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사 이야기

    역사를 기억하는 법 I

     우리는 후세에 잊히지 않을 위대한 일을 해내거나, 족적을 남긴 이를 존경하고 기억한다. 또한 기억해야 할 사건을 기념하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들의 염원이 ‘기념물(Monument)’를 만들어낸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서울 종로의 광화문 광장만 보아도 그렇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광장이자 도시의 중심부인 그곳에는, 우리 역사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 2명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 성웅 이순신의 동상과, 찬란한 문화 발전의 상징인 세종대왕의 동상이 그것이다. 각각 나라를 구한, 나라를 세운 대표적인 위인이다. 이들이 생전 나라에 바친 헌신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대우는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영국인들은 오래전부터 그들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를 전 국토에 설치했다. 용맹한 국왕부터,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무명의 병사들을 위해서. 혹은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나는 런던에 있을 때, 버스나 지하철과 같은 이동 수단보다 도보로 이동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다른 나라의 도시는 어떤 느낌일지 몸소 체험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길 곳곳에 있는 이 나라의 상징과 기념물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런던은 거리마다 기념물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념비는 대체로 정치인과 군인을 위해 많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대화재같은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우도 있었다. 역사적인 인물들의 경우 생소하고 낯선 인물도 있었지만,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들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발견하고 촬영했던 기념비 중 몇 개만 선별하여, 역사 속 인물들의 소개를 해보고자 한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고대에서 19세기의 기간으로 한정하였다.   1. 부디카 여왕의 동상(Boadicea and Her Daughters)   소재지: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웨스트민스터 다리 앞 건립 연도: 1902년. 다만 형상을 주조한 시기는 1856년~1883년    부디카 여왕(Queen Boudica, ?∼61)은 고대 브리튼 시기에 존재했던 전설적인 켈트족 여왕이다. 로마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이케니(Iceni) 부족의 지도자였으며 네로 황제의 로마제국에 맞서 군대를 일으켰다. 자신의 가족과 부족들이 로마의 폭압으로 인해 약탈·겁탈당하자, 로마에 맞서는 대규모 봉기를 계획했다. 그녀는 자신의 겁탈당한 두 딸을 내세워 이웃 부족들에게 자유를 위한 투쟁이 필요함을 호소했다. 그때의 모습이 현재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앞에 기념비로 재현되어 있다. 자신의 두 딸과 함께 전차를 타고 있는 부디카의 모습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 맞선 비장함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추구를 상징하고 있다. 역사 속의 부디카는 로마의 군세에 결국 패배하였지만, 그 정신만은 기념비로 남아 영국인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2. 리처드 1세의 기마상(Richard Coeur de Lion) 소재지: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웨스트민스터 궁전 야외 건립 연도: 1867년. 설계 디자인은 1851년부터 시작     중세 잉글랜드의 왕 리처드 1세(Richard I of England, The Lionheart, 1157~1199)는 훌륭한 국왕도, 좋은 가장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용맹한 모습만큼은 후세에 전해질 만큼 위대한 전사였다. 그는 전략·전술의 식견이 뛰어났고 병사들을 통제하는 뛰어난 카리스마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불멸로 만든 것은 초인적인 무용 때문이었다. 제3차 십자군 전쟁에서 그의 숙적인 살라딘을 상대로 무패 전승을 기록할 만큼, 전쟁에 관해서는 견줄 자가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영국인들에게 ‘사자심왕(The Lionheart)’으로 기억되고 있다.   3. 찰스 1세의 기마상(Equestrian statue of Charles I) & 올리버 크롬웰의 동상(Statue of Oliver Cromwell) 찰스 1세 석상의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채링 크로스, 트라팔가 광장 앞. 1633년 건립   올리버 크롬웰 동상의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웨스트민스터 궁전 야외. 1899년 건립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은 영국 내전(British Civil War, 1639~1651)의 주인공들이다. 각각 왕당파와 의회파의 지도자였고, 종교적 신념, 정치 사상 등 모든 것이 상극인 인물들이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국왕이 그 힘을 잃고 좌초해버렸으며, 의회 세력이 파워게임에서 승리했다. 