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을 다시 부르다

문학산 역사공원화 운동

인천의 발상지, 문학산을 다시 부르다
2005 ~ 2006 문학산 역사공원화 운동의 기록
 
문학산 정상
출처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공공누리(https://www.kogl.or.kr/recommend/recommendDivView.do?oc=&recommendIdx=177634&division=img)]

문학산은 ‘인천의 발상지’로 불리는 산이에요. 하지만 2005년 당시 이 산의 정상은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시민이 올라갈 수 없었고, 산자락은 고속도로와 터널, 경기장 공사로 곳곳이 훼손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는 이 산을 ‘역사공원’으로 가꾸자는 운동을 벌였어요. 학계에 묻고, 시민에게 묻고, 시에 건의하기까지 — 그 과정을 우리가 남긴 기록으로 되짚어 봅니다.

2005. 6
학술 심포지엄
2005. 11
시민공청회·설명회
2006. 1
시장에게 건의서 전달
2015. 10
정상 개방

왜 ‘인천의 발상지’일까

‘발상지’는 무언가가 처음 시작된 곳을 말해요. 문학산이 인천이 시작된 곳으로 불리는 까닭을, 우리가 심포지엄과 설명회 자료집, 건의서에 정리해 둔 내용으로 모아 보면 크게 세 가지예요.

1
인천의 옛 이름, 미추홀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소성현은 본래 고구려 매소홀현이다. … 지금은 인주이다(… 매소는 미추라고도 쓴다)”라는 기록이 있어요. 여기서 인주는 지금의 인천이에요. 그래서 인천은 고구려 때 매소홀 또는 미추홀로 불렸다고 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를 세운 온조의 형 비류가 바로 이 미추홀에 자리를 잡았다고 나와요.
(출처:「학술심포지엄 자료집」 18쪽 ·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
2
비류와 이어져 온 문학산성
인천 안에서도 비류의 중심지로 주목받아 온 곳이 문학산 일대예요. 조선 초 『세종실록』 지리지부터 문학산성을 비류와 관련된 유적으로 꼽았고, 이후 『동사강목』·『여지도서』·『경기읍지』도 이 산성을 ‘비류성’으로 여겼어요. 산 주변에는 비류가 미추홀을 세운 뒤 쓰던 우물이라 전하는 ‘백제우물’도 있고, 『인천읍지』에는 문학산에 미추홀왕릉이 있다고 적혀 있어요.
3
오랫동안 인천 고을의 중심
이 일대는 고구려의 매소홀현, 신라의 소성현, 고려의 경원군·인주·경원부를 거쳐 조선의 인천도호부에 이르기까지 인천의 행정·문화·생활의 중심지였어요. 우리는 건의서에서 이 일대의 지정문화재로 인천도호부 청사(시 유형문화재 제1호), 인천향교(시 유형문화재 제11호), 문학산성(시 기념물 제1호) 등을 꼽았어요.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의 중심이 옮겨 가면서, 이 일대는 점차 도시의 변두리가 됐습니다.

다만 문학산에서 미추홀을 직접 증명하는 유적이 발굴된 것은 아니에요. 우리도 설명회 자료집에서 『인천읍지』의 미추홀왕릉 기록을 소개하며 “이를 확증할 발굴자료가 없어 앞으로 구체적인 고고학적 연구를 통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적었어요. 이 숙제는 아래 심포지엄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건의서에는 여기에 더해, 임진왜란 때 인천부사 김민선이 문학산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친 곳이라는 점도 문학산의 중요한 역사로 함께 담았어요.

정상에 오를 수 없던 산 (2005)

그렇다면 당시 문학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해 11월 우리가 연 시민공청회에서, 조우 교수는 ‘문학산 자연환경 보전 방안’을 발표하며 당시의 문학산을 이렇게 전했어요.

“해방후 군부대가 주둔하여 산 정상을 기지로 사용하면서 각종 유적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시민들은 정상부 출입을 할 수 없어 이용에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

‘인천의 발상지’로 불리는 산인데, 정작 시민은 그 정상에 오를 수 없었던 거예요. 우리는 2004년 12월 ‘문학산역사공원 만들기 추진위원회’를 꾸렸고, 2005년 5월에는 남구청과 남구의제21의 공동 주최로 문학산 포럼이 두 차례 열렸어요.

