하면 고인돌같은 돌들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누우면 습하니까, 수봉산이 좀 습해요. 그래서 돌봉숭아라고있어요. 올라가서 조그만 돌을 집어서 물 좀 묻혀가지고 손톱에 문지르면 손톱에 봉숭아 물이 들어요. 누워서 구름보고 막 그러고 잠도 들고. 그러다 껌껌해져서 막 뛰어내려오고 그랬던적도 있고요. 그만큼 그곳이 물이 많이 흘렀어요. 그런데 승기천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승기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승기천도 있고 학익천도 있고 그래요. 그런데 승기천을 이야기 하라고하면 승기천이 그 독쟁이(독정이)에서 내려와가지고 인하대, 저쪽에 자유시장 있잖아요.   용일시장?  용일 자유 시장. 그쪽으로 흘러가지고 신기촌으로 가서 저 원인재 그쪽으로 가는 것이 승기천이고요. 그러면 그게 물이 그렇게 많았던 것은 아니고 동네 개울, 웅덩이가 깊었던 곳은 물이 많이 고여 있고 아닌 곳은 요만 뿐(무릎 아래)이 안하게 흘러가면서 그렇게 이어졌어요. 그러다 나중에 그 쪽(신기사거리)에서 모여졌는데 그 곳에서 많이 고였던데는 빨래들도 하고, 고기도 잡고,그런거였죠. 제 기억으로는 학익천이 더 많이 기억이 나죠.저희 집앞이 바로 지금 KT 전화국 있는 그 아래쪽에다가 복개 공사한 곳이거든요. 저희가 숭의교회 뒤쪽에서 태어나서 이제까지 살았는데 복개 공사. 그냥 이렇게 넓은, 여기가 훨씬 넓었죠, 학익천이. 복개 공사를 할 정도면 굉장히 넓을 거예요. 여기도 복개 공사를 한 거예요. 그런데 승기천은 요만씩 했죠. 이렇게 가다가 넓어지고,웅덩이가 깊은곳에는 물이 고이고 그랬던 거고 학익천은 거기서 흘러가지고 어디로 갔었냐면은 저기 토지금고 앞에 전화국 있죠. 거기는 지금도 개울이, 복개 공사를 아직 안한 개울이 크게 흐르는 것이 있어요. 이제 승기천이 이렇게 미추홀구 중심을 지나가는 지역이고 거기(학익천)는 외곽이여서, 승기천이 이야기가 되는 것 같은데요. 저는 승기천 쪽은 비 많이 올 때 고기를 잡았던 기억, 그리고 수봉공원에 올라가서 누워서 돌봉숭아하던 기억. 물이 늘있었어요, 물이. 물이 많이 펑펑 나오는 것은 아니고 그냥 젖어 있는 정도 있잖아요. 그게 여러 갈래가 있으니까 모여서 이렇게 내려가게 돼요, 밑에는(인주대로). 수봉산이 물이 많았던 곳이에요. 그, 수봉산이 이렇게 있다면 일(이 리)로 이렇게 승기천이 내려가고, 이리로는 학익천이 내려가면. 이쪽으로 제물포 앞 역으로는 미나리 밭이 쭉, 미나리 밭이 원래 물에서 자라잖아요. 그리고 와룡소주 공장, 술 공장. 그런게 있어 다 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주위가.   미추홀구에 물이 진짜 많았네요.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보니까 궁금해지는 것이 있는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요? 올해 환갑이에요.    그때가, 지금 말씀하시는 그 때는 몇 년도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선생님 몇 살때?  그때는 제가 산에 올라갈 때가 초등학교 올라갈 때 3~4학년? 그때 올라갔죠. 그 전에는 못올라 갔죠. 혼자 이렇게 올라갈 수가 없었죠.   초등학교 3~4학년이 산에 올라가는 것도 좀 빠른듯하네요.  아니에요. 그 때는 산이, 수봉산이 그렇게 높지가 않아요. 높지가 않고 유일하게 올라갈 수 있는 곳이 거기 하나였어요. 그리고 바로 저희 집 뒤에 조그마한 야산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조금 멀어도 다 걸어 다니고 올라가고 그랬었어요. 지금 같으면 차 타고 갈 거리에요, 거기가. 그런데 그러고 다녔어요.   그러면 수봉산 근처에도 물이 있으면 미나리 밭도 있었고, 와룡소주도 있었고. 또 무엇이 있었나요?  수봉공원 쪽에 다 여기가 논이에요, 논밭. 조금만 넘어가도 거기에서 조금만 내려가도 다 바다였죠. 그래서 그 낙섬. 낙섬에 배가 들어오고 낙섬이래 봤자 어디냐면요, 토지금고 들어가기 전에 소금창고, 요새 신문에 난 건 들으셨죠. 토지금고 들어가기 전에 육교 있죠. 옛날의 터미널. 바로 거기 들어가기 전 틀기 전에 그 인천문화재단 건물 같은 소금창고가 하나 있어요. 지금도 있어요. 거기가 낙섬 낚시터. 낚시 도구 팔고 하던 곳이에요. 그래서 바다가 아주 깊어요. 거기서부터 다 바다였고요. 