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성가교회
황해도 연백군 괘궁면 구암리에 있던 성공회 1916년 5월 29일 교회공동체가 함께 지키는 기도일인 공도재일(公禱祭日)을 맞이하여 백천전도구의 신부와 부제와 여러 남녀 교우들이 구암성당에 모여 금년 농작물이 잘 되기를 축복하고 모든 환난을 면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순행를 행하였다. 순행(巡幸)은 치리하는 지역을 살펴 근심을 덜고 복을 기원하는 예식을 말한다. 1917년 11월 29일 주교가 방문하여 축성하고 미사성제를 봉행하였다.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조선성공회월보」제98호(1916.8); 「조선성공회보」 제2호(1918.2) 구암 성가교회 순행모습
✠도태리교회 都台里敎會 황해도 연백군 운산면 도태리에 있던 성공회. 1936년 초에 설립되었다.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조선성공회보」 제223호(1936.7.)
✠문미 성바실교회 황해도 연백군 문미에 있던 성공회. 배천전도구에 속해 있었다.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1. 1935년/11월/215호(조선성공회보) 다음으로 평안남도 순천지방에 있는 수덕(성요한회당)과 문거리(성베드로회당)란 두 곳에 회당을 축복하였나이다. 다음으로는 황해도 연백군에 있는 문미라는 곳에 성바실회당을 축복하였나니 이곳은 전에 신도들이 교회회장의 사택에 모여 기도를 보던바인데 이제부터는 이 새로 축복한 회당에 모이시겠나이다. 이 여러 회당을 축복할 때마다 원 근처에서 신도되신 형제자매들이 오셔서 새로 축복을 받는 회당 형제들로 하여금 많은 용기를 내어주셨나이다. 2. 「조선성공회보」 제243호(1938.3.) 1938년 2월 7일부터 10일까지 사경회를 열었다. 문미 성바실교회성바실교회 교인들(1935) ✠문산교회 황해도 배천군 발산면 문산동에 있던 성공회 1908년 8월, 배천서에성교회의 김희준(마가)전도사가 윌슨(Wilson, 위성안) 신부를 모시고 각처 지교회를 순방하,는 중에 설립하였다. 교인은 이달영 등 20명이었다..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한국성공회 북한 지역 초기선교 이야기”(주성식,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 2021
✠문재 성마가교회 황해도 서흥군 내덕면 문재리에 있던 성공회. 배천전도구 소속이었다. 1933년 1월부터 「참빛」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였고 2월 13이부터 3일단 전도회를 열어 30여 명의 문자(問者)를 얻었다. 1933년 봄 음력 정초와 해빙기를 이용하여 다른 여러 교회들과 함께 전도회를 개최하여 다대한 성과를 얻었다. 1938년 2월 15일부터 18일까지 사경회를 열었다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조선성공회보」 제183호(1933.3); 제188호(1993.8.); 제243호(1938.3.) 문재교회 신자들과 배문호신부(1933)
✠배천 문창리교회 황해도 서흥군 세평면 고읍리에 있던 성공회 1918년 6월 5일 열린 교구교역자회의에서 연백전도구에 문창리교회를 포함한의 네 곳에 서당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조선성공회보」 제9호(1918.9.)
