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록이 알고싶다
내 가족을 보호해 주시오 - 의학교수 박주병의 서한
김하정
게시일 2021.06.09  | 최종수정일 2021.06.17

 

 1926년 베이징협화의학교의 한국인 교수 박주병(朴柱秉)은 구(행정구역)에 가족 보호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냅니다.

 

관련당안

* 문서명 : 北京协和医学校教授韩国人朴柱秉关于请饬区保护家眷的函

베이징협화의학교 교수 한국인 박주병이 구에 명령해 가족 보호를 요청하는 서한

* 소장처 : 북경시당안관

* 당안번호 : J181-018-22010

* 생산일자 : 1926.01.01

* 종료일자 : 1926.01.01

가족의 보호를 요청했다는 건 아무래도 누군가로부터의 위협을 느꼈다는 의미일텐데요. 동시에 궁금한 건 당시 1926년 중국의 의대에 한국인 교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이징협화의학원(청화대학의학부) (출처: 百度百科)

 

 

베이징협화의학원(北京协和医学院, Peking Union Medical College) [링크] 은 중국국가위생건강위원회 직속 소관대학으로 중국 최고의 의괴대학 중 하나입니다. 1917년 설립되어 1919년 베이징협화의과대학으로 변경 후, 2006년 베이징협화의학원으로 명명하게 됩니다. 청화대학의학부이기도 합니다

 

한편, 1926521일자 동아일보 신문에는 二十五歲博士(이십오세박사)라는 제목의 기사 [링크]가 실립니다. 기사에는 4년 전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독일백림(伯林, 지금의 베를린)에서 약물학을 연구하여 마침내 25세의 젊은 박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510일 오후 9시 열차로 박주병(朴柱秉)이 금의환향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故 박주병(朴柱秉)

 

 

이 분은 바로 최초의 한국인 약리학자이자 군진의료 및 의무행정가로 큰 업적을 남 의학자 박주병(1902~1985)선생님입니다. 박주병 선생님은 1902년 서울 출생으로, 192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선생님은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대학 병리학교실을 거쳐 프라이부르그대학 약리학교실로 옮겨, 1926년 뇌하수체후엽의 자궁수축물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당시 25세에 약리학 박사가 된 선생님은 큰 뜻을 품고 귀국했지만 일본 당국은 교직의 자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중국으로 발길을 돌려 북경청화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다 상해의 레스터 연구소로 옮겨 중국의 의료용 약물에 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서울로 돌아왔으나 일본이 외국박사 학위를 인정하지 않아 국내에서 교편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1942년 다시 만주의과대학에서 일본 의학박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박주병 선생님은 조국이 광복되자 오랜 중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이후 의무행정에 뜻을 두어 미군정 사회부 보건국장에 취임하고, 1947년 대한(조선)약리학회를 조직하여 1953년까지 회장으로 학회를 이끌었습니다. 한국전쟁 후에는 해군준장으로 재직하였고, 이후 국립의료원장, 보사부장관, 의협회장, 결핵협회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출처: 대한의학회][링크]

 

박주영 선생님의 일생 중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바로 북경청화대학에서 연구를 진행하였다는 사실!!! (๑•᎑<๑)ー☆

 

하지만

선생님은 1926년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왔고, 소개해 드린 당안의 생산일자는 192611일입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느끼는데요...  (*′☉.̫☉) 첫 번째 가능성은 11일 표기가 정확한 문서생산의 시기를 알지 못해 임의로 11일로 표기할 수도 있다는 점으로 한국 도착 후 그해 바로 중국 북경으로 떠나 교편을 잡았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동일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의학 전공에... 이름의 한자병기까지 같은 인물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박주병 교수의 가족은 누구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결국 기록을 확인해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 그 기록이 알고 싶다!  (>̯-̮<̯)

 

 

혹 기록을 보신 분이 있으시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