저희는 아버지가 군인인 관계로 월미도를 가서 그 당시에는 월미도에 들어갈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가 군인이니까 우리 가족들은 거기 가서 수영도 하고 그랬어요. 저희 용현초등학교에는 교가가 있었는데. 학교 교가, 거기에 그 ‘앞에는 낙섬로 바다 보이고 뒤에는 월미도가 우뚝 솟았네’ 그게 가사에요.   그러면은 승기천에 대해서는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비가 많이 오면요. 물고기가 거기에 떠있거나 하지는 않았는데요. 비가 이제 많이 오면 어른들이, 동네 오빠들이 미꾸라지 잡으러 가자 그랬죠. 그러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논이에요 주위가 다. 집이 별로 없죠. 이쪽이 집이라고 달랑 있었던 것은 당시에 양옥집 같은 집이 있었던 것이 제가 살던 숭의동. 그곳만 20채 정도 이층집이 이렇게 지어져 있었고 나머지는 다 밭이에요. 그래서 주안 쪽도 소 키우고 뭐 키우고 다 밭이었어요. 그러니까 비가 오면 다 잠기죠. 굳이 승기천이고 밭이고가 구분이 없는 거예요. 다 잠겨요. 그리고 특히 이 쪽 미추홀구가 잠기는 것으로 유명하죠. 염전도 있긴 하지만 그때는 비 온다 그러면은 엄마들이 집에 가서 집에 들어오는 하수도 구멍을 막는 것이 있어요. 걸레 뭉치로 해놨다가 확 막아요. 그걸 막지 않았다가는 마당으로 물이 막 들어오고 그러니까. 여기 미추홀구가 그랬어요. 이제 그러니까 굳이 승기천 물하고 논물하고 밭물하고 합쳐진 데에서 미꾸라지 잡는 거죠. 그랬었어요.   그때는 승기천이라고 안 불렀죠? 그때는 천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저는 제가 이거(인터뷰) 하면서 ‘아, 여기가 승기천이고 이게 학익천이었구나.’ 이제 아는 거예요. 우리 집 바로 앞에 복개 공사를 엄청나게끔, 자전거를 타고 연습하가 거기 안 빠지고 자전거 배운 사람이 하나도 없거든요. 엄청 넓으니까요. 그런데 그거를 메꿨어요. 그러니까 승기천을 복개한 이유는 처음에는 맑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들만 내려왔어요. 그런데 집들이 점점 생기면서 무슨 일이 생겼냐면은 하수가 같이 그리로 들어오는 거예요. 하수가. 그러니까 여기가 오염이 돼서 냄새가 너무 나는 거예요. 그래서 복개를 시작한 거예요. 그 하수를 따로 해야 되는데. 요새는 상하수도가 따로 있잖아요. 그때는 하나가 다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차츰 무슨, 그쪽에는 콩나물 공장이 있었어요. 승기천 내려가는 용일자유시장 중간에 콩나물 시장이 있었고 크지도 않았어요. 누가 공장이라고 말을 했대도 그 당시에는 공장이란 게 있지를 않아요. 왜냐면 움막 같은, 옛날에 김치를 담궈서 이렇게 지푸라기로 지붕 씌워놨던, 잘 모르시죠?   저희는 잘 모르죠. 김장하면 마당에, 저런 걸(지푸라기)로 이렇게 씌워놨던 그 정도의 콩나물을 그렇게 키우던 거예요. 공장이 아니라. 콩나물 집이었어요. 우리들 말로 말하면 옛날에는 두부 만들면 두부 집, 콩나물 팔면 콩나물 집 그랬잖아요. 그런 집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것이 하나하나 생기고 점점 동네가 형성되면서 무슨 공장 같은 것들이 생기면서 모든 폐기물도 다 거기다 버리는 거죠, 이제. 그 다음부터 냄새가 너무 심해지니까 이제 복개 공사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 전에는 하수물이 내려가고 그래도 깨끗했었죠. 그 물에서 빨래들을, 뭐 저희야 수도가 됐고 했었는데 이쪽은 다 없었어요, 주안 쪽은. 그리고 독쟁이(독정이) 쪽으로 가도 다 지게, 이렇게 양쪽으로 물 받아서 차가 급수차 밑에 내려오는 수도 하나에 받아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힘든 빨래를 그 물(급수받은 물)로 하질 못하잖아요. 먹는 물로 해야지. 그래서 빨래들을 그리로 갖고 내려와서 비벼가지고 가고 그런 것들을 보고 그랬어요. 저는 용현초등학교 거기서 이렇게 걸어서 어디로 오냐면요. 지금 그 용현2동 동사무소, 그쪽으로 나와요. 그러면 거기가 다 논이에요. 그러면 중간에 이렇게 파 가지고 똥통도 만들어놓고 막 그래요. 똥장군이라고 있어요. 똥통도 있고 똥을 모아놓잖아요, 또. 제물포에서 우리가 제물포역에서 내리잖아요? 그럼 여기가 수봉산이잖아요, 여기가. 내가 아까 말한 게 여기에요. 독쟁이(독정이)에서 수협 지나서 우물이 많았던 길, 도화동(문화예술회관 쪽)에서 올라가는 길, 주안(제일시장, 경인의원 옆길)에서 올라가면 제물포역에서 들어가는 길이 여기에요. 