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이모저모
정도준 출판 코디네이터: 책과 아카이브를 잇는 여행자
아카이브센터
게시일 2022.10.05  | 최종수정일 2022.10.05


아카이브 현장의 사람들을 취재하는 "아카이브 이모저모"
일곱 번째 이모저모에서는 책과 아카이브를 잇는 여행자, 정도준 출판 코디네이터와 함께 했습니다. 


 
가을, 여행하기 참 좋은 계절입니다. 적당히 선선한 온도에 살랑살랑 부는 바람, 알록달록한 단풍과 푸르고 높은 하늘의 색 조화, 기차역의 소란스러움과 조용하고 서늘한 바닷가에서 읽는 책 한 권. 상상만 해도 가슴 설레지 않나요? 코로나 봉쇄 조치가 점점 풀어지는 이번 가을은 자유롭기에 조금 더 특별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음식이 되었건 멋진 풍경이건 낯선 사람이건, 또 잃어버렸던 자신이건, 훌쩍 떠나는 여행에서는 많은 것들을 다시 만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역할에서 벗어난 여행이 개개인에게 의미있는 것이죠. 여행에서 남기는 것들도 많습니다. 추억을 아로새긴 냄새, 새로운 친구, 풍경사진, 기차표, 공연티켓… 흔한 흔적과 물건이라도 나의 여행이라는 이야기를 만나는 순간 의미가 특별해집니다. 이런 산물들은 아카이브라는 공간에 스토리라는 맥락과 함께 저장되며 비로소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아카이브센터는 지난 9월 정도준 출판 코디네이터와 함께 제주도의 '생각하는 정원'을 아카이빙하는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도서 『나무는 인생이다』를 아카이브로 옮겨보는 작업이었는데요. 이 과정에서 그의 독특한 이력이 가져다주는 성찰을 통해 여행과 책, 아카이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정도준 출판 코디네이터

선선한 가을날 아카이브센터 사무실에서 정도준 출판 코디네이터(이하 정도준 코디)를 만났습니다. 그는 저자를 도와 책을 짓는 출판 코디네이터이며 2021년에는 『내 이름의 책 한 권-작은 날갯짓의 시작』(정도준, 백승기 공저)이라는 도서를 출간한 작가기도 합니다. 성격유형은 통찰력이 뛰어나고 인내심이 많으며, 세심하고 직관력이 뛰어난 '옹호자' INFJ입니다. 텃밭을 가꾸다가도 가끔 산과 들로, 해외로 여행을 다니며 히말라야를 등반하고 싶은 꿈을 가졌습니다.

출판 코디네이터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직업입니다. 책 출간을 희망하는 예비 저자와 함께 출판 콘텐츠의 기획, 원고 진행, 출판계약 체결, 편집, 디자인, 제작 등 출판 전 과정을 관리하며, 출간 후 홍보, 마케팅, 저작권 해외 수출, 이러닝 개발까지 책과 관련된 모든 프로세스를 수행하는 역할이죠. 정도준 코디는 유명 출판사에서 임원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프리랜서로 전향하면서 이 직업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건축에서는 코디네이터라는 용어를 굉장히 오래전부터 써 왔었어요. 어떤 총괄적인 진행자나 관리자를 코디네이터라고 지칭하죠. 저는 건축학과 출신이기 때문에 이 용어가 익숙했어요. 그러다 제가 프리랜서로 일을 하게 되면서 나에 대한 호칭을 고민하게 되었죠. 단순 기획자도 아니고 편집만 하는 것도 아니고, 올 라운드 플레이all-round-play를 하는 건데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하다가 코디네이터라는 이름이 떠오른 거예요. 디렉터는 작업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하면 되지만 코디네이터는 스스로 판단도 하고 진행도 하고, 때로는 스태프도 되어야 해요. 그래서 책을 기획하고 진행할 때 작가에게 조언하거나 보조하기도 하고, 출판사에다가는 저자를 대신해서 에이전시 역할을 합니다. 또 편집·디자인 진행상황을 제가 다 체크해요. 출판사와 초판 부수까지도 협의하는, 정말 올 라운드 플레이를 하는 거죠."