내전에서 승리한 크롬웰은 의회를 제압하고 청교도 군사정권을 수립했으며, 국왕 찰스 1세를 참수한다. 군주정은 폐지되어 영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공화정(Commonwealth of England)이 수립되었고, 크롬웰 본인은 종신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어 금욕주의를 동반한 군사독재를 실행한다.  공화국은 대외적으로 경쟁자들을 물리쳐 국익을 증진시켰으나, 지나친 금욕주의와 독재로 인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크롬웰 사후 다시 군주정이 수립되면서 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이 시기 금욕주의가 훗날 악명높은 영국 요리의 배경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4. 런던 대화재 기념탑(Monument to the Great Fire of London) 소재지: 런던, 시티 오브 런던 건립 연도: 1677년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는 1666년 런던의 한 빵공장에서 번진 불길이 도시 전체를 삼켜버린 사건으로, 도시 역사의 큰 분수령으로 기억된다. 이 화재로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 태반이 전소했으며, 도시의 상징 중 하나인 세인트 폴 대성당(Cathedral Church of St. Paul)이 붕괴했다. 자연스럽게 도시 재건에 대한 논의들이 시작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 1632~1723)이다. 렌은 재건 계획을 세움과 동시에 세인트 폴 대성당의 재건축을 진행하여, 근대 런던의 랜드마크를 완성하였다. 렌은 또 다른 건축가인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과 함께 화재가 일어난 시티 오브 런던에 대화재 기념비를 1677년 설치했다. 이 기념탑은 시티 오브 런던의 관광지가 되어 사람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5.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 웰링턴 기마상(Equestrian statue of the Duke of Wellington) 트라팔가 광장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채링 크로스. 1844년   웰링턴 기마상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하이드 파크 남동쪽 입구. 1888년     넬슨 제독(Horatio Nelson, 1758~1805)과 웰링턴 공작(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 1769~1852)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1803–1815)에 활약한 군인으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몰락하게 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 해전(Battle of Trafalgar, 1805)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를 궤멸시킨 구국의 영웅이고, 웰링턴 공작은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1815)에서 나폴레옹을 꺾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영국인들은 전쟁영웅에 대한 예우로, 런던 중심부에 그들을 상징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런던 채링 크로스(Charing Cross)는 중세부터 런던의 중심부 역할을 한 공간이었는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은 이 자리에 트라팔가 해전을 기념하는 광장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광장은 거대한 분수와 넬슨 기념탑, 탑을 지키고 있는 4마리의 사자상으로 구성되었으며, 1844년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넬슨 기념탑은 그의 기함이었던 HMS Victory의 마스트 높이와 같은 55m의 높이로 설치되었다. 광장의 정면에는 국립 미술관(The National Gallery, 1824), 국립 초상화 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 1856)이 있다. 여러모로 런던을 대표하는 광장이자 문화 중심지이고, 그 외관도 수려하다.  웰링턴 공작은 나폴레옹을 격파했다는 명성으로 인해, 런던을 비롯한 각지에 동상이 제작된 바 있다. 그 중 내가 방문한 곳은 하이드 파크에 위치한 웰링턴 기마상이었다. 기마상은 웰링턴의 런던 주택인 앱슬리 하우스(Apsley House)를 바라보고 있고, 동상의 측면에는 그와 전장을 함께한 육군 병사들이 묘사되어 있다. 동상의 뒤쪽에는 (역시 그를 위한 기념물인) 웰링턴 아치(Wellington Arch)가 공원의 입구 역할을 하고 있다.   6. 빅토리아 여왕 기념상(Victoria Memorial) & 앨버트 공 기념탑(Albert Memorial)   빅토리아 여왕 기념상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더 몰. 1901년부터 1924년에 걸쳐 건립   앨버트 공 기념탑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켄싱턴 가든. 1872년 공개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은 영국의 황금기 19세기를 대표하는 군주다. 역사적으로 그녀의 제위 시기인 1836년부터 1901년까지의 기간을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라고 칭하는데, 이 시기 영국은 전 세계에 막강한 패권을 행사하며 ‘영국에 의한 평화(Pax Britannica)’를 수립했다. 빅토리아 시대는 사회·정치·경제 면에서 급변하던 시기였고, 자유주의에 대한 광적인 신념과 엄숙한 도덕주의가 공존하던 때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또 다른 볼거리는 여왕과 그녀의 부군인 앨버트 공(Albert, Prince Consort, 1819~1861)과의 사랑 이야기다. 