✠배천읍 제성교회 白川邑諸聖敎會 황해도 연백군 배천읍(한자로 ‘白川’이라고 쓰고 배천이라고 부름) 서촌면 4리에 있던 성공회. 배천전도구 소속이었는데 뒤에 연백전도구가 되었으며 교회 이름도 연백교회로 바뀌었다. 성공회의 워너(Warner, 왕란도) 신부가 1893년부터 강화 갑곶(甲串)에서 전도를 하면서 김희준(마가)와 배천 청년 한 사람에게 교리를 가르쳤는데 이것이 배천 선교의 씨앗이 되었다. 워너 신부는 이 청년과 함께 배천을 왕래하며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강화읍에서 길강준과 수녀들이 배천을 왕래하며 여러 곳에 전도를 하였다. 1907년, 박요한(베드록) 신부의 뒤를 이어 윌손(Wilson, 위성안) 신부가 배천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배천은 강화선교구역에 속한 네 소전도구의 하나가 되었고 김희준(마가)이 첫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배천교회는 진명학교를 설립했는데 학생은 30여 명이었고 김희준이 교장이었다. 1908년 10월18일 150명이 집회할 수 있는 큰 성당을 터너(A. D. Turner) 주교가 축성하였다. 1909년 초 입교자는 188명이었고 그 해 5월 7일 처음으로 17명이 견진성사를 받았다. 1911년 김희준의 후임므로 이의경(모아서) 전도사가 부임하였다. 배천교회는 1915년 배천전도구로 독립하였고 강화읍교회에서 시무하던 배드콕(박요한)이 관할사제로 부임하여 황해도 각 지역에 성공회를 전파하는 일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성공회에서는 매년 각 전도구에 기본배당금을 정하고 이를 발표하는데 연백전도구는 배당된 액수가 제일 적거나 하위였던 것으로 보아 교회의 규모는 크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한국성공회 북한 지역 초기선교 이야기”(주성식,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 2021); 「종고성공회월보」 제1호(1908.7); 제2호(1908.8); 제3호(1908.7); 제6호(1908.12); 「조선성공회월보」제74호(1914.8); 제76호(1914.10); 제78호(1914.12); 「조선성공회보」 제24호(1919.12) 교회 내부의 제대모습(1933)새로이 견진성사를 받은 교인들과 구세실주교
✠버드내 성바울로교회(유천교회) 황해도 연백군 유곡면 유천리에 있던 성공회
유천교회(柳川敎會)로도 불렸다. 배천 제성성당에서 30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1922년 감리교인이었던 조치규(바오로)씨가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는데 그 유족들이 2백여 평의 부지 위에 성당을 건립했다. 1925년 마가 주교가 백천성당을 방문하여 26인에게 견진성사를 베풀었는데 그 반수는 버드내 성바울로교회에서 온 신자들이었다. 1927년 5월, 신자 4인이 백천교회에 가서 임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1938년 1월 7일부터 20일까지 사경회를 열었다. 1938년 5월 7일 성바우로를 호수성인(護守聖人)으로 하여 새 회당을 축성했다.-한자 첨부1938년 12월 12이루터 15일까지 낮에는 사경회를 열고, 밤에는 전도회를 열었는데 전도회에는 매일 밤 80여 명이 참석했다. 1938년 5월 16일 신축회당 축복식을 거행하고 친목과 전도를 위해 성우회(聖友會)를 조직하였다.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조선성공회보」 제92호(1925.8.); 제114호(1927.6.); 제243호(1938.3.); 제246호(1938.6.); 제251호(1938.11.)제254호(1939.7.) 버드내 성바울로교회와 교인들(1938)버드내 성바울로 교회의 내부 모습
✠사리원교회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행정에 있던 성공회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1934년/3월/195호(조선성공회보) 평양교회에서 우리 평양교회에서는 작년 여름부터 진남포(鎭南浦)와 사리원(沙里院) 두 지방을 다니면서 새로히 전도에 책수하였나이다. 아직은 두 곳 다 두간 셋방을 얻어 주일기도와 그 외 집회에 사용하는 중이외다. 진남포에는 이미 타지방에서 와 사는 교인이 20여인(아이까지)이 있고 또 현재 새로히 망세받은 분이 10여인이 있으며 그분들은 주일마다 모여 기도를 보고 서로 기쁨으로 동심진력하나이다. 사리원은 현재 망세받은 분이 7, 8인이 있고 또 매주일 모여 기도를 드리나이다. 바라건대 각 교회의 형매 제위께서는 이상 두 지방으로 이사온 교인은 물론 그의 친척 친우까지라도 계시는 줄 아시거든 쉬이 주소와 성명을 적어 이 평양교회로 보내주심을 바라나이다. 그리하면 그분들을 저저히 심방하려 합니다.