이렇게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면 현재 제물포역 앞에 뚜레주르 빵집 있잖아요. 그쪽으로 들어가는 길이에요. 이렇게 들어가면, 지금은 도로여서 그렇지, 원래는 산이에요 산. 다. 여기가. 그러면 아주 산꼭대기에요 옛날에는 여기 사는 사람들 집들이 어떤 집이냐면은 피난민이라고 해야 되나 그런 분들이 루핑이라고 있어요. 루핑집. 루핑이 뭐냐면 비닐도 아니고 함석도 아니고, 번쩍번쩍한 옛날 우리 왜 길 할 때 타마구3)라고 했던 것 있죠.   네네, 아스팔트 깔 때 사용하는? 네, 아스팔트 깔 때. 그게 그런 비닐에 그런 것들을 덮어가지고 말려서 지붕으로 그런 걸로 했던, 그러니까 다 물을 길어 올라가. 용정 3)석탄을 건류(乾溜)할 때 생기는, 기름 상태의 끈끈한 검은 액체 초등학교가 배 밭이 있고, 똥통이 엄청 큰 것이 있었고. 여기(용정) 학교가 나중에 지었어요. 숭의초도 나중에 생긴 거고, 용현초등학교가있다가 사람이 많아지니까 용일초등학교로 분가했어요. 분가해가지고 또 분가한 게 용정초등학교에요. 그러니까 나중에 생긴 학교죠. 저는 어렸을 적부터 왜 이렇게 빨빨대면서 다녔는지 너무 구석구석을 잘 알아.   대단하세요. 선생님이 59년생이세요? 그러면은 한 3~4학년 때 정도면 한 70년대다 이렇게 생각하면 될까요? 그러면은 저희가 80년대 말 정도에 복개되었다고 생각하니까. 아니에요. 복개는 그 전에 됐어요.   그래요? 80년대 말이 아니라요? 아, 맞아요. 내가 한 중학교 그때쯤에 복개가 됐어요. 그러니까 자전거 배우다가 빠지고 그랬죠. 어렸을 적엔 자전거를 안 배우고 그랬으니까. 그때 쯤에 복개가 됐어요.     만약에 승기천이 복개사업이 안됐고, 계속 남아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 것 같으세요? 아, 그게 그냥 남아있었다고 하면 우리가 만수동에 가면 그 밑에 왜 흐르는 거 보셨죠. 걸어가는 길. 대공원 아래쪽으로 운현동 지나가면서 다리 밑으로 지나가는 길이 길게 있잖아요. 저는 엄청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요. 거기를 걸어 다니면 너무 좋은데 거기는 너무 인위적이잖아요. 그리고 좀 외곽으로 빠졌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완전 우리길, 베네치아 같은 동네가 우리 미추홀구가 관광지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혹시 선생님 사시던 주소를 알 수 있을까요? 숭의동 302번지 3통 1반. 여기 현대유비스 옆에 숭의교회 바로 뒤에요. 여기가 숭의동 302번지에요. 나란히 2층집들이 주르륵 있잖아요. 그래가지고 우리는 잘 사는 건 아닌데 우리 아버지가 열심히 돈을 벌어서 여기를 사서, 그렇지 적십자 병원이 옛날에 여기 있었어요. 유비스가 적십자 병원이었어요. 적십자 병원 원장님 뭐 변호사, 판사 이런 사람만 살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여기 독쟁이(독정이), 독정도서관 용일시장 바로 주민센터 바로 길 건너 여기, 여기 군 부대가 지금은 보훈회관이 있죠. 처음에 가시기 전에 저희 아버지가 장군이셨는데 이 부대를 창립하셔 가지고 여기 계셨었어요. 그래서 여기 독쟁이(독정이) 사는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가 도움을 안 준 분이 없다고들 얘기 했어요. 집도 날라가고 그러면 나무 실어다가 주고 그랬다고 했어요.   저는 그 영상에서 “제가 이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굉장히 감성적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진짜 감성적으로 보이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꽃차를 하시는지는 몰랐어요. 그냥 학산문화원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강사님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자연이나 이 고장의 영향을 받으신 분 같아요. 워낙 여기서 토박이로 사셨던 것도 그렇고. 저는 여기는 제가 태어난 곳이잖아요. 그리고 한 번도 여기를 벗어나 봐야겠다고 생각해보질 않아서 내가 갈 곳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 여기가. 