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호] ZOOM 2 | 사극의 리얼리즘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 AI 시대의 '설득 가능한 역사'
웹진<한류NOW>
작성자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게시일 2026.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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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 진짜 촬영했을까?” 요즘 사극을 보다 보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의 도입으로, 사극은 더 이상 과거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장르에 머물지 않는다. 대신 시청자가 ‘그럴듯하다’고 느끼는 역사, 즉 설득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AI 기반 VFX와 군중 확장 기술은 대규모 전투 장면과 공간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며, 사극의 스케일을 다시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통 의상과 세트의 데이터화는 사극을 일회성 제작물이 아닌 축적되는 문화 자산으로 바꾸고 있다. 여기에 AI 기반 더빙과 현지화 기술은 사극의 리얼리즘을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확장한다. 이 글은 AI가 사극을 바꾼 것이 아니라, 사극이 AI를 통해 전통을 더 생생하게 되살리고 있음을 말한다.
 
1. 사극은 왜 AI를 필요로 하게 되었을까
사극은 오랫동안 영상 제작 환경에서 가장 어려운 장르로 여겨져 왔다. 대규모 세트와 군중 장면, 전통 복식과 소품, 까다로운 시대 고증은 언제나 제작비와 시간을 압박했다. 현대극이나 장르물이 반복 가능한 공간과 설정으로 효율을 높여온 반면, 사극은 매 작품마다 처음부터 세계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은 사극을 가장 보수적인 장르처럼 보이게 했지만, 동시에 기술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장르로도 만들었다.

여기에 K-드라마의 글로벌 확산이라는 환경 변화가 더해졌다. 글로벌 OTT를 통해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되면서, 사극은 국내 시청자를 넘어 글로벌 관객을 겨냥한 장르로 확장되었다. 이제 사극은 전 세계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국의 역사와 정체성을 설득해야 하는 콘텐츠가 되었고, 이는 더 높은 완성도와 스케일을 요구하는 동시에 기존 제작 방식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동반했다.

이 지점에서 인공지능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 되었다. AI 기반 배경 합성, 군중 확장, 디지털 클린업 기술은 사극 제작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던 부담을 구조적으로 완화한다. 최근 사극과 시대극에서는 대규모 전투 장면이나 왕궁 행렬, 도시 전경 등을 AI·VFX 기반으로 구현함으로써, 과거에는 물리적·비용적 제약으로 제작이 어려웠던 장면들을 실제 제작 가능한 범위로 전환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제작비 절감을 넘어, 이전에는 포기하거나 축소할 수밖에 없었던 서사적 스케일의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

중요한 점은 AI가 사극을 '쉽게' 만든 것이 아니라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리적 재현의 한계로 단순화되던 공간과 장면들은 이제 '얼마나 설득력 있게 구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전환된다. 여기서 AI 기반 실시간 렌더링 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딥러닝과 GPU 가속을 결합한 실시간 렌더링은 조명, 반사, 질감 효과를 즉각적으로 시각화해 제작 과정에서 빠른 피드백과 수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 결과 사극의 리얼리즘은 완성 이후에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제작 과정 안에서 반복적으로 ‘설득 가능성’를 점검하며 형성된다. 설득 가능한 역사는 이렇게 기술적 효율이 아니라 의사결정 속도의 변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극의 정체성 자체를 바꾸고 있다. 사극은 더 이상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는 장르가 아니라, 과거의 서사와 상징을 오늘의 감각과 기술, 그리고 글로벌 시청자의 시선 속에서 재구성하는 장르로 진화하고 있다. 가장 전통적인 장르가 AI를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전투를 ‘재현’하지 않고, 전쟁을 ‘경험하게’ 만들다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은 사극에서 AI 기반 디지털 제작 기술이 리얼리즘의 기준을 어떻게 이동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귀주대첩을 비롯한 대규모 전투 장면은 수만 명 규모의 군중과 광범위한 전장을 AI·VFX로 구현했다. 이는 전통적인 엑스트라 동원과 세트 촬영 방식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이 장면의 핵심은 단순히 CG를 덧붙이는 수준에 있지 않았다. 실제 촬영된 소수의 병력, 말, 무기 동작을 토대로 이를 디지털 군중으로 확장하고 반복·변주하는 제작 방식이 활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AI 기반 영상 처리 기술은 반복적이고 노동집약적인 후반 작업을 자동화·가속하며, 대규모 장면을 제작 현실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특히 AI 기반 로토스코핑*, 객체 트래킹**, 클린업 자동화*** 기술은 인물과 말, 무기와 배경을 프레임 단위로 분리·추적하던 작업을 자동화함으로써, 대규모 전투 장면을 일정과 예산 범위 내에서 구현할 수 있는 핵심 조건이 되었다. 다시 말해 AI는 무엇을 그릴지를 정하는 기술이 아니라, 무엇을 실제로 만들 수 있는지의 범위를 넓혀주는 제작 인프라로 작동했다.
*실사 영상의 인물이나 객체 윤곽을 AI가 자동으로 추적·마스크 생성해 배경에서 분리하는 VFX 기술
**AI가 영상 내 움직이는 객체(캐릭터·소품 등)를 프레임마다 자동 추적해 위치·형태 변화를 실시간 기록하는 후반작업 도구
***AI가 손그림 러프의 잔선·얼룩·불균일 색상을 분석·제거해 깨끗하고 일관된 최종 선화·배경을 자동 생성하는 기술