삶에서 나만의 성취를 이루어 나갈수록 자기만의 경험을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젊을 적엔 앞만 주로 바라보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되돌아보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지나온 궤적과 모습을 남기고픈 소망은 커지기 마련이죠. 예비 저자들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출판 코디네이터는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정도준 코디는 저자들과 수많은 책을 출판해왔습니다. 그 중에는 '생각하는 정원(이하 정원)' 성범영 원장, 그의 아들인 성주엽 대표와 함께 출판한 여섯 권의 책도 있습니다.

정도준 코디는 내 이름의 책을 한 권을 내는 것과 아카이브를 만드는 데 공통점이 많다고 보았습니다. 1968년부터 지금까지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속해 온 정원의 방대한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나가고, 그렇게 함으로써 생각하는 정원의 가치와 의미를 사람들과 제대로 공유하기 위한 새로운 길이 아카이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정원 아카이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장.
여행의 관점

정도준 코디는 여행을 '떠남과 마주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되돌아옴을 전제로 하는 떠남이지만 그 떠남에는 항상 새로운 마주함이 있기에 언제나 풍요로움으로 되돌아온다고 말이죠.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여행은 자신과 마주하는 여행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의외로 자신을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거창하지 않은 여행이더라도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든 일상의 자신을 잠시 내려놓고 자유로운 자신을 마주한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는 것이라고요.

"전 해외여행을 많이 다닙니다. 그런데 꼭 해외나 국내여행뿐만이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마라톤을 하는 것도 일종의 여행이거든요. 한 번은 마라톤을 하다가, 42.195km를 뛰어야 하는데 절반쯤부터 갑자기 힘들어진 적이 있어요. 그래도 오기가 생겨서 1km만 더, 또 1km만 더 뛰자는 마음으로 계속 뛰었어요. 그때 흔히 이야기하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가 왔어요. 갑자기 세상이, 내 주변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지는 거예요. 제 앞뒤로 뛰는 사람들이 너무 사랑스럽기까지 하더라고요. 물론 2~3분의 짧은 순간이었고 그게 지속되면 굉장히 위험하긴 하지만요(웃음).
그런데 그 경험을 하고 나니까 왠지 힘은 드는데 더 뛰어야겠다, 더 할 수 있겠다 싶어서 끝까지 완주했죠. 마지막 트랙을 도는 순간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그건 제가 평생을 못 잊을 것 같아요. 제 자신을 가장 칭찬한 날이었고 제가 떠났던 여행 중에 가장 강렬하고 멋진 여행이었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저와의 만남이고 동행이죠. 집에서는 가장, 남편으로 아버지로, 회사에서는 어떤 직급으로 그렇게 사는데 막상 내가 나로 사는 시간이나 모습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여행이 좋은 건 내가 나 자신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크죠."


결혼 전에는 코펠과 쌀만 간단히 꾸려 배낭을 짊어지고 목적지 없는 여행을 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젊을 땐 사서 고생한다는 말처럼 훌쩍 떠난 보름 간의 여행에서 밤 기차를 타거나 허름한 여인숙에 묵었던 기억이 있다고 합니다. 정도준 코디는 그 순간을 소환할 수 있는 기차 티켓이든 일기든 몇 가지 기록만 남아 있어도 추억 회상에 도움이 많이 되었을 거라며 아쉬워 했습니다. 그런 걸 따지면 요즘 친구들은 훨씬 쉽게 여행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요.

 
2장.
여행의 기록, '공간'을 '장소'로 만든다

기록은 행위의 산물이자 선별된 것들이라고들 합니다. 하고 많은 영수증 중에 여행 중 목이 말라 산 생수의 영수증을 남기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죠. 그런 걸 골라내는 작업이 선별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별의 과정이 지금까지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따져보아야 하는 작업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사실 여행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떠남과 마주함을 위해서, 발견을 위해서 가는 경우에는 이런 영수증 한 장이 중요해질 수 있단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카이브가 객관적인 시각에서 정확한 정보만을 담아 바라봐야 하는 대상이었다면, 정도준 코디의 생각은 살짝 달랐습니다.


"여행의 아카이브를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영수증, 기차표, 티켓 같은 것들이 추억을 소환하는 매개 채널이 되잖아요. 어제 건축가 친구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아주 멋진 말을 하나 들었어요. 공간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공간'은 그냥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공간이죠. 그런데 그 공간에 추억이 있거나 관계가 형성되었거나 했을 때 거긴 특별한 '장소'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도 기차표 한 장이 크게 보면 무수한 승객으로부터 나온 거지만, 나에게는 하나의 추억이자 내 삶의 한 일부분이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의 공간을 특별한 장소로 만들어가는 게 아카이브의 역할일 것 같아요. 내 삶을 뒤돌아보는 순간에 자기 삶의 존재가치나 의미를 굉장히 두텁고 풍성하게 되살려줄 매개체인 거죠."

