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01.27 15:37 / 백철 기자 / 경향신문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누적 관객수 700만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 사건이다. 영화 끝부분에 박종철 열사의 유가족과 함께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모습이 보인다.
사실 민가협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당시 민가협에서는 ‘치안본부 고문살인사건’으로 부름)이 항쟁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종철 열사가 사망하고 이틀 뒤인 1987년 1월 16일 오후 5시, 민가협 회원들을 비롯한 100여명이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기습시위를 벌였다. 고문치사사건이 알려진 뒤 최초의 시위였다. 사흘 뒤인 1월 19일, 전두환 정권의 내무부가 고문 사실을 일부 시인하자 다음날 민가협 회원 등 100여명은 서울대 정문 앞에서 ‘박종철 살려내라’, ‘살인정권 군부독재 퇴진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1987년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당시 한 민가협 회원이 전경의 가슴에 꽃을 달아주고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신군부 타도 의지 담아 12월 12일 창립
2007년 6월항쟁기념사업회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발간한 <6월항쟁을 기록하다>는 민가협을 “민주화운동 기동타격대”라고 불렀다. 1985년 12월 12일 창립한 민가협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전부터 민주화운동가들이 구속되고 탄압 받는 현장에 어김없이 나타났다. 민가협 상근간사를 지낸 이경은씨(58)는 민가협에 ‘실천’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민가협은 민주화운동가들을 옥바라지하는 후원단체가 아니었다. 지금 구속되어 있는 양심수들을 석방시키기 위해서라도 민주화가 필요했지만, 민주화가 완성되지 않으면 아직은 어린 우리 아이들도 자라서 또 구속되고, 고문과 탄압을 받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민가협은 처음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 단체로 시작했기 때문에 단체 이름에도 ‘실천’이라는 말을 넣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가협의 창립일이 1985년 12월 12일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두환의 신군부 쿠데타가 1979년 12월 12일에 일어났기에 일부러 그날 창립을 하여 신군부를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1987년은 군사독재정권의 민주화 탄압이 정점에 달하던 때였다. 1986년 12월 기준으로 학생운동가 등 3400여명의 양심수들이 구속된 상태다. 게다가 제1야당인 신민당은 민주화 세력이 요구해왔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1987년 1월 6일, 민가협은 그 해의 첫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전두환 정권과 타협하려는 신민당의 당사에서 농성한 끝에 이민우 당시 신민당 총재로부터 직선제 개헌 주장을 고수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국민평화대행진 제안 관철시켜
이후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결성되고 6월항쟁이 진행되면서 민가협도 항쟁 곳곳에 족적을 남겼다. 1987년 6월 18일 전국적으로 열린 ‘최루탄 추방의 날’에서 민가협 회원들이 전경들에게 꽃을 달아주는 장면은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회자되는 장면이다. ‘최루탄 추방의 날’은 같은 해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 등 많은 이들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전경의 최루탄과 진압봉에 의해 부상을 당한 데 대한 항의의 성격을 담은 행사였다. 이경은씨는 “최루탄 추방의 날이 열리기 전 민가협 사람들끼리 회의를 했다. 평화를 외치는 대회인 만큼 평화를 상징하는 꽃을 미리 준비해서 전경들에게 달아주면 어떻겠느냐는 논의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1987년 당시부터 민가협 회원으로 활동해온 정순녀씨(83)는 “민가협 활동을 하면서 전경들을 참 많이 봤다.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위해서 싸우는 건데 전경들도 다 우리 자식 뻘이고, 위에서 시키니까 밀어붙이는 걸 어머니들도 다 알고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6년 3월 4일 명동 수녀교육관 앞에서 양심수 석방요구 구호를 외치는 민가협 회원들. 이날은 민가협이 첫 가두시위에 나선 날이었다. / 이경은 제공
전국적으로 시위가 지속적으로 일어났지만 전두환 정권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6·10대회 이후 이어진 시위에서 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이 구속됐고, 투쟁에서 발을 빼려는 단체들도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러던 차에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을 벌이자고 제안한 것이 바로 인재근 당시 민가협 총무(현 민주당 의원)였다. 인 의원은 2003년 발간된 <민청련 20주년 기념자료집> 좌담회에서 한남동 꼰벤뚜알 수도원에서 열린 국민평화대행진 관련 국본 회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때 기독교하고 정치권이 안 하려고 슬슬 빼는 거다. 그래서 내가 그걸 하게 하려고 아주 독기를 품고 난리를 쳤다. 기독교 대표로 나온 사람도 자기 개인은 하고 싶다면서도 기권했다. 그날 목숨을 걸고 악을 썼다. 6월 26일 기념행사를 준비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날짜를 미룰 수도 있다고 그러는 거다. 내가 마이크를 딱 잡고 ‘그날을 미루면 안된다. 굉장히 상징적인 날이다’라고 말했다.”