그리고 저는 그냥 이렇게 여기서 산 사람들은 잘 모르잖아요. 어디가 어디고. 저는 이 골목골목. 저는 약간 또 이런 게 있어요. 다니는 것도 좋아하지만. 목표의식이 좀 있어요. 그래서 오늘은 여기를 간다, 여기를 돈다, 그러면 그냥 어디 중요한 것을 보고 오는 것이 아니고 골목골목을 목적을 두고 도장 찍는 것처럼 다녀요. 그래서 구석구석 다 알죠.   다 알고 싶으신 거예요? 그냥 걸어가다가 그냥 성향인 거예요. 우리 엄마도 어렸을 적에 제가 골목을 이렇게 걸어가잖아요, 그럼 남의 대문은 되게 잘 넘어보는 거예요. 대문을 옛날엔 담들이 이렇게 들여다보고 갔는데 미처 못보고 가면 다시 돌아가서 다시 이렇게 보고 간대요, 내가. 궁금한 게 그렇게 많은 거예요.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그래서 누가 이제 내가 걸어갈 때 보면은 뭐 저렇게 옆에를 쳐다보고 들여다보고 걸어 다니나 그런대요. 나는 그냥 궁금하니까 저기 예쁜 꽃이 있네, 저건 뭘까 그러고 가서 만져도 보고 그러고 지나다니는 거죠.    어떻게 보면 이 공간은 원도심이라고도 표현하고 되게 낙후된 곳이라고도 얘기하고, 잠깐 있다가 떠날 곳이라고도 생각하는데 선생님한테는 그런 공간이 아니네요. 낡은 집이 있고 그럴지언정 그런 골목이 궁금하신 거고. 애착이 있죠. 그래서 여기 용현2동이 지금 재개발되었잖아요. 여기가 완전히 바뀌었는데. 여기 개발되기 전에 개발한다고 다 묶어놓고 집들 다 허물기 전에 저 여기 들어가서 영화 찍었어요.   아까 그 하품학교 말씀하시는 거세요? 무슨 영화 찍으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마을 사람들하고 다 같이 찍었어요. 여기에서 다 찍었어요. 이 마을 주민들하고 한 50명 정도 같이 찍고.   동네 이야기였던 거예요? 네. 이 동네 이야기. 이 동네가 이제 개발돼서 없어졌잖아요. 아 여기 공원 이름인데 생각이 안나. 그래서 여기서 찍고 이제 마지막 날 밴댕이를 두 박스를 사가지고 구워 먹었어요. 가을이었나? 가을이었어요. 그래서 여기 길에서 철길에서 구워 먹었어요.   현재에서는 지금 없는 것들을 부시고, 새로 짓고 이런 것들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요 우리 이제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그때는 새로 짓는 것을 좋아 했잖아요? 새 거. 그런데 우리가 이제 이 도시고 저 도시고 가보면 부수지 않고 보존했던 데는 다 관광단지잖아요. 여기 평화시장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이렇게 허름하게 있지만 여기가 엄청나게 날리던 곳이에요. 이렇게 생긴 게 네 개가 있었어요. 큰 길을 중심으로, 저쪽에 (숭의) 깡시장이 하나, 사거리를 중심으로 하나, 홈플러스 자리 거기 하나, 이렇게 네 개가 있었어요. 전철이 생기면서 두 개가 개발이 됐고요. 여기는 그냥 있고. 온 인천시가 여기서 옛날에 체육대회를 했죠. 그래서 여기 평화시장 하나가 남았는데 여기가 신포동처럼 옛날에 배 들어오는 곳이라 유통을 여기서 다 한 거예요. 수출하고 그런 것들을. 여기서 살던 사람들이 지금들도 되게 부자들이에요. 부모들이 돈 엄청 벌어서 날리던 곳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현대적인 건물을, 이 평화시장 건물이 사십 년이 넘었거든요. 요즘으로 치면 오피스텔같이 지었잖아요. 1층은 상가, 2~3층은 살림집이에요. 그리고 옥상은 통으로 연결 시켜놓고. 그렇게 건물을 지은 게 최초에 그렇게 지은 거예요. 그래서 되게 획기적인 마을이에요. 물이 얼마나 많았냐면. 독쟁이(독정이) 길이 수봉공원 자락이잖아요. 그럼 여기에서 올라가는 여기에 우물이, 쌍 우물 하나 있는 우물. 지금도 우물이 하나 있을 걸요? 독쟁이(독정이) 뒷역에 우물이 있어요. 은행 농협인가, 그 사이에 우물인가 덮어놓은 게 있을 거예요. 몇년 전에도 있는 걸 봤어요. 바로 독쟁이(독정이) 용일시장 안쪽으로가서 뒤쪽으로 나가면 바로 그런 형태가 있어요. 여기가 물이 얼마나 많은 곳이냐면 우물이 쭉 쌍둥이 우물, 무슨 우물이 있었고 우리가 살던 여기 숭의동, 숭의 교회 쪽도 여기는 학익천 나가는 길이잖아요. 지금도 거기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우물이 있었어요. 우물이 길에, 그니까 물이 그렇게 많아서 우물이 그렇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를 굳이 물을 그렇게 누가 좀 틔어갖고 그렇게 만들려고 했었으면 물은 엄청 많았던 곳이죠. 