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맨이 씨뿌리고 번역 전사들이 꽃 피운
드라마 수출사
한류가 해외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한류’라는 명칭을 유행시킨 드라마였다.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 방송사들은 광고 산업에 의존하는 수익 구조 때문에 드라마 수출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화가 정착된 후, 방송계에 자유로운 제작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드라마 수준이 향상되었고, IMF 금융위기 등으로 외화 조달이 중요해지자 드라마 수출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때마침 IMF 금융위기로 일본 드라마 수입에 어려움을 겪은 대만 등에서 일본 드라마의 대체 상품으로 한국 드라마를 수입하면서 본격적인 아시아 시장 개척이 이뤄졌다. 대만은 당시 중화권의 대표적 콘텐츠 공급지였기 때문에 한국 드라마의 수출도 이를 통해 확대될 수 있었다. 뒤이어 초고속 인터넷 보급으로 인한 인프라 환경 변화는 인터넷 플랫폼을 통한 팬덤 공동체를 만들어 한국 드라마들의 세계적인 확산을 이끌었다.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1. 민주화 확산으로 드라마의 질적 수준 향상
한류가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기원에 대해 얘기할 때면,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빠지지 않는다. 1997년 중국 CCTV를 통해 방영된 이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면서 ‘한류’의 존재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랑이 뭐길래> 이전에 방송물 수출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KBS는 1980년대부터 <떠돌이 까치>, <아기공룡 둘리>, <날아라 슈퍼보드>와 같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홍콩, 유럽 등지에 수출했지만, 드라마 수출이 성사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콘텐츠 수출의 가장 큰 비중은 일본 등 해외에서 하청받아 원화 제작만 담당하는 애니메이션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드라마 수출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였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방송 콘텐츠의 해외수출을 위해 KBS영상사업단, MBC프로덕션, SBS프로덕션 등을 설립했다. 처음 포문을 연 것은 MBC프로덕션이었다. MBC프로덕션은 1992년과 1993년 <사랑이 뭐길래>, <질투>, <여명의 눈동자>와 같은 드라마들을 홍콩 케이블방송, 중국 하얼빈TV, 일본 위성방송 등에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전까지 방송사들은 드라마 수출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방송사 수익의 대부분이 광고에서 나오고 있었고, 우리 드라마가 해외에서 인기를 끌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익보다는 프로모션 차원에서 한국 드라마를 해외에 알린다는 마음으로 수출을 추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문화관광부에 문화산업국 등이 신설되면서 정부 관계자들이 방송 3사의 수출 담당자들을 모아 놓고 프로그램 수출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며 힘써 달라고 독려를 해야 할 정도였다. 정책을 수립한 정부 입장에서는 실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0년대, 한국 드라마의 질적 수준이 높아지는 두 가지 사건으로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는 민주화였다. 1993년 최초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민주적인 분위기가 높아졌고,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도 자유로운 분위기가 조성됐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드라마 제작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군사 정부는 드라마의 주제나 소재, 각본까지 꼼꼼히 검열했다. 제작자들은 이런 검열 관행을 피하기 위해 알아서 멜로드라마나 사극, 가족 홈드라마 정도로 장르를 제한해 온 측면이 있었다.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출처: MBC 홈페이지)
하지만 김영삼 정부 때부터 이런 관행이 사라졌고, 김대중 정부에선 자유로운 분위기가 더 강해졌다. 방송사 제작자들은 새로운 분위기에 맞춰 새로운 주제와 아이디어를 내놓기 시작했다. 당시 관계자들이 “드라마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이 드라마 산업에 새롭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발현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전원경, 2014)고 회고할 정도로 ‘지원도, 간섭도 없이 방송사 자율에 맡기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었다.
이와 함께 방송의 상업화가 가속화된 것도 드라마 품질 향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대 들어 한국 경제의 빠른 성장으로 광고시장은 급속도로 커졌다. 방송사들은 더 많은 광고를 얻기 위해 시청률 경쟁에 돌입해야 했다. 특히 1991년 민영방송 SBS의 개국으로 3사 체제가 재편되면서, 시청률 경쟁은 더 가열됐다. 드라마는 중단기적으로 방송사의 시청률을 확실하게 확보해주는 무기였다. 방송사들이 시청률의 노예가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경쟁의 힘은 우리 드라마의 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2. 드라마 수출 기회 제공한 IMF 금융 위기
해외시장 환경도 변화하고 있었다. 1990년대 아시아의 미디어시장은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대만도 1987년에 37년 동안 지속됐던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고 상업 미디어가 늘어나고 있었다. 아시아 신흥국들 모두 경제성장으로 중산층이 크게 늘어났고, 대중문화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공통점도 가지게 됐다.