인재근 당시 총무의 주장에 힘입어 1987년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예정대로 전국 37개 도시에서 진행됐다. 6월 10일 민주항쟁의 3배가 넘는 인파가 몰린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의 경찰력은 한계를 드러냈다. 사흘 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며칠이 흘러 7월 5일,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 열사가 결국 숨을 거뒀다. 나흘 뒤 열린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에는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 이어진 행진에 동참했다. 선두에서 가장 먼저 시청광장에 도착했던 이들이 민가협 회원들이다. 이들은 모두 머리에 상복을 대신한 삼베 수건을 썼다. 오랫동안 민가협의 상징은 보랏빛 두건이었다. 민가협에 앞서 1974년 9월부터 활동했던 구속자가족협의회 때부터 이어온 전통이었다. 하지만 박종철·이한열의 사망 이후 민가협은 민주화운동가들의 장례식 때마다 삼베 두건을 쓰곤 했다.
6월항쟁 기간 동안 민가협은 구속된 민주화운동가들의 ‘후원단체’가 아니라 스스로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선 조직으로 활동했다. 초기 민가협 활동을 이끈 것은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여성 활동가들이었다. 민가협 창립 때 총무를 맡은 인재근 의원 등 민청련의 여성 활동가이자 민청련 구속자들의 가족이었던 이들이 민가협의 주축을 이뤘다. 이경은씨뿐만 아니라 조명자, 박문숙, 김설이 등 당시 젊은 민청련 여성 활동가들은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와 민청련 활동의 경험을 살려 민가협을 꾸려나갔다. 남영동 대공분실 이외에 서울 이문동, 장안동, 신길동 등 전두환 정권의 안기부와 경찰이 운영하던 대공분실을 찾아내고 항의집회를 주도한 것도 민가협이었다. 민가협이 발행한 회원수첩에는 수감자들이 감옥에서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지, 구속자 가족의 옥바라지 노하우 등이 공유됐다. 이경은씨는 “우리가 민청련 가족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한 명의 운동가였던 사실이 중요하다. 같은 민청련 가족이라는 점 이전에 동지적 유대감으로 모인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자녀를 둔 50~60대 여성이 많이 활동했던 민가협은 때론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경은씨는 민가협의 투쟁이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숨죽이고 살던 이에게 용기를 준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했다. 때는 1987년 8월, 서울 중구 삼각동에 위치한 민가협 사무실에 한 60대 여성이 찾아온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사실을 처음 세상에 알린 김학순 할머니였다. 이씨는 “8월쯤이었나 6층에 있던 민가협 사무실에 할머니 한 분이 거즈 손수건을 들고 찾아온 거다. 자기가 정신대에 있었는데 죽기 전에는 한을 풀어야겠다고 하셔서 얼른 재근 언니(인재근 의원)를 불렀고, 언니가 윤정옥 소장(정신대연구소)에게 연락을 했다. 김학순 할머니께 어떻게 오셨냐고 여쭤보니 민가협 이름에 ‘가족’이 들어 있어서 용기를 냈다고 하셨다”며 “민가협 활동을 하면서 그렇게 여기저기 명함을 뿌리고 다녔는데 우연히 우리가 뿌린 명함을 보고 연락을 해오셨던 것”이라고 말했다.
1월 25일, 서울 탑골공원 앞에서 보라색 두건을 쓴 민가협 회원들이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는 목요집회를 하고 있다. / 백철 기자
처음 본 학생도 “다 내 자식 같아서”
평범한 어머니가 민가협을 계기로 민주화운동가로 바뀌기도 한다. 정순녀씨는 학생운동을 하던 큰딸이 구속될 때만 해도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는 “딸이 학생회 간부로 있었던 건 알았지만 어릴 때부터 공부만 하던 애라 별 걱정을 안했다. 그런데 어느날 인천의 경찰서에서 ‘당신 딸이 데모하다 잡혀왔다’고 전화가 왔다. 하염없이 눈물만 나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둘째가 울지만 말고 민가협이라는 곳이 있다는데 한 번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며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0년을 민가협에서 보냈다”고 말했다.
정순녀씨의 딸은 1987년 6·29 선언 이후 풀려났다고 한다. 그래도 계속 민가협 활동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정씨는 “다 내 자식 같아서”라고 말했다. 그는 “데모하러 가보면 학생들이 경찰을 피해 가게로 숨거나 아니면 이미 잡혀서 끌려가는 모습을 많이 본다. 민가협 어머니들이 처음 본 학생도 내 자식처럼 생각하고 경찰을 막아서고 체포한 학생은 구출해온 적도 많았다. 내 자식이라도 구해온 것처럼 그렇게 기분이 좋고 신나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처음엔 이름 없는 한 명의 민가협 회원이었던 정씨는 30년 넘게 민가협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까지 민가협 활동에 앞장섰던 임기란 전 민가협 의장을 ‘신철이 엄마’라 부르던 정씨는 “둘이서 참 오랫동안 같이 다녔는데 지금은 신철이 엄마가 몸이 안 좋아서 더 이상 민가협에 못나온다. 예전에 같이 하던 어머니들도 다 가버리고 지금은 조금 외롭다”고 말했다.
1월 25일 서울 탑골공원 정문 앞에서 민가협이 주최하는 목요집회가 열렸다. 정순녀씨 등 집회 참가자들은 30년 전 민가협 회원들처럼 보라색 두건을 썼다. 민가협 회원들은 “겨울이 가기 전에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라”며 구호를 외쳤다. 이날은 1155차 민가협 목요집회였다. 민가협 상근간사였던 이경은씨는 “군부독재 축출로 민가협 창립 목적의 일부는 달성됐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은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라며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민가협이 민주화운동 조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