(출처:「인천사랑운동 연혁」 · 「문학산 역사공원 설명회 자료집」 9쪽)

학계에 묻다 (2005. 6)

2005년 6월 22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실에서 ‘백제건국기의 인천’을 주제로 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백제사 관련 연구자 10명을 초청해 기조강연과 주제발표, 토론을 맡겼고,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5시간에 걸쳐 진행됐어요.

심포지엄을 마친 뒤, 우리는 결과보고서에 종합의견을 세 가지로 정리했어요.

하나. 비류가 개국한 미추홀은 인천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둘. 백제 관련 유물의 출토 빈도가 가장 높은 문학산 일대를 발굴·조사해야 한다.
셋. 백제 유물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행정적인 보호 조치가 필요하다.

보고서에는 그동안 이 문제에 다른 의견이 있었던 까닭도 함께 적어 두었어요. 문헌 기록을 뒷받침할 유적과 유물이 충분히 발굴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토론에서도 서울역사박물관 김기섭 전문위원이 “인천지역에서는 아직 정치체의 성립·유지를 입증할 만한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신중한 의견을 냈고, 다음 날 인천일보는 ‘문학산 일대 발굴유적 보호를’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고고학적 연구 백지상태…학술 조사 시급’이라고 전했습니다.

결국 심포지엄이 남긴 숙제는 문학산을 제대로 조사하고, 더 훼손되지 않게 지키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음 계획으로 시민 공청회 개최, 시민단체 중심의 서명운동, 시에 대한 건의를 보고서에 적어 두었어요. 공청회는 계획(9월경)보다 늦은 11월에 열렸고, 이듬해 1월 건의서가 시장에게 전달됩니다.

(출처:「문학산 학술심포지엄 결과보고서」 3·5·8쪽 · 「인천일보」 2005. 6. 23. 17면)

시민에게 묻고, 알리다 (2005. 10~11)

10월 12일 공동대표 회의에서 역사공원화 사업과 공청회 추진을 논의했고, 14일에는 공청회 추진위원회를 꾸렸어요. 이어 500개 단체에 의견 수렴안을 보내 25일에 답을 거둬들였습니다. 같은 25일에는 안상수 인천시장을 만나 사업에 대한 시의 협조를 당부했고, 이튿날인 26일에는 우리가 마련한 역사공원화 방안이 신문에 보도됐어요.

(출처:「문학산 역사공원사업」 1·6쪽 · 「문학산 역사공원 설명회 자료집」 9쪽 · 「경기일보」 2005. 11. 17. · 「서울경제」 2005. 10. 26.)

그리고 11월 18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실에서 시민공청회가 열렸습니다. 가톨릭환경연대, 시립인천학연구원, 인천향토문화사학회, 인천시립박물관, 함께그린 남구의제21이 주관을 맡았고, 세 사람이 주제 발표를 했어요.

역사유적
김성태 (기전문화재연구원)
발굴조사가 시급한 유적지 10곳을 추려 제시하고, 문학산 일대에서 공사 전 지표조사를 의무로 하는 제도를 명문화하자고 주장
지표조사: 땅을 파지 않고 땅 위에 드러난 유물과 지형을 살펴 유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조사
기념관·조형물
이현식 (인천문화재단)
관문도시 인천에 걸맞은 ‘문(門)’ 조형물을 세우자고 제안하고, 조형물과 사료관을 시민 참여로 만들어 가자고 강조
자연환경
조우 (상지대)
수도권 도시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피나무 군집을 철저히 보호하고, 등산로 복원을 위해 샛길 등산로를 막자고 제안
(출처:「문학산 시민공청회 자료집」 1·10·31·43·65·66쪽)

닷새 뒤인 11월 23일에는 인천로얄호텔 영빈관에서 설명회를 열어, 공청회 경과와 역사공원화 추진 사업을 보고했습니다.

시에 건의하다 (2006. 1)

2006년 1월 18일, 우리는 ‘인천의 발상지 문학산 역사공원화 추진 건의서’를 안상수 인천시장에게 전달합니다. 건의 사항은 세 가지였어요.