<고려거란전쟁>에서 VFX 기술로 구현한 대규모 전투신
(출처: 《뉴시스》)
 
 
시청자 반응은 이를 잘 보여준다. 많은 시청자가 이 장면을 “CG 티가 난다”라고 보기보다, “전투의 스케일이 살아 있다”, “현장이 느껴진다”라고 평가했다. 이는 이 장면이 정확한 전투 재현보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주는 감각을 설득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병사 개개인의 얼굴보다 병력의 밀도와 움직임, 먼지와 연기, 말발굽 소리와 시야의 혼란이 하나의 흐름으로 조직되면서, 관객은 전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겪는 것’에 가깝게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제작 논리는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에서도 확인된다. <킹덤> 역시 조선 시대라는 역사적 배경 위에서 대규모 군중과 혼란의 상황을 디지털 기술로 구현했다. 실제 촬영된 장면을 기반으로 디지털 군중과 공간을 확장하고, AI 기반 후반 작업을 통해 집단의 움직임과 밀도가 만들어내는 위협감과 긴장감을 더욱 강화했다.

해외 사극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나타난다. 《HBO》의 은 고대 로마 도시와 군단, 민중 집회의 규모를 설득하기 위해 실사 촬영과 디지털 확장을 결합했다. 제작진은 개별 요소의 정밀한 재현보다, 제국의 규모와 사회적 밀도를 관객이 체감하도록 만드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사례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오늘날 사극과 시대극에서 AI와 디지털 기술은 눈에 띄는 효과가 아니라, 사극 속 세계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제작 인프라가 되고 있다. 그 결과, 사극의 리얼리즘은 고증의 총합이 아니라 경험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구성했는가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

 
3. <문무> 프로젝트가 보여주는 사극의 미래형 제작 방식
2025년 《KBS》가 추진 중인 ‘사극 자산 디지털 아카이빙’ 사업과 차기 대하사극 <문무> 프로젝트는, 이러한 변화를 제작 구조 차원에서 제도화하려는 시도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CG나 AI 기술을 더 많이 사용하는 데 있지 않다. 근본적으로는, 사극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데이터 자산'으로 전환하는 제작 패러다임의 변화에 있다.
 
《KBS》 ‘사극 자산 디지털 아카이빙’시스템을 도입한 대하사극 <문무>
(출처: 《bnt》)
 

주목할 점은, 이 변화가 사극의 전통성을 약화하기보다 오히려 강화할 가능성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물리적 제작 환경에서는 비용과 시간의 제약으로 생략되던 문양의 미세한 차이, 의복의 질감, 공간 배치의 역사적 맥락 같은 디테일이 디지털 자산으로 전환되면 더 안정적으로 보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비싸서 못 했던 고증"이 데이터로 남아 지속가능한 고증으로 전환된다.
 