사람은 종종 자신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중년의 나이에는 이런 되돌아봄이 존재의 극심한 허탈감, 상실감, 외로움, 무기력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힘들고 지쳤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만나 옛날을 떠올리며 즐거워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카이브도 내 존재와 항상 동행하면서 내가 힘들고 지칠 때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손을 내밀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정도준 코디는 정의합니다.

정도준 코디는 지인의 소개로 생각하는 정원의 성주엽 대표를 만났습니다. 성주엽 대표의 부친은 생각하는 정원의 개척자인 성범영 원장으로, 1968년부터 지금까지 정원을 운영해 나가고 있습니다. 성주엽 대표 역시 대학을 졸업한 후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25년이 넘도록 정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도준 코디는 어느 날 성주엽 대표로부터 25년 동안 틈틈이 기록해 온 묵직한 원고를 받았습니다. 순서도 없고 분류도 없는 날 것 그대로의 글이었죠. 어떤 글은 매우 진한 인상을 남길 정도로 깊이 있는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나, 어떤 글은 아직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미숙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글은 나무와 함께 한 그의 땀방울이자 숨결이었으며 자신을 찾아 떠나온 여행의 기록이었기에 책으로의 전환은 충분했습니다. 마침내 『생각하는 나무이야기』, 『나무편지』, 『분재인문학』이라는 3권의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이 인연으로 정도준 코디는 성범영 원장의 이전 도서 『생각하는 정원』, 『나무는 인생이다』, 『분재 가꾸기』의 개정판 작업까지 돕게 되었습니다.

 
생각하는 정원의 2022년 가을 풍경  ⓒ 생각하는 정원

"처음에 정원에 갔을 땐 실망했어요(웃음). 미리 글과 사진으로 접하고 가긴 했죠. 물론 나쁘지는 않았는데 기대가 너무 컸던지 기대 이상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갈 때마다 새로운 게 보여요. 나무와 대화하고 돌의 체온을 느끼고 바람의 숨소리를 느끼는 그것을 처음에는 몰랐어요. 나무 하나하나, 돌담에 박힌 돌 하나하나를 볼 때, 바람을 느낄 때 말이에요. 제가 아까 좀 실망했었다는 건, 처음엔 목적의식을 갖고 간 거잖아요. 책을 진행하면서 정원에 대해서 뭔가를 발견하고 얻어내려고 했던 업무 목적이었기 때문에 실망했을 수도 있어요. 그 다음부터 그냥 편안하게 한바퀴 둘러보면서 천천히 산책하다보니, 정원의 특유한 모습 하나하나가 다가오더라고요. 정원을 모르고 가도 상관없지만 정원 아카이브를 통해서 정원의 공간과 길을 미리 알고 가면 마음을 비우고 가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았어요. 원장님이 아끼는 멋진 수형미를 지닌 향나무라든지, 전국 각 도에서 공수한 돌들로 지은 돌담이라든지. 사람들이 다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냥 나무도 좀 있고 별 거 아니네 하고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정원에 이야기와 맥락이 속속들이 있다는 게 아카이브를 통해 알려지면 사람과 정원과의 관계가 견고해질 수 있겠죠."

생각하는 정원은 즐기고 소비하는 관광지가 아닙니다. 여덟 곳의 정원들이 정확하게 8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지는 않고, 유일하게 출입구가 있는 비밀의 정원을 제외하면 전체가 열려 있는 구조입니다. 말 그대로 물 흐르듯 생각하고 깨닫고 발견하는 공간이죠.

