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루(矗石樓)는 해동 제일루(海東第一樓)라고 일러온다. 촉석루는 “진주라 천릿길…”의 노래로 또는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전설로 이름난 누각이다. 고읍 진지에 들르는 길손이며 으레 남강가 드높이 솟은 촉석루를 찾고 창연한 고색과 웅장한 조형미에 여독을 잊게 된다. 뜻 있는 길손이라면 그 누각에 올라 아득히 남강을 굽어보는 옛 촉석성(矗石城) 산마루턱에 자리잡은 누와 자연과의 혼연한 배치에 경탄을 아끼지 않는다. 자연은 누를 감싸고 누는 자연을 가꾸어 자연과 인위가 이룬 장엄한 조화에 어느덧 저도 모르게 얼려들게 되는 것이다.
6.25때, 촉석루는 전화를 입어 하루아침에 불타버렸다. 갖가지 녹슨 낭만과 함께 해동 제일루의 모습은 오유(烏有)로 돌아가 잿더미와 초석만이 허무로이 남았다. 그 고장 사람이나 진주를 찾는 이들이나 촉석루가 없는 남강가에서 허전함과 아쉬움을 가눌 길이 없었다.
촉석루-이 거룩한 인위(人爲)가 허구한 세월을 두고 요긴한 자연의 몫으로 화했던 것은 이로써 분명하다.
촉석루의 옛모습을 도로 찾자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정부가 이에 응하여 복구공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일을 맡을 도편수-흔히 ‘도대목’이라고도 하고 또는 ‘멋긋는 이’라고도 한다-가 문제다. 웅장하면서도 미련스럽지 않고, 우아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그 거창한 촉석루의 옛모습을 그대로 옮길 수 있는 도편수를 어디서 얻을 것이냐고 사방을 찾는다.
수원에 우거하는 임배근(林培根, 78세) 옹으로 결정을 보았다. 임옹은 서울태생이다. 어려서 선친을 따라 목수일을 ‘눈치껏’ 배웠다. 17,8세가 되어서는 벌써 솜씨가 뛰어나 당시 새로 조영하던 덕수궁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을 했다. 시내 파고다공원의 팔각정도 그 무렵 임옹 부자가 손수 지었다. 조선말 궁궐 조영에 몸소 일을 했던 목수로서 생존한 단 한 분이 임옹이다.
약 2년에 걸쳐 임옹의 심혈은 촉석루 재건을 위해 기울여졌다. 평생을 닦은 업의 집대성이라고도 할 공사는 지난 봄에 끝났다.
그후 진주를 찾을 양이면 누구나 남강가에 솟은 옛모습 그대로의 촉석루를 우러러보게 된다. 태고에 뿌리를 박은 듯한 아름드리 두리기둥이며, 금시에 날아갈 듯한 봉황의 깃인 양 종마루에서 부연(附椽)으로 흐르는 곡선의 아름다움-여기 남강 맑은 가람에 잠기고 또는 가없는 푸른 하늘에 솟구쳐, 지난날 촉석루의 그 예스런 멋까지를 그대로 옮겨놓지 않았는가!
촉석루 복원공사를 필역(畢役)한 임옹은 지금 시내 낙산마루 청룡사에서 조용히 법당 신축에 전념하고 있다.
희수(喜壽)를 지난 팔십 노장(老匠)은 그날도 먹통과 먹칼을 들고 아름드리 원목에 먹을 긋고 있었다.
다포(多包)집 귀살미의 복잡한 멋긋기에도 조금의 서슴이 없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처근한 솜씨가 물흐르듯 한다. 조로(早老)를 미덕으로 삼는 우리네 주변에서 돋보기도 끼지 않은 팔십의 현역을 바라는 눈길이 외경에 젖지 않을 수 없다.
시원한 산바람이 몰려오는 청룡사 높은 다락마루에서 옛일을 더듬는다.