 
4. 전통을 데이터로 만들 때 생기는 새로운 질문들
물론 질문은 남는다. 전통을 데이터로 만들면, 그 전통은 살아 있는가? 아니면 박제되는가?

전통이 디지털 자산이 되는 순간, 그것은 손으로 만들고 몸으로 입으며 경험되던 물성을 넘어, 저장되고 호출되는 정보로 전환된다. 이 변화는 분명 효율과 편의를 가져오지만, 동시에 불안을 동반한다. 전통이 이렇게 관리 가능한 대상이 되는 순간, 생명력을 잃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전통의 생명력은 데이터화 그 자체에 달려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기준과 관점으로 그 데이터를 설계하고 선택하는가다. AI는 판단하지 않는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생략할지 결정하는 주체는 여전히 인간이다. 전통을 단순화할 수도, 오히려 더 정교하게 확장할 수도 있는 가능성은 모두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지점에서 AI는 전통의 대체자가 아니다. 오히려 AI는 전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예컨대 ‘생성적 적대 신경망(GAN, 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과 같은 AI 기술 기반 얼굴 변환이나 실시간 표정 재연 기술은 표현의 범위를 확장하는 동시에, 동의(consent)와 진정성(authenticity), 재현(representation)의 경계를 둘러싼 윤리적 질문을 드러낸다. 기술은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결과로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AI는 윤리의 주체가 아니라, 윤리를 시험하는 도구다. 사극은 그 시험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르이기도 하다. 역사와 전통은 언제나 다시 해석되어 왔고, 사극은 그 해석이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공간이었다. AI 시대의 사극은 전통을 다루는 책임이 여전히 우리에게 있음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5. 글로벌 OTT와 AI, 그리고 ‘번역되는 리얼리즘’
사극이 다시 주목받는 또 하나의 배경은 글로벌 OTT 환경이다. 이제 사극은 국내 방송 편성표 안에 머무는 장르가 아니라, 공개와 동시에 전 세계 시청자와 만나는 콘텐츠가 되었다. 이는 하나의 질문을 제기한다.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코드가 밀집된 사극이 과연 다른 언어권에서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AI 기반 더빙과 현지화 기술은 단순한 번역 도구를 넘어선다. 사극은 대사와 호칭, 말투에 세계관과 권력 구조가 담긴 장르다. 따라서 리얼리즘은 이미지의 사실성뿐 아니라, 언어의 리듬과 관계 표현 방식에서도 함께 작동한다. AI 보조 현지화 기술은 이러한 언어적 리얼리즘을 다른 언어 환경에서도 유지하도록 돕는다.

그 결과 사극의 리얼리즘은 더 이상 화면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는 순간에도 유지되어야 할 설득력, 즉 '번역 가능한 리얼리즘'이 새로운 기준으로 등장하고 있다. AI는 이 기준을 구현하는 기술적 조건이자, 사극을 글로벌 서사로 확장하는 핵심 인프라가 되고 있다.

 
6. ’맺으며: AI는 역사를 다시 쓰지 않는다
AI는 역사를 다시 쓰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느끼는지를 바꾼다. 사극은 이 변화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르다. AI는 사극의 스케일을 확장하고, 전통을 데이터로 축적하며, 리얼리즘을 국경 너머로 ‘번역’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사극은 더 이상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는 장르가 아니라, 과거의 서사를 오늘의 감각과 미디어 환경 속에서 재설계하는 장르로 전환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전통이 고정될 때가 아니라 다시 해석될 때 생명력을 갖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극을 보며 느끼는 자연스러움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사극의 리얼리즘이 이미 물리적 재현에서 인지적 설득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AI는 역사를 대체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가 오늘과 연결되는 방식을 조용히 바꾸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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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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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승 (2025.12.1.) KBS 대하사극 ‘문무’, 디지털 아카이빙 시스템 도입. 《bnt》. URL: https://www.bntnews.co.kr/article/view/bnt202512010075#google_vigne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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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발행인 박창식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기획·편집 이현지, 김정현
디자인 7의감각
발행일 2026년 1월 23일
E-ISSN 2714-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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