그래서 정원의 기록은 다양합니다. 성범영 원장, 성주엽 대표를 비롯한 운영진이 50여 년에 걸쳐 정원을 가꾸면서 사색한 기록,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 산책하며 남긴 방명록과 사진들, 오랜 세월 서서히 바뀐 정원의 풍경들, 정원의 귀한 나무와 분재들, 각종 인사들이 정원에 영감을 받아 만든 멋진 예술작품까지…

워싱턴 D.C. 분재박물관장 잭 서스틱이 생각하는 정원 방문 후 남긴 방명록  ⓒ 생각하는 정원
IMF의 여파로 힘든 시절에도 묵묵히 돌담을 쌓아 나가는 생각하는 정원(당시 분재예술원)의 모습  ⓒ 생각하는 정원

이쯤 되면 사람들은 궁금해지죠. 관광하고 걷기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무슨 이야기를 담은 '장소'인지를 말입니다. 아카이브가 이런 궁금증을 해소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원 관람길 한 쪽에 있는 갤러리에 아카이브를 만들고, 온라인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지겠죠.

 
3장.
책으로 풀어낸 정원, 아카이브로도 풀어낼 수 있을까

정도준 코디의 저서 『내 이름의 책 한 권』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랬습니다. 과정과 방법은 달라도 나의 책과 아카이브를 만들어나가는 목표의식은 서로 굉장히 비슷하다고요. 내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와 경험들을 뽑아내, 나의 지식과 잘 버무려 구조화하고 만들어나가는 목표의식 자체는 비슷해 보였어요. 지난 9월 한 달 간 정도준 코디는 아카이브센터와 함께 '생각하는 정원 아카이브'를 만들면서 책과 아카이브 사이에는 분명한 접점과 동일성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이 첫 단추를 꿰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출판 분야에서는 손꼽히는 전문가지만 아카이브는 무척이나 낯설었으니까요.
 
생각하는 정원 아카이브 메인화면  ⓒ 생각하는 정원

그는 아카이브가 도서관과 같다면 디지털 아카이브는 메타버스 공간과도 같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갈수록 침체되고 있는 출판의 미래 대안 중 하나로 디지털 아카이브와의 동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아카이브에 대한 도전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책 한 권으로 시작하는 아카이브였기에 일단 성범영 원장의 도서 『나무는 인생이다』를 다시 읽었습니다. 정도준 코디가 알고 있던 정원의 모든 것을 되새겨보면서 아카이브의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책의 기획과 목차구성은 아카이브의 분류작업을 낯설지 않게 했으며, 책 원고의 편집은 아카이브의 등록 작업과 유사했습니다. 그러나 책과 아카이브는 다름을 깨달았습니다. 둘의 만남을 가장 난해하게 한 것은 접근 방식과 전개 방식의 차이였습니다.
 

"처음엔 '모든 책은 아카이브고 모든 아카이브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그런데 첫 책을 한 번 하고 나서는 제 정의가 바뀐 거죠. '모든 책은 아카이브가 될 수는 없지만 모든 아카이브는 책이 될 수 있다'라고요. 책과 아카이브는 일단 접근 방식이 주관적이냐, 객관적이냐는 차이가 있고요. 전개 방식에서도 책은 '창의적인 자유로움'인 반면 아카이브는 '정형화된 간결함'이 있더라고요.
모든 책이 아카이브가 되려면 아카이브의 정형화된 간결함이라는 속성에 규정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책은 단어 하나 가지고도 몇 페이지를 이어가기도 하거든요. 그런 여러 페이지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출처나 정보를 아카이브에 옮기려고 했을 때 넣을 수 있는 게 적어요. 정원 같은 경우는 그래도 어떤 사람이 여기 있었고 그가 어떤 말을 남겼으며, 언제 정원이 탄생해서 언제가 개척기였고, 향나무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겼다는 등 정보는 아카이브의 속성에 맞춰서 풀어나갈 수 있어요.
그래도 모든 책은 아카이브가 되지 못한다는 게 책의 영역이 워낙 다양하잖아요. 자기계발서는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자기 삶의 반성과 부족함을 채워나가게 할 수 있는데, 이 내용을 아카이브에 옮기자니 메시지나 감정을 그대로 옮길 수가 없는 거죠. 에세이 같은 순수 창작물의 경우에도 책 한 권이 아카이브에 기록물로 등록될 순 있지만 아카이브가 되긴 어렵고요. 그래서 가장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그거였어요. '창의적인 자유로움과 정형화된 간결함의 간극이 있다.'"


주관적인 시각에서 자유롭게 서술을 해나갈 수 있는 아카이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증거와 증명의 가치, 공공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아카이브에서는 정형화된 아카이브가 효율적입니다. 그러나 개인이나 민간의 영역에서 아카이브는 다양한 기록의 유형만큼이나 더 자유로워지고 그 영역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정도준 코디는 책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를 아카이브가 더욱 공고히 해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디지털 아카이브가 메타버스 공간과도 같아서, 제주에만 한정된 정원이 공간적 한계를 넘으면 우리가 어디서든 친근하고 풍부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뀔 거라고 말이죠.