두 사람은 천생연분으로, 많은 자식을 아래에 두었다. 앨버트 공은 영국 학문과 예술의 가장 영향력 있는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1851년 세계 최초의 세계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것에 큰 역할을 했다. 앨버트 공이 1861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여왕은 부군을 기리기 위해 켄싱턴 가든에 기념탑을 세운다. 기념탑 내부에서는 의자에 앉은 앨버트 공이 로열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을 바라보고 있다. 여왕은 앨버트 공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죽기 전까지 상복을 입고 일상을 보냈다고 한다.   7. 크림 전쟁 기념비(Guards Crimean War Memorial) 소재지: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세인트 제임스 건립 연도: 1861년 건립. 1915년 위치 이동    크림 전쟁(Crimean War, 1853~1856)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 영국-프랑스-사르데냐가 개입하여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처음으로 유럽 대륙에 군사적인 개입을 시도했고, 러시아를 패배시켜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자원을 소모하고, 대규모 인적 피해를 입었다. 이 전쟁은 그 과정과 결과보다 ‘등불를 든 여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의 간호 행위가 더 유명하다.  나이팅게일은 우리에게 헌신적인 간호 에피소드들로 익숙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업적은 의료·간호 행위에 위생적인 환경을 도입한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전투로 인한 사망자보다 부상으로 인해 사망하는 인력 손실에 주목했고, 야전 병원에 위생 개념을 도입하여 부상자의 사망자 비율을 줄이고자 했다. 이는 큰 성공을 거두어, 다수의 병사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나이팅게일은 이러한 업적으로 근대 간호학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크림 전쟁 기념비는 전쟁에서 희생된 인원의 추모와 나이팅게일의 헌신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전쟁에서 획득한 러시아의 대포를 녹여 제작하였다.   8. 글래드스턴 동상(Gladstone Memorial) & 고든 동상(Statue of General Gordon) 글래드스턴 동상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스트랜드. 1905년   고든 동상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빅토리아 임뱅크먼트 가든. 1888년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과 찰스 고든(Charles George Gordon, 1833~1885)은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갔다는 것 외에는 서로 접점이 없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둘은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과 금욕주의, 양심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글래드스턴은 자유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자, 19세기를 대표하는 수상 중 하나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자국의 제국주의 개입을 자제하는가 하면, 인간의 양심에 기초한 도덕 정치를 추구했다. 1833년 하원 의원이 된 것을 시작으로, 주요 자유당 정권의 내각 참여, 1868년부터 수상이 되어 국정을 운영했다. 그는 총 4번의 수상직을 역임한 역대 최고의 수상 중 하나이지만, 평생 작위를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존경을 담아 ‘가장 위대한 평민 (The great Commoner)’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찰스 조지 고든(Charles George Gordon, 1833~1885)은 영국의 공병 장교로, 크림 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에서 활약한 명예로운 군인이었다. 불합리함과 부당함에 분노하고, 부하를 배려할 줄 알고, 사람들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가졌으며, 용감하고 유능하기까지 한 고든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에게 이상적인 인물로 인식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1885년 수단의 수도 카르툼(Khartoum)에서 마흐디 운동 세력에 맞서 싸웠으나, 수적 열세로 인해 패배하고 전사했다.  당시 글래드스턴 수상은 수단에 군사적 개입을 주저했고, 뒤늦게 고든 수비대를 위한 구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고든을 비롯한 모든 수비대는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 전멸했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고든이 전사한 것에 대한 여파로 글래드스턴 내각은 붕괴하고, 글래드스턴 본인은 ‘명예로운 노인(G.O.M, Grand Old Man)’에서 ‘고든의 살인자(M.O.G, Murderer of Gordon)’가 되어 의회와 사회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영국이 수단에서 고든의 복수를 완수한 것은 1898년에 이르러서였다.

  • 자연사 이야기

    라푸스 쿠쿨라투스를 아십니까?

