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호] FOCUS 1 | 좋아하면 떠드는
웹진<한류NOW>
작성자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게시일 2026.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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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정년이〉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목포 소녀 윤정년이 여성국극 배우에 도전하는 이야기이다. 여성국극이라는 낯선 소재, 대중매체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50년대라는 시대 배경이 웹툰으로 만들기(또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다. 그러나 <정년이>는 탄탄한 서사와 매력적인 인물들을 바탕으로 큰 사랑을 받으며 연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이후 단행본과 창극, 드라마로 만들어져 대중적 관심을 받기도 했다. 어떻게 여성국극을 웹툰으로 만들었을까? 어떻게 웹툰이 여성국극을 담을 수 있었을까? 〈정년이〉를 통해 사라진 무대를 다시 불러낸 서이레 작가의 창작 여정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마이크를 꼭 쥔 구순의 여성국극 배우처럼
작년 4월 다큐멘터리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라질 듯 영원하다〉 GV(Guest Visit)에 초대받았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영화관으로 향하며 질문지를 다시 검토하는데 영 쉽지 않았다. 이미 마음이 콩밭에 있었다. 이날 게스트로 조영숙 선생님이 함께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성국극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라질 듯 영원하다〉 포스터(위)와 여성국극 1세대 배우 ‘조영숙’(아래)
(출처: 네이버 영화, 《서울신문》)
 
 
1940년부터 50년까지 한국 대중을 사로잡은 엔터테인먼트는 여성국극이었다. 여성국극이란 춘향이와 향단이는 물론, 이몽룡과 방자까지 여성이 모든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창극이다. 어찌나 인기가 많았던지 여성국극 표를 구하러 사람이 몰려들자, 기마경찰이 출동해 해산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조영숙 선생님은 여성국극 1세대 배우로 극에서 감초가 되는, 일명 ‘쌈마이’역의 대가다. 구순이 넘은 선생님은 지팡이 없이는 걷기 힘들 정도로 허리가 굽으셨다. 그런 선생님이 무대에 서서 방자 연기를 펼치시면 손짓 하나 눈빛 한 번에 속수무책으로 웃고 울게 된다. 어느 젊은 창자보다 우렁찬 발성과 정확한 발음, 언제 굽었나 싶게 꼿꼿이 편 허리를 보면 선생님은 무대 위에서 언제까지고 살아계실 것만 같다. GV를 마치고 선생님과 사담 몇 마디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사진도 찍을 수 있을지 모른다. 마음속으로 그런 사적인 팬심을 떨치느라 혼이 났다.

마침내 GV가 시작됐다. 사회자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선생님은 마이크를 잡고 여성국극에 대한 애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유수연 감독님에 대한 감사와 드라마 〈정년이〉를 본 감상, 여성국극의 왕자 임춘앵 선생님에 대한 기억, 제자를 향한 사랑, 영화관을 찾아준 관객들에게 여성국극 한 대목 보여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미안함… 선생님은 쉴 새 없이 여성국극에 대해 말씀하셨다. 진행을 위해 사회자가 나서야 했다. 선생님은 조금 머쓱해하며 마이크를 내려놓으셨다. 순간 나는 선생님과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그 모습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말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느 (선생님께 결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오타쿠와 다르지 않았다.
 
2. 사라진 무대를 웹툰으로, 좋아하면 떠들어야 하니까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왜 그렇게 떠들고 싶을까? 좋아하는 아이돌, 좋아하는 만화, 좋아하는 캐릭터, 좋아하는 연예인, 좋아하는 연극… 한창 만화를 좋아하던 10대 시절엔 밤을 새워서 친구들과 채팅했고 아이돌을 좋아할 때는 팬들과 방을 빌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뮤비를 보았다. 떠들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나와 비슷한 사람일수록 좋다. ‘쿵짝이 잘 맞는’ 친구 한 명만 있어도 행복하게 좋아할 수 있다.


서이레 웹툰스토리작가의 <정년이>
(출처: 네이버 웹툰)
 
 
여성국극을 알게 된 날부터 나는 사람만 붙잡으면 여성국극에 대해 떠들어댔다. 배우들, 팬들, 여성국극의 인기, 연기, 의상, 국극 내용… 지친 친구들은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같이 여성국극에 대해 떠들 사람이 필요했다. 기왕이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래서 웹툰을 만들기로 했다. 웹툰으로 만들면 나도, 독자들도 여성국극에 대해 떠들게 될 테니까.
3. 1950년대 목포, 카페 커피 한 잔의 가격을 찾아서
‘어떻게 여성국극을 웹툰으로 만들 생각을 하셨어요?’ 이 질문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먼저 어떻게 ‘여성국극’을 웹툰으로 만들었냐는 의미다. 여성국극은 고사하고 창극을 본 사람도 손에 꼽는다. 시대 배경은 1950년대다. 창작자들이 흔히 선택하지 않는 시대다.