그리고 여기가 바다가 근접한 곳이고. 그리고 우리들끼리 하는 얘기지만 여기 토지금고 쪽은 비가 오면 지금도 아파트 1층까지 물이 찬다고 해요. 물이 되게 많은 도시예요. 여기 미추홀구가.   미추홀구에 물길이 다시 생긴다면 어떨까요? 저는 이쪽으로 물길은 너무 도회지 쪽이잖아요, 승기천 쪽은. 아무래도 저는 토지금고 쪽에 학익천 그쪽은 약간 외각이잖아요. 외각이고 갖춰져 있잖아요. 거기서 그 송도 돌산 있는 거기까지 물이 연결이 되게 되어있고, 송도 바다 매립한 곳하고도 연결되잖아요. 그러니까 굳이 공사를 그렇게 크게 많이 하지 않아도, 혼자 개인적으로 상상을 하면서 이렇게 하면서 여기까지 가면 참 좋겠다. 왜 송도 연수동 그쪽으로 가면 바다 막아놓은 데 있죠. 거기가 가는 길이 거기잖아요.   이제 마지막으로, 선생님에게 미추홀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미추홀구는 제 몸이죠. 여기서 태어나가지고 벗어나는 것을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미추홀구는 뭐 다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살고 있죠.   요즘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죠. 일자리 때문에 떠나 살기 마련인데 미추홀구를 내 몸이라고 생각하고 이곳을 잘 운영하시는 걸 보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해주시면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아요. 우리 승기천을 우리의 승기천인데 연수구가 사실 우리보다, 우리 (남구)가 이렇게 떨어져 나간 곳이잖아요. 거기서는 승기천 자락을 붙들고 잘 해 놨잖아요. 우리는 뒤늦게라도 시작하니까 다행이긴 한데 개발은 안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미추홀구는 개발 안하고 보존을 했으면 좋겠어요. 왜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새로 조성하는 신도시를 따라갈 수는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역사가 있는 것을 보존하는 게 그 사람들하고 대결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것 같거든요.  감사합니다. 정말 멋있는 말로 마무리 해 주셨어요.  
  • 지금은 미추홀 水다 - 川川이, 승기천(承基川)으로...
    '승기천'은 수봉산에서 발원하여, 미추홀구를 가로질러 남동구, 연수구를 지나 황해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전 구간이 인천 도심을 관통하는 유일한 하천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미추홀 지역의 승기천에 대한 기록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에 미추홀학산문화원은 '승기천'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기록하는 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노인정을 방문하거나, 지역토박이 주민분들을 수소문하고 추천을 받기도 하였고, 거리에 현수막을 거는 등의 과정으로 총 43명의 사람들과 승기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중 9분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았습니다.   "물이 많았던 수봉산, 신기촌에서 고기잡던 이야기, 물이 유난히 차올랐던 동양장, 승기천이 흘러갔던 미추홀 곳곳의 이야기와 길이 덮힌 흔적, 하천의 흔적때문에 유난히 꺾어진 골목길 등 지금 찾아볼 수 있는 흔적들까지, 미추홀에 오래 살아온 주민들이 기억하는 승기천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 '승기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될까요?"   # 미추홀학산문화원은 위 영상제작과 함께 '열린집담회'를 운영하여 승기천의 역사 속 이야기와 '물'이 흐르는 도시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인문적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도 하고, 또한 성북천, 굴포천의 사례를 곁들여 주민의 삶에서 하천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또한 이 과정을 바탕으로 학산지속가능발전협의회와 함께 마을지 [미추홀, 살아지다2 승기천을 기억하다]를 제작했습니다.  * 주최, 주관 : 미추홀학산문화원 * 후원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제작 : 나우미디어    * 인터뷰 참여 : 김규환, 김유미, 민후남, 박성희, 양용석, 오인영, 이금선, 이태승, 장연지  * 자료제공 : 김상태 인천사연구소 소장  * 지도출처 : 인천시 지도포털 스마트GIS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다큐멘터리 #승기천 
  • [바지락칼국수] 바지락 국물에 스며든 가리비의 고귀함
    “내가 믿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손님들께도 내놓아야죠.”  주인장의 이 말속에서 가리비조개처럼 귀한 마음이 엿보인다.   이기례(1962년생) 인천 미추홀구에서 태어나서 60여 년을 한동네에서 살고 있고, 식당을 운영한 지는 23년 되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과 알고 지낸 세월이 20년이 넘었네요. 사장님 고향이 어디신지요? 인천예요. 여기 남구(현재 미추홀구) 주변에서 살았어요. 미추홀구에서 60년을 넘게 살고 있어요. 칼국수집을 하게 된 동기가 궁금한데요. 언제부터 운영하셨는지요? 98년도에 시작했으니 23년차네요. 아이들이 4학년, 1학년이었으니까요. 지금은 남편하고 운영을 하지만 처음에 식당 시작할 때는 언니 두명하고 함께 시작을 했어요. 모두 칼국수를 워낙 좋아했어요. 그래서 메뉴를 칼국수로 정하고, 언니의 친구가 칼국수 가게를 하고 있었기에 거기서 먼저 배웠죠. 선경험이 있으신 그분이 칼국수 가게를 권장하시던가요? 적극 권장을 했어요. 처음 음식점을 하는 입장에선, 칼국수가 조리도 비교적 복잡하지 않고 국물 맛 잘 내면 손님들이 좋아할 거다 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어야 재미있고, 조리법이라든가 반찬이 비교적 간단해서 메뉴로 정하기엔 별 무리가 없었죠. 네. 맞아요, 일단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게 재미있죠. 간판이 ‘가리비 칼국수’인데 간판만 본다면 가리비를 주재료로 하는 것 같단 생각을 하게 되는데 가리비를 재료로 쓴 것이 처음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중간에 바꾼 것인지 궁금한데요. 오해의 소지가 좀 있을 수 있는데요, 간판을 그렇게 붙인 건 가리비조개 모양이 예뻐서 그냥 가리비를 붙였을 뿐인데 사람들이 이걸 약간 오해를 하고 가리비만 넣는 줄 아시는 분들이 많아요. 이십여 년 전에는 삐죽조개(마당조개)라고 하는 조개를 칼국수에 주로 넣었어요. 삐죽조개는 국물 맛이 시원하거든요. 예전에 삐죽조개는 오이도 쪽에서 많이 작업을 했었는데 지금은 갯뻘이 오염 돼서 아예 작업을 못하고 이젠 귀한 조개가 되다보니 지금은 바지락으로 칼국수를 끓이게 됐어요. 가리비는 원하는 손님한테 조금 넣어드리게 되었죠. 그러니까 온전히 가리비만 넣어서 하는 칼국수는 없죠. 가리비는 관자를 먹기에 적합하지, 시원한 육수를 내지는 못해서 가리비만 넣고는 맛이 덜하죠. 가리비는 가격도 비싸죠? 네, 명절 때나 휴가 시즌엔 두세 배 올라서 가리비 하나에 2~3천 원씩 해요. 3천 원까지 할 때는 저희로서도 넣어드리질 못해요.  가리비 양식이 굉장히 힘들대요. 예전에는 동해에서 양식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동해에서 나오는 건 거의 없고 중국산, 러시아산, 일본산이예요. 국내산 가리비가 있긴 한데 아주 작아요. 십 원짜리 동전만큼 아주 작아서 손님들께 내드리기가 적합하지 않죠. 그런 어려움이 있어서일까요? 가리비칼국수를 거의 못 봤어요. 조개구이 집엔 있겠네요? 그렇죠. 우리도 가리비 구이랑 찜을 했었는데, 그거 하다 보니 술을 놔야 되니까, 그러다보면 밤늦게까지 해야 하고 술 드시고 안 좋은 모습을 많이 겪게 되고 해서 다 없애고 간단하게 찜만 하기로 했죠. 처음에 언니 두 분하고 하다가 지금은 남편하고 두 분이서 운영하는데, 남편분이 요리에 재능이 있으셨나 봐요? 이십 년 세월이 흐르다 보니 가정사도 변해서 언니들은 손자녀가 생기면서 아기들 키우느라 손을 떼고 저희 남편이 투입됐어요. 