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간 ‘로지’를 만드는 사람들과
한류 미디어 생산의 과제
가상인간 ‘로지’는 누가 만들었을까? 인공지능과 디지털 그래픽 기술의 조합으로 비물질적으로 존재하는 듯 묘사되는 가상인간은 사실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노동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조합한 로지의 얼굴을 때마다 덧붙이고 편집하는 기술전문직의 노동에서부터 소셜미디어 게시물과 댓글을 통해 로지의 이미지와 평판을 관리하는 디지털 돌봄노동, 뿐만 아니라 로지를 대신해 얼굴 없이 연기하고 춤추고 촬영하는 대역배우들이 있다. 이 모든 비가시적 노동을 ‘로지’라는 미디어 콘텐츠로 만들고 유통하는 디지털 미디어 인프라는 인공지능 기술 이후 미디어 생산의 체계가 어떻게 (재)구성되고 있는지 살펴보게 한다. 한류 미디어 콘텐츠로 점차 확장하고 있는 가상인간을 누가, 혹은 무엇이 만들고 있을까를 살펴보며 한류 미디어 생산의 체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그려볼 필요가 있다.
이정현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HK연구교수
1. 가상인간(Virtual human) 인플루언서의 등장
2021년 7월 신한라이프의 광고는 낯선 얼굴을 하고 스무 살 남짓으로 보이는 여성이 장소를 옮겨 다니며 매우 능숙하고 세련된 춤을 추는 장면으로 구성됐다. 광고 직후 이 모델에 대한 관심은 제법 높았는데, 모델의 정체를 밝힌 이들은 연예인 기획사가 아니라 콘텐츠 제작사 로커스 엑스(현 사이더스 스튜디오 엑스)였다. 이들이 밝힌 모델의 정체는 ‘오로지 단 한 사람’이라는 뜻의 한글 ‘오로지’에서 이름을 딴 ‘로지’로 영원한 22살이자, 인간, 패션, 환경을 사랑하는 세계관을 갖고 MZ세대와 소통할 수 있도록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구현한 가상의 인물이었다. 가상인물이 이토록 자연스럽다는 사실은 많은 화제성을 낳았다. 이후 로지는 2023년 상반기 기준 11개 브랜드의 광고 혹은 브랜드 모델로 활동했으며, 라디오 방송에서부터 드라마까지 미디어 콘텐츠 영역을 종횡무진했고, 각종 행사의 홍보대사로 위촉되고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13만 명 이상을 거느린 인플루언서로 성장했다.
현재 우리의 미디어 지형에서 가상인간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 만들어 낸 가상의 존재이지만 인간의 외형과 행동 양식을 모사하며 이들의 역할을 일정 부분 대체하거나 공유하고 있다. 로지의 활약은 기획사 체제하에서 오랜 시간 전문 훈련 과정을 거치고, 셀러브리티로서 개인의 평판과 가치를 기획, 연출, 관리해 온 국내 연예기획산업 체제 안에서 매우 독특한 사례다.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연예인 준비생 혹은 연습생들을 제치고 수많은 셀러브리티들을 대신해 광고, 잡지 촬영, 인터뷰, 드라마 출연, 음반 발매, 소셜미디어 소통 등을 해내며 여러 유사 사례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어떻게 이 모든 것이 가능했는지를 미디어 생산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누가 로지를 만들었을까?’라는 매우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하는데, 질문에 대한 답은 그만큼 단순하지 않다.
2. 로지를 만드는 사람들
로지가 화제가 된 이후 로지를 누가 만든 것인지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상당했다. 2021년 한 해만 해도 ‘로지의 아빠’나 ‘제작자’, 때로는 ‘매니저’로 불린 로지의 제작사 사이더스스튜디오X의 백승엽 대표 인터뷰가 20건 가까이 보도되거나 방영됐다. 이 과정에서 백승엽 대표는 로지의 제작 방법을 공개했으며, 같은 해에 로지 제작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로지 기획팀 및 제작팀 구성원들의 인터뷰도 일부 이어졌다(허영은, 2021. 1. 27.).