이 작업을 하면서 정도준 코디는 의외의 익숙함을 느꼈습니다. 아카이브를 막 접했을 뿐더러 스스로 시스템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는데도요. 그는 아카이브의 분류 작업이 책을 기획하고 목차를 구성하는 작업과 상당히 흡사하다고 말합니다. 책과 아카이브를 콘텐츠 만드는 사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작업하면서 느꼈던 부분이었습니다.

"출판 코디네이터가 기존의 편집자나 기획자와 다른 부분이 있어요. 편집자나 기획자는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서 출판사 입장에서 작업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출판 코디네이터는 저자의 의뢰를 받아서 저자의 입장에서 작업을 하죠. 저자들은 철저하게 자기 입장에서 같이 고민하고 문제를 풀었다는 것에 굉장히 만족했었거든요. 제가 그냥 의뢰받은 금액만큼 뚝딱뚝딱 만들어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책과 사람을 얼만큼 이해하느냐,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 사람의 분야를 얼만큼 공부하고 책을 진행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물에 큰 차이가 있더라고요.
아카이브도 마찬가지예요. 아카이브의 속성, 가치, 기록을 만든 사람들의 지향점과 같은 것들을 먼저 알아야 해요. 이걸 파악하지 않고 아카이브를 맡는다는 것은 제가 항상 비난하는 출판 사기꾼처럼 그냥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 단순한 차원에서 그칠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제대로 아카이브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동행의 입장에서 의뢰자, 의뢰단체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거죠."


아카이브를 기획하고 설계하는 일을 하게 되면 기록이 생산된 원인과 기록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냥 정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본질을 꿰뚫어 분류하는 작업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정도준 코디는 모든 업무의 초반에 왜 책을 내려고 하는지, 책에 담고싶은 메시지는 무엇인지, 책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 싶은지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아카이브에서도 목적과 목표, 이유를 함께 공감하고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저 생겨난 대로 쌓인 기록 더미에 불과하던 것이, 맥락을 갖고 의미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아카이브로 변모하기 때문입니다.



끝내며

여행을 사랑하는 우리는 의외로 쉽게 떠나지를 못합니다. 마음을 먹고 계획을 짜야 하는데 더구나 제주도라면 더욱 그렇죠. 생각하는 정원은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에 있습니다. 정원의 아카이브는 정원의 공간적 한계를 벗어나 정원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정원의 평온함을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나무가 우리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듯이, 나무의 가치를 일구어온 생각하는 정원도 아무런 제약 없이 만날 수 있기를 정도준 코디는 바라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더 크게, 더 많이 보인다 했습니다. 아카이브에서 만난 정원을 다시 제주에서 만나게 된다면 여행의 감동은 더욱 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원의 아카이브는 더 풍성해지고 더 열려있어야 합니다.

정도준 코디와의 인터뷰는 아카이브의 본질을 탐구해보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또다른 기회였습니다. 책과 아카이브를 서로 이엉처럼 엮어보는 이 대화는 마치 일상을 떠나 새로운 것을 마주하면서 또다른 나를 발견해보는 여행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재구성된 지식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책과 아카이브를 때로는 견주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유사성을 탐색하기도 하며 아카이브센터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고민해 보았습니다. 아카이브 작업을 하면서 느낀 것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그의 솔직한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차분했습니다.

"아카이브센터에서 민간 영역의 아카이브를 넓혀가려고 한다는 점에서 말씀드리자면, 정형화된 간결함의 아카이브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되 자유로움을 보조하면서 동행하는 구조를 생각해보아야 해요. 아카이브에 좀 에세이적인 구조가 서포트 되어도 괜찮잖아요. 오히려 부드러움과 자유로움을 통해서 아카이브의 간결함이 더 보충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아카이브는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수 있겠죠."




일시          2022년 9월 27일 화요일 오후 1시
장소          아카이브센터 회의실
인터뷰이    정도준 출판 코디네이터
인터뷰어    정혜지 선임연구원
기획          정혜지 선임연구원
편집          정혜지 선임연구원
감수          아카이브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