남편은 직장생활 하다가 이 쪽으로 오게 됐는데 우리 둘 다 조리는 하는데, 아무래도 남편이 힘이 더 좋으니까 주로 남편이 조리를 하죠. 처음에 언니한테 배워서 바로 하게 된 거죠. 칼국수 면은 직접 뽑으시는지요? 처음에는 직접 뽑았는데 그게 날씨나 온도에 따라서 면의 쫄깃함이 굉장히 차이가 많이 나요. 날씨의 습도나 건조함의 차이에 따라서 달라지니까 아무래도 전문가가 하는 걸 받아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고 있어요. 지금 삼대째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한테 맡겨서 이용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그분도 작은 규모로 출발했었는데 칼국수 식당에서 많이 주문을 하다 보니 지금은 공장으로 운영할 정도로 커졌어요. 칼국수하면 면발하고 육수가 중요한데, 어떤 것들이 들어가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것들예요. 멸치, 디포리, 다시마 그리고 황태 덕장에서 가져오는 황태, 양파, 건새우 등이 들어가요. 말만 들어도 시원한 느낌이 나는데요. 건어물이라 해도 신선도가 중요할 것 같은데 그런 재료들은 어떻게 수급을 하시는지요? 마산에 멸치 양식하고 건어물 취급하시는 할머니한테 받다가, 그분이 너무 연세가 많으셔서 다른 곳 연결해 주셨어요. 건어물은 미리 건조해 놓았다가 거래를 하면 되는데 생물인 바지락이나 가리비 같은 경우는 수급 받는데 어려움은 없으신지요? 가리비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가격이 너무 오르고 수급량이 적을 때는 조기에 영업을 마쳐야 할 때도 있고요. 바지락 같은 경우는 해감을 한 걸 받아도, 뻘 흙이 덜 빠진 경우가 있어서 저희 수족관에 하루 이틀 정도 더 해감을 시키죠. 그리고 바지락 하나하나 다 흔들면서 뻘 흙이 남아 있는지를 선별하죠. 바지락도 수급량이 충분치 않고 해감한 것이 모자라면 영업을 못하죠. 바지락도 수급량이 부족할 수도 있군요. 그럼 바지락은 국내산인지요? 수급량이 부족한 경우는 양식이라 해도 태풍이거나 비가 많이 올 때는 작업이 안돼서 수급이 안돼요. 바지락은 국내산과 중국산을 쓰는데 국내산은 봄부터 9월까지 가장 좋을 때이고 그 이후로는 작업을 안 해요. 그때는 중국산을 써요. 중국은 워낙 땅이 넓다보니 따뜻한 곳에서 양식이 되나 봐요. 그리고 북한산이 중국으로 들어와 우리나라로 들어오기도 해요. 북한이 추운데도 그쪽에서 들어오는 건 살도 많아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칼국수 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반찬이 김치잖아요. 칼국숫집을 고를 때 김치 맛에 따라 선택이 결정될 정도로 중요한데요, 김치는 직접 담그시는지요? 네, 저희 남편이 직접 재료 사다가 담가요. 김칫거리는 농산물시장에 고정 거래처가 있고, 고춧가루도 전남 신안에서 고정으로 거래하고 있어요. 태양초 고춧가루예요. 개인 거래이기에 세금공제 혜택도 안돼요. 수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내가 믿고 먹을 수 있는 걸 손님들께도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고 있죠. 해산물 같은 경우는 45일 기간 내에 동해나 일본해류 중국해류가 다 섞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근해에서 잡히는 건 거의 비슷하다고 봐야하지만 속임수가 많은 채소만큼은 국산을 고집하고 있어요. 재료의 선별과정 얘기를 듣다보니, 사장님의 성품이 식당을 운영하는 면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또 김치하면 고춧가루는 선명한 빛깔에서도 중요하지만 또 그에 못지않게 맛을 내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젓갈이잖아요. 어떤 젓갈을 쓰시는지요? 까나리액젓을 시중에서 사서 써요. 매운 김치를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 무채김치는 고춧가루 없이 담아요. 흔히들 칼국수 하면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생각을 하는데 혹시 사장님만의 특별한 조리 방법이 있으신지요? 비법은 따로 없고요. 