     가끔 나는 ‘만약 내가 지구 최후의 인류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의식주를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을 것이고, 외로움에 괴로운 날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에서 내가 생각하는 가장 씁쓸한 점은, 그 누구도 내가 있었음을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 생명이 멸종한다는 것은 이러한 슬픔과 우울을 동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멸종에 관한 이야기다.  7월 29일,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조류 표본들을 관람하는 중 낯익은 그림을 발견했다. 그것은 라푸스 쿠쿨라투스(Raphus cucullatus)의 복원도였다. 퇴화한 짧은 날개를 가져 비행을 할 수 없었던 육상조류였던 이 새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동물이다. 이 새의 다른 이름은, 멸종의 대명사로 알려진 도도(Dodo)다.  15세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선두로 신대륙과 아프리카, 그리고 인도로 향하는 바닷길이 개척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대항해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통해 세계를 양분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를 통해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인도에 도달하는 무역로를 개척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인도양 마스카렌 제도의 무인도 모리셔스 섬(Mauritius)을 발견(1507년)하게 된다. 한편 포르투갈의 항로개척은 후발주자들에게도 훌륭한 길잡이가 되었는데, 그 후발주자 중 하나가 네덜란드였다. 1598년 모리셔스 섬을 인수한 네덜란드인들은, 이 섬에서 이상한 조류 하나를 발견한다.  아시아로 향하는 중간 경유지인 모리셔스에 네덜란드 선원들이 상륙했을 때,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새를 발견했다. 모리셔스의 주민이었던 그 새는 하늘을 날지도, 빨리 달리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는지, 인간을 보고 피하지 않았다. 섬에서 그들을 잡아먹는 천적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던 탓에 선원들은 그 새를 쉽게 사냥했다. 이 모습이 바보처럼 보였는지, 사람들은 이 새를 포르투갈어 ‘doudo(바보)’로 불렀는데, 이것에 후에 영어의 ‘도도(Dodo)’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Dodo의 어원은 그 기원이 명확하지 않다. 네덜란드어의 ‘dodoor(게으른)/Dodaars(뚱뚱한 엉덩이)’, 포르투갈어의 ‘doudo(바보)’가 보통 그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Dodo’를 처음 사용했었던 과거 영국인들은 그 기원을 포르투갈에서 찾았다. 무엇을 기원으로 하건 유럽인들이 가진 도도에 대한 인상은 긍정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처음 네덜란드인들은 이 ‘멍청한 새’를 잡아먹기 위해 사냥을 했다. 선원들은 오랜 항해를 위해 도도의 살점을 소금에 절여 보관했다. 어찌나 맛이 없었는지, 그들은 도도를 ‘맛없는 새(Walghvoghel)’로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첩하지 못한 이 새를 사냥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기에, 포획은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 같다. 또한 도도가 인간을 피하지 않았던 탓에, 인간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도도를 별다른 이유 없이 때려잡기도 했던 것 같다. 당시에 동물보호의 개념이 있을 리가 만무하니, 인간들은 도도를 사냥함에 거리낌이 없었다.  점차 동방으로의 무역이 확장되자, 모리셔스는 단순한 기항지의 역할을 넘어 정착지로 발전했다. 이것은 도도에 대한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다. 인간의 거주와 함께, 외래종들이 모리셔스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쥐, 개, 고양이, 돼지 등 인간 세계의 동반자들이 섬에 들어오게 되자, 도도의 번식 자체에 문제가 생겼다. 도도는 오직 지상에 둥지를 만들고 알을 낳았기 때문에, 손쉬운 먹이를 발견한 외래종들은 이 불행한 새의 알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거기다 도도는 한 번에 1개의 알만을 낳았다. 인간의 사냥과 서식지의 파괴로 인해, 모리셔스 섬에 인간이 상륙하지 불과 80년 만에 도도는 소리 소문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해는 1681년이다.  도도가 자연에서 자취를 감추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서서히 잊히자, 이 새가 실존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나타났다. 또한 종교적인 이유로 멸종의 개념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도도는 멸종되었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이들이 멸종되었다라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한 것은 19세기가 되어서였다. 19세기에 들어 인간에 의한 멸종의 사례로 도도가 대중에게 소개되자, 비로소 도도는 멸종의 아이콘이 되었다.  우리가 도도의 모습과 생태를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섬에 상륙한 몇몇 항해자들이 남긴 기록 덕분이다. 실력 좋은 삽화가들은 도도의 세밀화를 그려 유럽에 전파했다. 하지만 일부 상충되는 목겸담이 존재하기 때문에, 실제 도도의 모습과 생태를 정확하게 복원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영국 옥스퍼드의 애시몰린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던 마지막 도도의 박제는, 1755년 표본상태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모닥불에 던져졌다. 누군가 급하게 표본을 불 속에서 꺼냈으나, 이미 다리와 머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은 유실되었다. 도도는 골격과 목격담, 일부 기록을 제외하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도도는 문명의 팽창에 밀려 사라진 동물들 중 일부일 뿐이다. 근대가 개막된 이래 이렇게 사라진 동물들은 수백 종이 넘는다. 생전 생김새를 알 수 있는 종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멸종의 행렬은 현재진행형이기에, 여전히 도도는 우리들에게 있어 큰 의미를 가진다. 코뿔소와 북극곰이 또 다른 도도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우리는 인류세(Anthropocene)를 살고 있다. 인류는 지구 환경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질시대 사상 가장 번성한 종이다. 하지만 우리가 팽창한 만큼 다른 생명은 그 자리를 비워야 했다. 도도는 그러한 경향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성자필쇠(盛者必衰),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그렇다고 해도,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는 이 현실이 불편하다. 우리는 의도하였든 아니든 끝없이 새로운 도도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도도가 되고 있는 것 같다.