1. 인천의 발상지 문학산을 역사공원으로 지정해, 인천의 역사적 정체성을 바로잡는다.
2. 문학산 역사공원화 사업이 빨리 추진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한다.
3. 시민의 관심과 참여, 지혜를 모으는 범시민적 사업이 되도록 한다.
(출처:「문학산 역사공원 추진 건의서(2006. 1. 18)」 2쪽)

우리 아카이브에 남아 있는 건의서 자료에는 ‘문학산 역사공원화 서명 현황’도 함께 들어 있어요. 기관단체장부터 경제·교육·여성·언론·종교·문화예술·향토사학계, 시민단체까지 모두 125명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문학산 역사공원화 서명 현황 (총 125명)
시민단체
53명
교육계
18명
기관단체장
10명
문화예술계
10명
경제계
9명
종교계
8명
여성계
7명
언론계
6명
향토사학계
4명
기관단체장: 국회의원, 구청장, 구의회 의원 등  (출처:「문학산 역사공원 추진 건의서」 19~21쪽)

우리가 건의서에 그린 역사공원은 문학산 전체를 공원으로 지정하고, 그 안을 세 구역으로 나눠 가꾸는 모습이었어요.

문화유적지
유적 조사·발굴과 복원, 사적지 표지석, 조형물과 역사교육관
수림녹지 생태공원
피나무 군집 보존, 계곡 습지 복원, 생태관찰로
생활체육시설 공원
쉼터와 관망대, 등산로 복원, 생활체육 공간

건의서의 구체 계획에는 우리가 복원하자고 제안한 곳들도 담았어요. 이 목록을 보면 문학산에 무엇이 있었고, 무엇이 사라졌는지가 함께 보입니다.

삼호현 백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전 마지막 작별을 나누던 옛 고개
고인돌 훼손되고 사라져 3기만 남았는데, 그마저 제자리를 잃고 방치된 선사 유적
안관당 김민선 부사를 기려 인천 부민들이 200여 년간 제를 올렸지만, 근대에 들어 끊긴 사당
학산서원 1708년 완성돼 인천의 인재를 기른 서원. 문학터널 공사로 터의 자취마저 사라짐
문학산성 복원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언젠가는 인천시민의 품으로 되돌아 와야 할” 곳이라며, 장기적인 복원 준비를 제안

그리고 10년 뒤 (2015)

문학산 정상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닫혀 있었어요. 우리가 모아 둔 2015년의 신문 기사들을 보면, 정상이 열리기까지의 마지막 몇 달이 보여요. 6월 29일에는 인천시가 군 당국과 정상부 개방을 협의하고 있다는 기사가, 7월 31일에는 시와 국방부가 개방에 합의해 10월에 정상을 연다는 기사가 신문 1면에 실렸어요.

(출처:「연합뉴스」 2015. 6. 29. · 「경인일보」 2015. 7. 31. 1면)

그리고 2015년 10월 15일, 제51회 인천시민의 날에 문학산 정상부가 시민에게 열렸습니다. 이때 먼저 열린 곳은 정상부의 일부였고, 나머지 구역은 이듬해 상반기까지 추가로 열 계획이었어요. 그날 아침 동아일보는 ‘문학산 정상, 50년만에 시민품으로’라는 제목으로, 시민 700여 명이 정상까지 걸어 오르는 길놀이와 ‘문학산 정상 개방 고유제’ 등 이날의 행사 계획을 전했어요. 고유제(告由祭)는 중요한 일을 조상에게 알리는 제례예요.

(출처:「동아일보」 2015. 10. 15. · 「오마이뉴스」 2015. 10. 16.)
문학산 정상 개방 고유제 포스터 (2015)

문학산 정상 개방을 우리 운동 하나의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개방은 인천시와 군 당국의 협의로 추진됐으며, 지역 시민단체들 역시 개방이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남긴 2005년의 기록들은, 정상에 오를 수 없던 문학산을 ‘인천의 발상지’로 다시 불러내려던 시민들의 목소리가 그때 분명히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출처:「연합뉴스」 2015. 6. 29.)

학계에 묻고, 시민에게 묻고, 시에 건의하기까지, 우리가 함께한 문학산 역사공원화 운동은 자료집과 회의자료, 사진과 125명의 서명으로 남았습니다. 오늘 문학산 정상에 오르는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