맛은 원 재료에서 나온다라는 생각이기에 최상의 재료를 쓰고 있어요. 맞습니다. 그리고 육수하고 면하고 혼합하는 방식은 어떠신지요? 육수를 먼저 내놓은 다음에 바지락 넣고 끓으면, 그 때 면을 넣어요. 어떤 사람은 바지락을 살짝 끓여서 건져놓고 면이 끓을 때 넣는다고 하던데, 그렇게 하니 바지락 육수가 덜 우러나와서, 저는 바지락과 면을 주문량대로 함께 넣고 끓여요. 면을 끓이는 시간은 타이머를 놓고 조절하고 있어요. 판매하는 음식의 경우, 대중적인 소비자의 입맛이 되어버린 합성조미료, 과도한 소금, 설탕의 사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소금, 설탕을 사용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소금과 설탕을 거의 사용하지 않을 경우는, 바지락이 살이 통통히 올랐을 때는 단맛이 우러나오고 바지락 자체가 짠맛을 안고 있기에 소금, 설탕을 사용 안 해도 되지만 그 반대로 바지락 살이 적을 때는 그 짠맛을 감소시키려면 최소량의 조미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오히려 감칠맛에 익숙해진 손님들은 조미료를 넣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사장님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부재료를 국내산을 쓰고, 바지락을 많이 넣는 거에 비하면 칼국수 가격 7000원이면 저렴한 편이고요, 해산물을 다루니만큼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데, 예를 들면 바지락 하나라도 상한 게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바지락 하나하나 쳐서 소리를 듣고 선별 작업을 아침마다 해요. 다른 곳은 그냥 들어온대로 한다는데 저는 일일이 하나하나 골라요.   이십 년 넘게 식당을 운영하면서 코로나 전과 후로 어려움이 있으셨다면 어떤 점이 있으신지요? 몇 년에 걸쳐 저희는 칼국수 가격을 7000원으로 유지하고 있어요. 물가 상승폭에 비해 저희는 음식 값을 올리질 못하겠어요. 더군다나 코로나로 인한 매출이 40% 떨어졌으니 힘들죠. 코로나 초기 확장세가 심할 때는 45% 떨어질 때도 있었는데, 그렇다고 지금도 더 나아진 건 없는데 그 세월이 오래가서 그 걱정이 좀 무디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체감으로 느끼는 매출 감소세는 좀 덜해요. 매출이 감소되고 할 때는 어떤 생각이 드세요? 내가 잘 못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니라서 속상하실 것 같아요. 소상공인을 위한 정부의 지원에 대해선 어느 정도 만족하시는지요? 부가세를 많이 내다보니 별 도움이 안돼요. 코로나19로 음식점에는 포장이 새로 생기거나 늘어나는 추세고, 또한 포장이나 배달로 인한 일회용 용기 사용이 환경오염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데요, 이 점에 대한 사장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희는 지금도 배달은 안하고 포장을 새로 시작했는데요, 환경을 생각하면 당연히 마음이 안 좋지만 매출을 생각하면 피할 수 없는 거고, 더욱이 후손을 생각하면 마음 아프지요. 가능한 손님들께 댁에서 용기를 가져오길 당부 드리고, 더 큰 규모로 생각한다면 재생용기 같은 것들이 나와 주면 좋겠어요. 미추홀구에서 오랜 세월 식당을 운영해오시면서 드나드는 손님들을 통한 식생활의 변화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음, 이십 년 넘게 꾸준히 찾아주시는 단골손님들을 볼 때에는 저희 집 칼국수가 변함이 없기에 오시는 거겠죠. 또한 그 손님들의 식생활면에서도 변화가 없다는 반증 아닐까 해요. 칼국수는 꾸준히 즐겨 드시는 음식인거죠. 손님들 접대하랴 인터뷰 응하시랴, 분주한 가운데 끝까지 차분히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 유지하면서 이 자리에 오래도록 남아주시길 기원합니다.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표기자 (면담지원 : 김순옥) • 면담일시 : 2021. 9. 8. • 면담장소 : 가리비칼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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