✠석전 성알반교회 황해도 연백군 금산군 석전리에 있던 성공회. 신성천전도구 소속이었다.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석전 성알반교회 ✠성머리성바나바교회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성머리에 있던 성공회. 배천전도구
성머리는 읍에서 북으로 40리 떨어진 장터인데 초기에 한 간 반되는 사랑을 빌어 예배를 드렸는데 교회가 부흥되어 장소가 좁아 어려움을 겪자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교인들이 대지 250여 평을 마련하고 선교부에서 건축비용 전부를 부담하여 1932년 2월 초순에 건축공사를 시작하여 5월 8일에 공사를 끝내고 13일에 축복식을 거행하고 이어서 견진미사성제를 봉행하였다. 1933년 2월 6일부터 3일간 전도회를 열었다.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조성성공회보」 제173호(1932.5); 제175호(1932.7); 제183호(1933.3) 성머리 성바나바교회 새로이 견진성사를 받은 교인들(1932)
✠연남리교회 황해도 연백군 석산면 연남리에 있던 성공회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호두리 성베드로교회 虎頭里敎會 황해도 연백군 남면 호두리에 있던 성공회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1919년/3월/15호(조선성공회보) 연백전도구 본군에 유행감모는 근일에야 비로소 침식되었사오니 천주께 감사하오며 본 신부 다년 연백전도구를 주관하시더니 금년 2월부터는 일층 더 중대한 책임을 담임하사 강화전도구까지 관할하시게 되었삽고 보좌사제로 이(李)미카엘신부 백천에서 시무하실 터이오며 이왕 문창리(文昌里)에서 전도하시던 이(李)모세씨는 본읍으로 반이하사 시무하실 터이오니 우리 모든 교우는 마땅히 신부 양위와 전도사를 위하여 천주께 기도하사 교회가 점차 흥왕케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우리 조선성공회는 매양 재정상 자유를 지키지 못하고 외국선교회에서 보내는 재정으로 각양 사소한 경비까지 지출하는 터이라. 그러하나 본 전도구 내 호두동(虎頭洞)이라 하는 곳에 성베드로성당이 있는데 해동 교우 형제의 가세가 비록 넉넉지 못하나 본 성당 일반경비와 특별히 성당과 신부의 유숙하시는 집까지 개초(蓋草)하기 위하여 일금 50원을 판비하여 장래 비용으로 마련하였으매 본 성당의 잡비와 개초하는 경비는 서양에서 나오는 금전을 의뢰치 아니하게 되었사오니 실로 해동 일반교우의 자유적 사상과 열성을 가히 칭송할만 하오며 모범할 만 하외이다. ✠연안읍교회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성화리에 있던 성공회 《참고문헌》 “해방전 북한 소재 성공회 목록”(성공회역사자료특별위원회, 2025.) 1933년/12월/192호(조선성공회보) 연안읍과 해주에 전도 시작. 금년 가을부터 연안읍에 전도를 시작하였는데 그 동기는 배천읍에 거주하던 교인 2가구와 강화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교인 몇가구가 있으므로 이 교인을 위하여 관할신부가 그 곳을 심방하고 기도하는 동시에 전도를 시작하게 된 것이 이미 문자 몇사람이 생겼으나 기도볼 장소가 없어 임시로 집 하나를 빌어 지금 사용하는 중에 있나이다. 배천전도구는 지위적 관계로 다른 전도구보다 비교적 교화와 교회의 연락이 없고 독립적 위치에 있는 고로 이왕에도 배천교회를 관할하시던 신부들이 고 조주교나 구주교께 연안 해주 방면에 교회설립의 필요를 건의한바 있었으나 기왕은 제일 교통의 불편하며 또한 교역자의 부족 이같은 원인으로 이곳에 전도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가 작년부터 황해선이 개통됨을 따라 교통이 매우 편리하게 되며 겸하여 연안읍과 해주읍에 교인 몇분이 이주하였음을 비롯하여 전도를 시작하게 되며 해주읍에는 임시성당까지 건축하고 축복하였으니 이와같이 좋은 기회를 주신 천주의 무한하신 인자와 사랑을 감사하오며 여러분의 충실한 기도와 원조로 이곳에 이주하는 교인들의 신앙이 굳으며 문자가 차차 많이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도리를 깨달아 이 교회가 날로 확잘될 것을 믿고 바라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