  • 자연사 이야기

    Goodbye, Dippy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로비에서 관객들을 반겨주는 디피  2012년 7월 런던에 갔을 시절, 런던 자연사박물관 로비에는 '디피(Dippy)'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거대한 디플로도쿠스의 레플리카 골격이 있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박물관의 로비는 대왕고래의 골격이 전시되고 있으나, 디피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박물관의 로비를 지켰었다. 본디 디플로도쿠스는 북미에서 발견된 용각류(Sauropod) 공룡이었기에, 대서양 건너 영국과 연관은 없었다. 그러나 이 공룡은 한 미국의 사업가에 의해 영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평화와 협력의 메시지가 되었다.  1899년 미국 와이오밍 주의 쥐라기 모리슨 지층에서 새로운 디플로도쿠스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 화석은 미국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의 후원에 의해 발굴이 진행되었다. 디플로도쿠스는 이미 1877년 발견되어 이름까지 있었던 공룡이었지만, 이번 발굴은 조금 특별했다. 거의 대부분의 신체가 발견되어, 가장 완전한 골격 형태를 가지고 있는 표본이었던 것이다. 이 화석은 기존 디플로도쿠스의 모식종인 '디플로도쿠스 롱구스(Diplodocus longus)'와 다른 종으로 인정되어, 발굴후원자 카네기의 이름을 따 '디플로도쿠스 카네기이(Diplodocus carnegii)'로 명명되었다. 이 골격은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의 카네기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카네기는 발굴의 후원에 그치지 않고, 영국을 포함한 7개 국가의 국가원수들에게 화석의 레플리카를 선물하였다. 1902년 카네기는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에게 화석 레플리카를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카네기는 뼈를 주조하여 292개의 골격 레플리카를 제작하고, 36개의 상자에 분할하여 런던 자연사박물관으로 보냈다. 골격 레플리카는 1905년 5월 12일 런던의 대중에게 공개되었으며, 박물관의 파충류관(Reptile Gallery)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이 디플로도쿠스의 레플리카 골격은 미국에서 부르는 애칭인 '디피'라 불렸다. 디피는 세계대전과 같은 역경을 견뎌냈고, 1979년 박물관의 중앙 홀에 전시되었다. 이후 박물관의 상징으로 2017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디피의 경추와 두개골의 모습  공룡에 대한 연구결과가 축적됨에 따라 디피의 자세 역시 변동이 있었다. 과거 공룡은 꼬리를 끌고 다니는 거대한 파충류라는 인식이 있어, 디피 역시 꼬리를 땅에 끌고 다니는 형태로 전시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러한 인식은 바뀌어, 목과 꼬리가 수평이 되는 형태로 조정되었다. 디피는 21.3m(70피트)의 길이를 가지고 있는데, 골격이 완전히 발견된 공룡 중 가장 긴 공룡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29일 마지막으로 디피를 보기 위해서 박물관을 찾았다  2012년에 디피는 그 자리에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어린 시절 책과 영상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스무 해를 살면서 가장 기다려왔던 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영국을 떠나기 하루 전, 나는 다시 디피를 보러 박물관을 찾았다. 다시 방문할 그 날을 위해,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2017년, 런던 자연사박물관 측은 디피를 메인 홀에서 철거하고, 그 자리에 거대한 대왕고래의 골격을 설치할 것을 결정했다. 현재의 환경위기로 인해 사라질 수도 있는 동물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자는 의미로 현생동물의 골격을 전시하자는 의미였다. 디피는 메인 홀에서 철거되지만, 영국 전국의 박물관을 순회하며 전시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에 많은 영국인들은 마지막으로 런던에서 디피를 보기 위해 박물관을 찾았다고 한다. 런던의 터줏대감은 다시 전국을 투어하는 여행자가 된 것이다.   만약 다시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면, 디피가 가장 먼저 보고 싶다.   (이 글을 쓰는 도중 디피가 2022년 5월부터 12월까지 런던 자연사박물관에 재전시 된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12월 이후의 일정은 박물관 측 발표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 https://www.nhm.ac.uk/press-office/press-releases/dippy-returns-to-the-natural-history-museum.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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