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데이터로만 저장되어 있던 기록이 서로 연결점을 갖게 되면 새로운 의미와 지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키비스트의 발견>은 여러 아카이브에서 공개하는 기록과 콘텐츠를 살펴보면서 발견한 연결점을
새로운 맥락과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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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알려진 해외 대학 가운데 독특한 별칭으로 불리는 대학들이 꽤 있습니다. 미국의 하버드대는 진리를 뜻하는 ‘베리타스(Veritas)’라 불리고, 베이징대는 메인 캠퍼스가 위치한 옌징의 옌(燕)자를 붙여 통상 ‘옌위안(燕园)’이라 불린답니다. 펜실베이니아대의 경영대학은 ‘와튼스쿨(The Whatron School)’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하죠.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별명을 지닌 대학이 있습니다. 바로 ‘석탑’이라 불리는 고려대학교입니다.
어떤 기관·단체·조직에 붙은 별칭은 기록의 관점으로 보면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제공하는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배경에 관한 흩어진 조각 정보들을 모아서 순서를 맞춰보면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80주년을 앞두고 최근 오픈한 ‘석탑 아카이브’의 기록물에도 ‘석탑’이라는 별칭의 연원을 짐작할 수 있는 몇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이 조각 기록물들을 배열해놓고 고려대학교 홈페이지에서 보조 정보를 찾아보니 그 윤곽이 훨씬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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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의 석탑
1952년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을 배경으로 찍은 조지훈 시인의 사진입니다. 왼쪽에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분이 조지훈 시인으로 당시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었습니다. 조지훈 시인과 중앙도서관은 ‘석탑’이라는 별칭의 핵심 관련어입니다. 우선 중앙도서관은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개교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37년에 건립한 지상 3층의 석조 건물로, 미국 듀크대학도서관을 참고하여 화강암을 주재료로 지은 서양 중세풍의 고딕 양식 건물입니다. 중앙도서관은 고려대학교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한국 근대 건축물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인정받아 사적 제28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석탑문학』과 조지훈
1953년에 촬영된 이 두 사진은 ‘석탑’이 고려대학교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된 사례를 보여주는 가장 앞선 기록물입니다. 첫 번째 사진은 1953년 6.25전쟁 당시 대구 피난 시절에 결성된 고려대 최초의 문학 동인지 『석탑문학』 표지이고, 두 번째 사진은 하단에 ‘석탑문학동인회 출판기념 1953. 7. 8’이라는 또렷한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석탑문학동인회 회원들의 사진입니다. 아래 중앙에 안경 쓴 분이 조지훈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지훈 교수가 앉은 위치 기준으로)왼쪽에 앉은 분은 표지 그림을 그린 변종하 화가, 오른쪽에 앉은 분은 이상로 시인, 조지훈 교수 뒤에는 고대신문 오주환 주간, 그 왼쪽에는 왕학수 교수, 그 외는 모두 동인회 회원들이라 적혀 있습니다. 전쟁통에 혼란스럽고 궁핍한 피난지에서 문학동인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좀 놀랍습니다만, 사실 당시의 대구는 서울에서 내려온 수많은 예술인들이 예술의 불씨를 다시 지피던 곳이었습니다.
『석탑문학』이라는 제호는 조지훈 교수가 지은 것으로, 서문에 제호에 담긴 뜻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돌은 바로 석굴암을 조성한 그 화강암이요, 탑은 바로 노아의 홍수 뒤에 하늘에 오르려는 인간의 의욕이 쌓아올리던 바벨(Babel)의 탑-석탑문학의 지향은 바로 민족적이요 세계적인 것이라야 한다.” 고려대학교가 지향하는 민족성과 세계성을 석조건물의 특성에 비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석탑문학』이 고려대학교를 ‘석탑’이라 지칭하는 최초의 증거 사례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중앙도서관이 화강암을 쌓아 지어졌기 때문에 이전부터 시나브로 교우들 사이에 ‘석탑’으로 소통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교가 <석탑의 메아리>
북악산 기슭에 우뚝 솟은 집을 보라
안암의 언덕에 피어나는 빛을 보라
겨레의 보람이요 정성이 뭉쳐
드높이 쌓아올린 공든 탑
자유, 정의, 진리의 전당이 있다!
1955년 새로 지어진 고려대학교의 교가 <석탑의 메아리> 가운데 1절 가사로, 조지훈 교수가 작사하고 현대음악계의 거장 윤이상 선생이 작곡을 맡았습니다. 원래 소설가 이광수가 지은 교가가 있었으나 그의 친일 이력이 민족 고대의 학풍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개교 50주년을 기념하여 바꾸게 된 것이지요. <석탑의 메아리>라는 교가 제목에서 이미 ‘석탑’이 고려대학교를 상징하는 용어로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사에 “드높이 쌓아올린 공든 탑” 또한 고려대를 중앙도서관에 비유한 것입니다.
고려대학교의 축제, 석탑축전
이 세 장의 사진은 1962, 1966, 1970년 고려대학교의 축제 현장을 담은 기록물입니다. 1962년 사진에는 ‘고려대학교 개교 제 57주년 기념 제1회 석탑축전’이라는 문구가 적힌 정문 아치가 보이고, 기록물 설명에 ‘석탑축전’이라는 명칭을 조지훈 교수가 지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명실공히 ‘석탑’은 고려대학교의 제2의 명칭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석탑축전은 개교기념 행사가 아닌 대학축제를 뜻하는 개념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966년 석탑축전은 한복을 차려 입은 여성 교우들이 강강술래를 하듯 손을 잡고 둥근 원을 그리고 있는 장면인데 4년 뒤 1970년에는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학생과 양복 차림의 남학생이 손을 맞잡고 포크댄스를 추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지금의 대학축제 문화에 비교해보면 신선함을 넘어 낯설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상 네 가지 꼭지를 통해 고려대학교 ‘석탑’의 역사를 더듬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석탑’을 둘러싼 아카이브 속 기록물 간의 연결점을 이어보니 뚜렷한 두 가지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석조 건물로 지어진 중앙도서관이 별칭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지훈 시인의 역할이 가장 컸다는 사실이지요. 사실 조지훈 시인은 『석탑문학』이라는 동인지, 「석탑 메아리」라는 교가, ‘석탑축전’이라는 제목을 지은 것 외에도 교내에 세워져 있는 4.18 기념탑 비문(1960년), 고려대학교의 상징 동물인 호랑이상(虎像)의 비문(1964년)도 작성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고려대에서는 석탑강의, 석탑연구상, 석탑강의상, 석탑장학회 등의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고려대 문과대학이 곧 80주년을 맞는다고 하니, 인연을 맺은 교원과 교우들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그 긴 세월에 쌓인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을까요. 각자 지닌 ‘기억의 조각’들이 이 아카이브에 모여 역사의 발견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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