이름 그대로 가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인 만큼 로지를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컴퓨터 그래픽, 알고리즘, 자연어 처리, 빅데이터 분석, 디지털 더블 등 인공지능 관련 기술이다. 로지가 가상인간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근거는 로지의 얼굴이 참조대상이 되는 인간의 존재 없이 온전히 기술에 의해 창조됐기 때문이다. 백승엽 대표 및 로지 제작팀의 인터뷰에 따르면, 로지는 수천 개의 무작위 얼굴 데이터를 학습하고 조합한 생성적 적대 신경망(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s, GAN)이 MZ세대가 선호하는 가상의 얼굴을 만들어냈고, 3차원 얼굴 이미지 생성 및 합성 기술인 딥리얼(Deep real)을 사용해 가상의 얼굴을 덧입혔다. 로지가 움직일 때 보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 디지털 이미지의 관절과 근육 요소를 세분화하는 리깅(Rigging) 기술도 사용됐다. 이후 로지의 활동 영역이 확장되면서 인공지능 음성 합성 기술을 통해 로지만의 목소리도 만들어 음반을 만들거나 드라마에 출연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 모든 기술이 저절로 로지를 만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기술로만 로지가 ‘마치 사람처럼 느껴지는’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화려한 기술의 이면에는 로지를 만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로지 얼굴과 표정 제작 화면 (사진출처: EBS Culture <직업탐구-별 일입니다> 화면 캡처. 2021. 11. 17. 방영)
로지의 생산에서 단연 가장 두드러지는 노동은 기술전문직들의 편집 작업이다. 로지의 얼굴로 이뤄지는 모든 작업에는 기술전문직의 후반작업이 잇따른다. 로지의 얼굴을 덧입히는 작업은 기존의 미디어 생산지형에서 영상을 찍고 편집하던 후반작업과는 또 다른 양의 작업을 수반한다. 단순히 얼굴만 2차원으로 덧입히는 것이 아니라 얼굴 움직임, 머리카락의 질감, 피부표현, 채도, 그림자 등의 세부요소를 조정해서 실제 인간처럼 자연스러운 표정을 연출한다. 로지는 광고나 드라마 등 전통적인 미디어뿐만이 아니라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꾸준히 올리며 인플루언서로의 위치를 다지고 있다. 로지의 모든 게시물은 기술전문직들의 합성 작업을 거쳐야 하는데 이때도 로지의 얼굴 합성뿐 아니라 카메라가 담지 못하는 빛, 그림자, 명암, 질감 등을 그래픽으로 구현하고, 그 위에 메이크업이나 장신구 등을 그래픽으로 덧입혀 실제 사람의 사진과 유사한 완성도를 만들어낸다.

로지 인스타그램 화면 (사진출처: Rozy 인스타그램 화면 캡처. https://www.instagram.com/rozy.gram/)
로지를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로지가 좀 더 사회적 수요와 흥미를 끌어낼 수 있도록 로지의 컨셉, 활동, 외형 등을 기획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로지의 특성은 시작부터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됐다. “동양적인 외모에 서구적인 몸매를 가졌고, 패션과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선도하며, 모험을 즐기고 환경을 생각하는 건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Z세대”로 키, 몸무게, 발 사이즈, 혈액형, MBTI, 취미 등의 설정도 모두 공개돼 있다. 드라마, 라디오, 음원 등을 통해 노출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로지는 인스타그램을 주요 채널로 대중과 소통하는데, 대중들이 로지에게 친근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로지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은 꾸준하게 업데이트된다. 계정에는 로지의 일상을 여행, 패션 등과 연계한 게시물이 등록되는데, 계정 주인은 15만 명이 넘는 팔로워들을 관리하고 게시물에 대한 댓글에 꾸준히 반응하며 직접 소통하고 있다. 이 모든 작업은 크리에이티브팀으로 불리는 제작팀의 노동으로 이뤄진다. 이들은 대중들이 로지에 대한 실재성의 감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애정, 관심, 시간, 에너지, 자원 등 물적 투자를 동반해 로지의 이미지와 평판을 관리한다.

로지 광고촬영 모습과 얼굴이 가려진 대역배우 (사진출처: EBS Culture <직업탐구-별 일입니다> 화면 캡처. 2021. 11. 17. 방영)
마지막으로 가장 비가시적이지만 로지가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노동을 제공하는 이들이 있다. 로지는 실재가 존재하지 않고 디지털로 만들어진 가상인간으로 소개됐지만, 사실 디지털로 만들어진 것은 로지의 얼굴과 목소리뿐이다. 로지의 모든 것을 기술로 구현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아직 비용 효율의 측면에서 어려움이 많다. 때문에 로지는 만들어진 얼굴을 실제 인간의 몸에 그래픽 기술을 통해 덧입히는 방식을 취한다. 로지가 춤을 출 때는 댄서가 로지의 몸을 대신했으며, 로지가 실제 인간처럼 느껴지도록 하기 위해 로지의 표정을 생산하는 알고리즘이 학습할 800개가량의 얼굴 표정만 연기한 대역배우도 있다. 로지가 음반을 낼 때는 인공지능을 이용해 만든 목소리만으로는 감성적인 디테일을 표현할 수 없어 이 부분을 보완해 준 대역가수도 있다. 로지가 광고나 화보 촬영을 할 때는 신체 부위 및 포즈별로 다른 대역모델이 섭외되기도 한다. 이들은 로지가 인스타그램을 벗어나 다양한 활동을 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가상인간이라는 로지의 정체성이 유지되기 위해 자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거나 신분을 드러낼 수도 없다. 그들의 존재는 제작자들 사이에서 비밀에 부쳐지며, 로지 제작과정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방송 영상에 드러나야 하는 경우에도 이들의 얼굴은 모자이크로 가려진다.