솔직히 나도 아차 싶었다. ‘좋아서 떠들고 싶은 마음’만으로 창작하기에는 까다로운 소재라는 걸 본격적인 창작에 들어가서 깨달았다. 여성국극은 소리, 춤, 연기 모든 분야에서 최고인 여성 예인이 선 무대다. 여성국극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작가도 소리, 춤, 연기를 공부해야 했다. 1950년대를 그리기 위해 사진 자료를 모으고, 당시 분위기를 묘사하려면 유행하는 노래나 옷차림, 간식 같은 사회문화를 알아야 했다. 의외로 골머리를 앓았던 부분은 메뉴판이었다. 작중 주인공 윤정년이 카페에 가는 장면이 있다. 커피 가격을 묻고 답해야 하는데 얼마인지 도통 감이 안 왔다. 이게 뭐라고 하루 종일 50년대 신문잡지만 뒤졌다.

여성국극 자료를 찾기는 더 힘들었다. 당시 올린 여성국극 대본을 최대한 많이 수집하고 싶었지만 많은 책이 절판되어 중고 서적을 구하거나 소장한 도서관을 찾아가야 했다. 90년대에 올린 여성국극 대본 몇 권은 엉뚱하게 한 지방 국립대 도서관에 있었다. 대전에서 서울까지 몇 다리를 건너 간신히 대본을 구했다.

사람 마음이 한정판이라고 하면 괜히 더 신경 쓰인다. 자료 찾기가 어려우니 집착은 커져만 갔다. 여성국극으로 오래 작업한 정은영 선생님을 찾아가 자료를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선생님은 자료 대신 메일을 한 통 보냈다. 비어있는 부분을 상상력으로 메우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엔 어린 마음에 아쉬움이 컸다.
 
 
4. 고증과 상상력 사이: 완벽한 재현이 아닌, 현재와의 대화
어쩔 수 없이 자료 조사를 마무리하고 본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선생님 말씀이 백번 맞았다. 내가 어떻게 40~50년대 여성국극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겠는가? 현대 웹툰 독자 중 완벽히 재현한 여성국극을 보길 원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있겠는가?

여성국극 〈백호와 여장부〉는 말갈국 공주와 신라 장군 백호가 나온다. 공주는 여성의 몸으로 무기를 다루며 전장을 누비는 여장부다. 그런 공주가 백호를 사랑하는 자신을 깨닫자 별안간 ‘여자’가 된다. ‘여자’가 된 공주는 자신이 매일 쓰던 무기도 무거워 들지 못한다.

공주 : (받드니) 아, 나의 쌍검이 왜 이리 무거워졌을가.
백호 : 핫핫핫. 여자에게 검이란 무거운 법이요. 공주 이제야 이젓든 것을 완전히 찾었오이다, 그려.*


이 장면은 당시 대중에게 로맨틱한 장면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현대인에게는, 특히 웹툰 〈정년이〉가 타깃으로 삼는 독자층(10~30대 여성)에게는 낡은 고정관념을 재반복하는 장면으로 보일 수 있다. 〈정년이〉는 극중극을 등장인물 간 관계를 암시하거나 인물의 성장에 필요한 중요한 장치로 쓸 예정이었다. 결국 극중극 대부분을 직접 썼다. 고증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해친다면 과감히 변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내가 만드는 작품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소설이니까. 고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나니 작품 쓰기가 훨씬 재미있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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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재식, 김은식 (2002). 『여성국극왕자 임춘앵 전기』. p.334  
 
5. 웹툰이 담아낼 수 있는 것들
‘어떻게 여성국극을 웹툰으로 만들 생각을 하셨어요?’의 두 번째 의미는 어떻게 ‘웹툰’으로 만들었냐는 뜻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웹툰 말고 어떤 장르로 〈정년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드라마와 영화 같은 영상화 작업은 큰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다. 〈정년이〉는 시대극이고 극중극을 따로 연출해야 한다. 거기다 헤테로 로맨스(이성 간 로맨스)가 없고, 배우들은 판소리와 춤도 소화해야 한다. 웬만큼 성공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투자받기 어려운 프로젝트다. 소설은 웹툰보다 여성국극을 묘사하기 어렵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부분 창극을 관람한 경험이 적거나 없다. 여성국극을 글로만 읽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젠더 표현은 시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상대방의 생김새를 보고 이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한순간 판단한다. 웹툰은 여성국극 배우가 보이는 젠더 표현을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연기와 춤은 영상보다 전달력이 떨어질 수 있겠으나 그만큼 투자금이 덜 든다. 작가가 원하면 웹툰 회차에 배경음악을 넣을 수 있어, 중요한 극중극에는 극을 상상할 수 있도록 적절한 배경 음악을 제작해 삽입했다.

무엇보다 웹툰은 다양한 장르를 포괄한다. 통념상 웹툰 하면 인기 많은 학원물, 로맨스 판타지를 떠올린다. 포털 웹툰 플랫폼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 연재되는 작품은 일상물, 무협, SF, 드라마, 스포츠, 역사 등 다양한 장르가 있다. 노인, 퀴어, 어린이 등 주인공도 다양하다. 한국 웹툰의 강점은 이런 다양성과 포괄성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웹툰이 아닌 내 이야기를 상상하기 어렵다.