덕수궁 역사를 맡은 오십 남짓한 참봉(參奉)이 점잖았다는 애기, 당시 도편수가 최백현(崔伯鉉)이라는 이인데 그 솜씨가 놀라웠다는 애기, 궁궐짓는 재목은 강원도 인제(麟蹄)에서 베어 물떼(水筏)를 짜서 한강으로 해서 용산에 올려 사람들이 하나하나 손으로 톱질을 했다는 애기, 뗏목으로 내려온 재목은 진이 빠져 쉬 썩지 않을뿐더러 나무에 변덕이 없어 다스리기 좋다는 애기, 목재는 인제에서 낸 수상목(水上木)이 제일 좋다는 애기…등 말솜씨는 박눌(朴訥) 그것이다.
애기는 계속된다. 촉석루의 4칸통(四間通) 5칸을 가로지를 대들보를 구하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 인제 산골에서 대들보감 젓나무를 얻었을때는 정말 반가웠다. 이제는 산에 나무가 없어 집짓기도 틀렸다. 요즘 사람은 옛난 집을 쓸모가 없다고 헐어버리고 서양식 집을 짓는다. 서양집은 미리 치수가 정해져 있다. 우리네는 나무를 보고 나무에 맞춰서 집을 짓는다. 그러니 우리네 집으로 자연의 뜻에 어긋나는 집이 있을 수 없다. 옛집에 남은 옛 멋을 지금 따를 수는 없다. 옛집이 헐려가는 것은 다정한 친구가 없어져가는 것과 같이 쓸쓸한 일이다….
회포는 그지없다. 말머리가 ‘일’에 미치자 옹의 말꼬리에는 묵직한 위엄이 괸다.
한말로 집이라고 하나 여염집을 비롯해서 불당(佛堂), 사당(祠堂), 묘사(廟祠)에 따라 격식이 다르다. 초가, 와가(瓦家), 청석(靑石)집 등으로 대별하나 집을 유별해서 팔작집, 맞배집, 우진각, 사모집, 다각집, 육모정, 팔모정 등 지붕의 형태로도 나누고, 공포(貢包)를 짜서 받친 ‘포집’ 가운데도 갖은포집, 주심포집, 초익공(初翼工)집, 이익공(二翼工)집, 이익공주삼포(二翼工柱三包)집, 무익공(無翼工)집, 민도리집, 납도리집, 굴도리집, 소로받침집, 소로수장집이 있으며, 이밖에 도리가 5개 얹힌 오량(五樑)집 또는 칠량(七樑)집, 단층(單層)집, 층(層)집,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白骨)집, 진채(眞彩)를 올린 단청집, 또는 날개집, 겹집, 정칸(正間)이 높이 된 고주(高柱)집도 있다. 종마루가 정(丁)자로 된 丁자집, ㄷ자집, ㄱ자집, ㅡ자집, 乙자집, 工자집으로 대별하기도 한다.
이 몸체들의 구조 외에 부속건물들은 몰론 서까래 하나의 치수에 이르기까지 “도편수 머리에는 집과 문, 누 등이 꽉 짜여 들어 있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옹은 “도편수의 솜씨도 중요하나 집이란 기초가 무엇보다도 튼튼하여야 한다. 옛날 집은 땅을 파서 모래를 넣고 물이 괴도록 다지고 그 위에 석회와 백토를 또 다져 처음으로 주초(柱礎)를 놓았다. 나라 살림이나 여염 살림이나 기초가 튼튼하여야 꼴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치라”고 타이르듯 한다.
촉석루 역사(役事)가 마음 깊이 있는 탓인지 “이승에 장(匠)새기로 태어나 그런 일을 한 번 하고 가기가 드문 일이라”고 적어 만족하며, “살날까지는 일을 하다가 그대로 가는 것이라”고, 길게 자란 희고 윤택한 턱수염을 늘어뜨린 불카한 동안이 담담하여 표정이 없다.
조선 고건축의 비기(秘技)를 지닌 채 성성히 천수를 다하려 하는 노도편수(老都片手)-임옹은 오랜 세월을 두고 인생의 무엇을 깨달았음인지, 그 앞에 앉았으면 그저 가없이 망양(茫洋)한 인품에 후줄근히 젖어드는 것을 느낀다.
옛 속담에 “도편수는 정승감이라야 된다”고 했다.
(1960년 8월 12일)
사진 1) 인간문화재 도편수 임배근
사진 2) 경남 진주 촉석루
사진 3) 촉석정충단비각과 진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