미디어산업이 급격히 발달하게 되자 아시아 국가들의 TV 속 풍경도 변화했다. 전통적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국산 프로그램 편성 비율은 70% 내외로 서유럽이나 중남미보다 높았다. 아시아 국가들은 식민지 경험 등을 거치면서 서구 미디어 상품이 자국 문화에 해가 된다고 인식해 온 측면이 있었고, 정부가 이를 규제하며 이데올로기적 통치를 하려는 경향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위성방송, 케이블 방송 등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방송 채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프로그램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국내 프로그램만으로는 채널들을 채우기 어려웠고, 외국 프로그램 공급자들에게 사업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었다.
대만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대만은 과거 국민당을 따라 중국에 넘어온 중국 출신 외성인(15%)과 대만 원주민 출신 본성인(85%)이 오랫동안 정치 대립을 해왔다. 정치, 경제, 사회의 실권을 쥔 외성인들은 1960년대부터 지상파 방송을 설립해 국민당에 유리한 뉴스를 주로 방송했다. 이에 대항하는 본성인들은 케이블 방송으로 대응했다. 대만은 지형적으로 공중파가 수신되지 않는 지역이 많아 이를 중계하는 유선방송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87년 계엄령이 폐지되면서 대만 정부는 1993년 케이블 방송들을 합법화했다. 그 결과 대만에는 100여 개에 육박하는 케이블 채널들이 존재하게 되었고, 채널이 늘어나자 프로그램 수급이 문제가 됐다. 여기에 대만 정부가 케이블 방송 연성화를 위해 ‘국산 프로그램 20% 의무 편성’ 조건을 없애자 값싼 외국산 프로그램들로 눈을 돌리는 사업자들이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기폭제가 된 것은 1997년 아시아 IMF 외환위기였다. 아시아 외환위기는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의 급작스러운 가치 하락과 이웃한 아시아 국가들의 연쇄적인 환율 상승에서 시작된 사태였다. 한국, 인도네시아, 태국 등이 이 위기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았고, 한국의 경우 달러당 환율이 40%까지 오르기도 했다.
방송 프로그램을 수입하던 국가들에게 환율 위기는 치명적이었다. 대만도 자국 통화가치가 15% 이상 떨어져 인기 높은 일본 프로그램을 계속 수입하기는 어려웠다. 대체품을 찾던 대만 방송사 관계자들에게 중국에서 방영되는 한국 드라마들이 눈에 뜨였다. 한국 드라마 가격은 일본 드라마의 10분의 1 미만이었지만 일본 드라마와 비슷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한국 방송사들도 적극적이었다. 외환위기 영향으로 수출의 중요성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늘어난 한국 드라마의 대만 수출은 홍콩, 중국으로까지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 후반부터 홍콩은 월경을 통해 중국 본토 및 대만, 동남아시아 등지에도 중화권 방송을 전송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즉, 1997년 후반 외환위기 사태의 여파로 새로운 수익원이 절실해진 한국 방송사들이 미국과 일본 방송프로그램 수입이 어려워진 대만시장으로 드라마 수출에 나선 것이 큰 계기가 됐다. 이때 대만으로 수출한 드라마들이 높은 인기를 끌면서 중국, 동남아시아시장으로의 진출이 늘어났다. 아시아를 뒤덮은 IMF 외환위기가 한국 드라마산업의 경쟁력을 발견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었다.
3. 인프라 환경 변화가 이끈 한국 드라마시장 확대
이후 2003년 <겨울연가>, 2005년 <대장금> 등이 메가 히트를 치면서 한류 드라마 수출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드라마 제작비가 점점 올라가면서 저가 판매로 유지하던 아시아시장만으로는 시장 확대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서구 방송사로의 판매 확대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200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으로 드라마를 즐기는 환경이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인터넷망이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초고속 인터넷망으로 변화한 것이다. 과거에는 영화나 드라마 파일의 용량이 꽤 커 인터넷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려면 긴 시간이 걸리곤 했다. 그런데 초고속 인터넷망이 구축되자 인터넷을 통한 영화, 드라마 감상이 빠르게 늘어나게 됐다.