 
6. 프랑스 앙굴렘에서 만난 ‘준비된 독자들’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 웹툰의 성장에 한계를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년 프랑스 앙굴렘 국제 만화축제에 초대받았다. <웹툰 시대>라는 이름으로 여러 한국 웹툰을 전시하는데, 감사하게도 〈정년이〉가 메인을 맡았다. 나와 나몬 작가는 뉴스 인터뷰, 팬 사인회, 토크 테이블에 나갈 예정이었다.
 
‘프랑스 앙굴렘 국제 만화축제’에서 개최된 <웹툰 시대> 특별전 포스터(위)와 현장 사진(아래)
(출처: 한국만화영상진흥원, 《KBS》)
 
유럽 국가 중에서도 프랑스는 특히 만화 소비량이 많은 나라다. 축제 참관객 중에는 1년 동안 번 돈을 모두 만화책 구매에 탕진하고 돌아가는 만화광도 적지 않다. 이들이 주로 보는 작품은 웹툰보다 종이 만화다. 스크롤 연출보다 컷 연출이 익숙하고 손으로 넘기는 물성이 중요하다.

〈정년이〉는 국내에는 단행본이 있지만 해외에 번역된 적은 없다. 해외 웹툰 플랫폼에도 마찬가지다. 〈정년이〉의 전시 참여는 드라마화 영향이 커 보였다. 세계적인 OTT 디즈니 플러스에서 여러 나라 언어로 제공 중이고,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은 김태리 배우가 주연이다 보니 드라마에 대한 관심을 웹툰으로 잇고자 하는 기획 같았다.

그래도 내심 아쉬웠다. 번역서가 나왔다면 웹툰을 직접 소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년이>가 번역이 어려운 작품이라고들 했다. 또, 주인공 윤정년은 전라도 방언 사용자로, 한국인에게도 낯선 시대 배경과 국극이라는 전통문화가 해외 독자에게 얼마나 매력적일지도 여전히 걱정이었다.

뜻밖에도 현지 반응은 달랐다. 앙굴렘에서 웹툰을 공부하는 한 학생은 만화 〈아카네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아카네 이야기〉는 주인공이 일본 전통 만담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한 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재로 삼았음에도 일본 외 많은 나라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학생은 여성국극과 1950년대라는 작품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 학생은 어쩔 수 없이 불법 번역 사이트에서 〈정년이〉를 보아야 했다.

비슷한 시기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열어보니 어색한 번역체 한국어와 (아마도 이 한국어 편지의 원문일) 중국어가 빼곡했다. 중국인 팬이 보낸 편지였다. 이 팬은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웹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정년이〉 단행본을 구매해 번역 앱으로 일일이 작품을 번역해 다 읽었다고 썼다. 10권짜리 만화책을 전부 핸드폰으로 번역해 보기란 얼마나 수고스러운 일인가. ‘한국적인’ 소재, ‘한국적인’ 역사에는 그런 수고를 감수할 만한 힘이 있다. 우리가 망설이고 있을 때 해외 독자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7. 다시, 좋아하는 것을 향해
결과적으로 여성국극에 대해 떠드는 사람이 늘었으면 좋겠다는 내 소망은 이루어졌다. 드라마의 힘은 강력했다. 여러 교양 프로그램과 예능에서 여성국극 배우를 모시고 여성국극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특강 요청도 많이 받았다. 작년 한 해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성국극에 대해 떠들었다. 작가로서 즐거운 경험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나는 좋아하는 것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요즘은 어우동이 좋다. 성종 때 간통으로 사형당한 바로 그 어우동 맞다. 이장호 감독의 영화 〈어우동〉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어우동은 조선시대 관능적 이미지의 상징이자 기생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어우동은 양반가의 딸이었다. 바람이 난 남편이 어우동에게 누명을 씌워 이혼하려 하고, 친정은 소박맞은 딸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계집종과 둘이 살았다. 추문이 붙었으니 조용히 살아갈 법도 한데 어우동은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 시와 그림, 서예, 가야금 등 예술 전반에 재능이 있었던 어우동은 남편과 아버지의 집에서 나와 한 명의 예술인으로 자리매김한다.

어우동은 풍기 문란, 특히 왕족들과 간통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사형된다. 사형 당시 어우동은 40대였다. 주로 20대로 그려지는 어우동의 이미지와는 또 다르다. 기록을 살피며 나는 어우동에게서 나와 내 친구들을 본다. 정상 규범에서 벗어나 손가락질받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았던 ‘이상한’ 사람. 그런 사람이 좋다. 좋으면 별수 없다. 떠들어야 한다. 마이크를 꼭 쥔 한 여성국극 배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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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반재식, 김은식 (2002). 『여성국극왕자 임춘앵 전기』. 서울: 백중당.
 

 
 
 
 
 

발행처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발행인 박창식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기획·편집 이현지, 김정현
디자인 7의감각
발행일 2026년 1월 23일
E-ISSN 2714-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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