3. 로지 이후 미디어 생산의 지형, 그리고 한류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해 온 미디어 생산자는 방송프로그램을 만드는 PD나 작가군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가상인간 로지의 경우, 미디어 생산의 주체들이 더 이상 이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로지를 누가 만들었을까?’라는 이 글의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여느 언론사 인터뷰처럼 로지 제작사 대표가 될 수도 있겠지만, 로지의 얼굴을 처음 조합해 낸 알고리즘을 운용한 기술자가 될 수도 있고, 로지의 성격과 취향을 특정 방향으로 설정해 소셜미디어에 일관되게 게시한 기획자일 수도 있다. 또한 이 모든 노동들의 뒤편에서 로지의 몸을 대신 연기한 얼굴 없는 배우들이나 로지의 광고나 소셜미디어 게시물에 댓글을 달고 소통을 시도하며 로지에 대한 실재성의 감각을 만들어 낸 소비자들도 로지가 콘텐츠로서 생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디지털 미디어 인프라 역시 로지의 생산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공지능 기술이 연루된 모든 활동은 마치 물질적 제약에서 벗어나 추상적으로 활동하는 듯 보이지만 인공지능, 플랫폼, 알고리즘 등을 만들고 운용하는 데에는 전문 기술자뿐 아니라 단기 계약에 근거한 창작 노동이나 단순 비숙련 노동 등 보이지 않는 유령 노동이 존재한다(이광석, 2022). 하지만 이들은 기술의 뒤에서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기술적 구성물이 존재하는 조건이 된다. 마노비치(Manovich)는 플랫폼 자본주의를 살펴보며 데이터를 생산, 수집, 분석, 관리하는 주체에 따라 계급이 새롭게 정리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Manovich, 2011). 인공지능이나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콘텐츠의 경우에도 기술의 신기함이나 신비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물질 노동을 미디어 생산지형 안에 새롭게 포함함으로써, ‘누가’ 생산하고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다층적으로 살펴보고 확장된 의미의 미디어 생산과정 안에 존재하는 노동의 위계 구조를 비판적으로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인플루언서로서 로지의 영향력이나 인기가 한결같지는 않다. 실제로 2024년 올해 로지는 2년 동안 이어오던 신한라이프 광고모델을 ‘인간 배우’에게 다시 돌려줬다. 하지만 로지의 영향력은 로지가 이루어 낸 광고의 개수나 팔로워 수가 아니라 미디어 생산지형의 새로운 형태를 제안하고 보여줬다는 점에 있다. 로지의 실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로지를 만드는 손은 여러 차원에서 존재한다. ‘로지’라는 새로운 형태의 콘텐츠를 만들고 사회적 영향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했던 수많은 노동의 형태들은 미디어 생산의 지점을 어디에 둘 것인지, 또 미디어 생산에 대한 관심을 생산‘자’가 아니라 생산‘체계’에 두고, 사회적, 학술적, 정책적 담론을 확대할 필요는 없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로지’를 만들어낸 새로운 노동 형태는 미디어 생산에 대한 관심을 생산‘자’가 아니라 생산‘체계’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 사회적, 학술적, 정책적 담론을 확대할 필요는 없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사진출처: 셔터스톡)
연기자, 코미디언, 성우, 뮤지컬 배우, 연주자, 가수, 댄서, 모델, 공연예술가 등 전통적인 범주에서 대중문화예술인으로 규정되던 사람이 아닌 존재가 이들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고, 이 가상의 ‘존재’를 보장하기 위해 노동하는 수많은 비가시적인 손들이 있다. 하지만 로지가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 기술의 조합으로 탄생했다는 부분적인 사실은 ‘로지가 무엇인지’ 결정하는 수많은 노동을 가리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과 디지털 그래픽 기술의 발달은 로지보다 더 새로운 콘텐츠나 플랫폼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이를 소비하는 방식도 다변화하고 있다. 이 같은 새로운 생산과 소비의 체계는 로지 하나의 사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상아이돌, 버튜버(버츄얼 유튜버) 등 새로운 형태의 한류 콘텐츠로 확장되고 있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환상을 걷어내고 ‘누가, 혹은 무엇이 이들을 만들고 있는지’ 질문함으로써, 새로운 미디어 생태계 안에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생산체계의 양식과 과정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지금의 한류가 그리는 오늘과 내일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과제일 것이다.
* 이 글은 저자의 논문 <가상인간을 생산하는 몸, 노동, 미디어: 가상인간 ‘로지’ 사례를 중심으로>의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한 것입니다.
참고문헌
이광석 (2022). 『피지털 커먼즈』. 서울: 갈무리.
허영은 (2021. 1. 27). “싸이더스 스튜디오 X가 선보인 국내 첫 버추얼 인플루언서 로지”. 《디자인프레스》https://blog.naver.com/designpress2016/222222011138
Manovich, L. (2011). Trending: The promises and the challenges of big social data. Debates in the Digital Humanities, 2(1). pp. 460~4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