이 영향으로 해외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한류 드라마를 즐기는 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류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각각의 국가에서는 매우 작은 집단이지만, 전 세계로 모으면 큰 집단이었다. 과거에는 국가별 방송사를 대상으로 영업하기 때문에 이들만 바라보고 수출을 추진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요술 방망이는 각 나라에 흩어져 있던 한류 드라마 팬들을 하나의 취향 공동체로 묶어내고 있었다. 북미와 유럽 등 과거에는 넘볼 수 없던 시장에서도 한류 드라마를 즐기는 팬들이 등장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한 영화, 드라마 감상이 빠르게 늘어났다.
(출처 : 셔터스톡)
(출처 : 셔터스톡)
그런데 세계인이 한류 드라마를 즐기기 위해선 문제가 있었다. 언어의 장벽이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번역된 자막이 필요했다. 방송사가 공식 수출용으로 판매한 게 아니라 해외 시청자들끼리 ‘스스로’ 파일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아 자막은 더 귀했다. 목마른 한류 팬들은 스스로 우물을 팠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번역한 자막 파일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혹은 이런 시장을 포착해 자막을 제공하는 드라마 서비스가 개발되기도 했다.
2010년대 아시아 콘텐츠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한 ‘드라마피버(dramafever.com)’나 ‘비키(viki.com)’ 같은 드라마 플랫폼들이 이런 서비스들이었다. ‘드라마피버’는 2009년 재미 교포 박석과 박승이 창업한 한국 및 아시아 드라마 스트리밍 서비스였다. 두 사람은 미국에 한국 드라마를 불법으로 공유하는 사이트가 20여 개나 되는 것을 보고, 합법 사이트를 만들어 빠른 시간 안에 자막을 붙여 서비스했다. 2015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조사에 의하면 ‘드라마피버’의 월 순방문자 수는 2,200만 명이고 이 가운데 미국 내 접속자 비율은 52.5%나 됐다. 매월 1천만 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이 사이트를 통해 한류 드라마를 즐긴다는 결과였다(고재석, 2016. 1. 8). ‘비키’도 벤처인 호창성, 문지원이 2007년 설립한 사이트로 드라마, 영화 등에 다국어 번역 자막을 붙여주는 스트리밍 플랫폼이다. 비키도 회원번역가나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실시간으로 드라마 자막을 입혀 올릴 수 있게 해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아시아 드라마 스트리밍 서비스 ‘드라마피버’와 ‘비키’ (출처: 셔터스톡)
해외 드라마 팬들이 이런 수고를 하면서 한류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다양했다. 과거 우리 드라마가 아시아권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로 꼽히던 요소들, 예를 들어 충성심, 헌신, 희생 등과 같은 동양적 가치관이 잘 녹아 있다는 점도 중요했다. 한류 드라마는 섹스, 노출, 폭력 등에 대한 심의가 엄격해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너무 완벽하고 복잡한 미국 시리즈물들과는 달리 한국 드라마식 로맨틱 코미디에 담긴 관습적 표현들이 오히려 감정적 공감을 더 잘 이끌어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소구되는 원인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한류 드라마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4. 대기업 없는 평평한 운동장에서 펼쳐진 드라마 수출사
반도체, 자동차, 휴대전화 등 대한민국의 대표 수출상품들은 대부분 대기업이 주도해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한류 드라마가 해외로 진출하는 과정에서는 대기업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수출의 물꼬를 트고 아시아 시장 확대를 밀고 나간 것은 작은 무역 에이전트들과 방송국의 상사맨 후예들이었다. 이들은 아무도 더 앞선 스타트라인에 서 있지 않았고, 누구도 더 우위를 쥐지도 않았다. 정부는 세세한 계획과 지휘가 아니라 기간 인프라를 정비하고 자유로운 창작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수출에 기여했다.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에서 드라마 제작자들은 동등하게 경쟁했고, 이 경쟁의 힘으로 한류 드라마들은 빠르게 발전하고 진화했다.
해외 시장 개척을 추동한 것은 위기 속에서 조금씩 열린 기회들이었다. 아시아에 불어닥친 IMF 금융위기는 일본 상품의 대체 가능성을 열어 1차 시장 개척을 가능하게 했다. 초고속 인터넷 보급으로 인한 인프라 환경 변화는 인터넷 플랫폼을 통한 팬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해줬다. 이후 OTT산업의 확대로 새로운 창이 열렸을 때도, 한류 드라마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채찍질한 것은 재미없는 드라마는 도태되도록 가차 없는 비판을 날려온 눈 높은 한국 시청자들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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