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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61개의 기록물
  • 원산 중정통 풍경
    1930년대 원산회엽서조합(元山繪葉書組合)에서 발행한 원산의 주요 상업가였던 중정통(仲町通り)의 시가지 풍경을 수록한 사진그림엽서이다. 넓은 중정통을 중심으로 양쪽에 목조 및 근대식 상점들이 연속하여 자리한 모습이 펼쳐져 있다. 도로를 따라 전신·전등주와 가공선이 길게 이어지고, 한복과 양장 차림의 인물들이 거리를 오가며 상점 앞에는 여러 종류의 간판과 상품이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의 비교적 규모가 큰 상업건물에는 三中井라는 상호가 확인되는데, 이는 조선 각지에서 오복점과 백화점을 운영했던 미나카이의 원산점이다. 미나카이는 1914년 원산에 지점을 개설하였으며, 이후 원산 중심 상업가의 주요 일본계 상업시설 가운데 하나로 자리하였다. 외부에는 봉투와 12매로 구성된 「조선 원산명소」 사진그림엽서 세트가 현존하며, 그 구성 가운데 元山銀座街仲町通り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당시 중정통이 원산의 대표적인 번화가, 이른바 ‘은좌가(銀座街)’로 소개·유통되었음을 보여준다. 현재 자료가 해당 완질과 동일한 세트인지 여부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지만, 도판번호가 부여된 원산회엽서조합의 명소엽서라는 점에서 동일 또는 인접한 판본군일 가능성이 있다. 원산은 1880년 개항 이후 일본인 거류지와 상업시설이 형성되면서 동해안의 대표적인 항구도시로 성장하였고, 중정·본정 등 일본식 정명 아래 상업가로가 발달하였다. 본 자료는 이러한 원산 중심 시가지의 거리 폭, 점포형태, 전신·전등시설, 인물과 상업간판을 함께 기록하여 식민지기 원산의 도시생활과 상업공간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전면에는 要塞司令部許可濟라는 군사적 허가표기가 확인된다. 원산 일대는 영흥만요새의 관할지역이었으며, 1930년대 자료에서는 실제로 원산부의 지도에 永興湾要塞司令部検閲済가 명시된 사례가 확인된다. 따라서 본 자료의 허가 역시 영흥만요새사령부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표기는 원산이 상업·관광도시인 동시에 항만과 해안방어시설을 포함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사진·지도 등의 시각자료가 군사적 검열 또는 허가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원산 #중정거리 #중정통 #삼중정오복점 #오복점 #양복점 #삼중정 #원산회엽서조합(元山繪葉書組合) #영흥만요새사령부(永興湾要塞司令部) #仲町通 #銀座街 #三中井 #미나카이 #永興湾要塞司令部
    생산일자 미상
  • 평양명승팔경(平壌名勝八景) - 평양기생학교의 그림 수업
    1930년대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에서 발행한 평양명승팔경 사진그림엽서 8매 중 평양기생학교의 그림 수업 모습이 담긴 자료이다. 한복을 입은 두 여성이 실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각각 넓은 종이를 펼쳐 놓은 채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두 사람 앞의 종이에는 먹을 사용한 회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종이 아래에는 검은색 받침 또는 깔개가 놓여 있다. 화면은 두 학생과 작업 중인 그림을 가까운 거리에서 크게 포착하여 이들의 복식이나 외모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두드러지도록 구성되어 있다.  사진그림엽서에서 ‘평양기생학교’로 소개된 기관은 1926년 평양에 설립된 기성기생양성소이다. 기성은 평양의 옛 이름으로, 기성기생양성소는 기성권번과 같은 건물에서 운영된 전문 기생교육기관이었다. 3년제로 운영된 교육과정에는 전통적인 가곡·시조·가사·무용뿐 아니라 조선어·일본어·산술·음악·창가와 함께 **서화(書畵)**가 포함되었으며, 1934년 확인되는 교육과정에서는 서화가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모든 학년의 교육과목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본 자료의 도상은 기생에게 요구되었던 예능 가운데 그림과 서예를 포함한 서화교육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기성기생양성소는 기존의 사적이고 비정형적인 기생교육과 달리 교육과정과 평가방식을 제도화한 근대적 전문교육기관이었다. 이곳의 졸업생 가운데에는 선우일선·왕수복처럼 전 조선에서 활동한 유명 예인도 있었으며, 전통 가무뿐 아니라 당대의 새로운 음악과 공연문화까지 교육하였다. 대정사진공예소 역시 학교 건물, 음악·무용·기타 교육장면 등 평양기생학교와 관련된 여러 사진그림엽서를 제작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듀크대학교 소장 자료에도 대정사진공예소가 제작한 기성기생양성소 사진그림엽서가 남아 있다.  동시에 본 자료는 이러한 교육활동을 단순한 학교 기록으로만 제시하지 않고 平壌名勝, 즉 ‘평양의 명승’이라는 틀 안에 편입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평양의 성문·누정·고적과 함께 기생학교와 그 학생들의 예능활동까지 관광객이 감상할 ‘평양의 볼거리’로 재구성한 것이다. 특히 일본어 표제는 이들을 彩筆にもその技豊かな妓生, 즉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으로 표현하며 교육을 받은 여성 예능인의 능력을 강조하는 동시에, 기생 자체를 평양의 지역적 명물로 소비하는 당시 관광출판물의 시각도 함께 보여준다. 따라서 본 사진그림엽서는 1920~1930년대 평양의 기생교육과 여성 예능교육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인 동시에, 그 교육과 학생들의 모습을 관광 이미지로 재구성하여 유통한 식민지기 사진그림엽서라는 두 가지 성격을 함께 지닌다.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 #다이쇼 #평양기생 #기생 #평양기생학교 #기생학교 #平壌妓生 #平壌妓生學校 #箕城妓生養成所 #箕城券番 #회화 #회화수업
    생산일자 미상
  • 평양명승팔경(平壌名勝八景) - 본정통에서 바라본 대화정의 풍경
    1930년대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에서 발행한 평양명승팔경 사진그림엽서 8매 중 평양 본정통(本町通)에서 대화정(大和町) 방향을 바라본 중심 상업가로의 경관을 수록하였다. 전면에는 넓게 정비된 도로 중앙에 복선으로 보이는 전차 궤도가 놓여 있고, 한 대의 노면전차가 도로를 따라 운행하고 있다. 도로 양편에는 자전거와 행인들이 오가며, 연속된 2~3층 규모의 근대식 상업건물과 각종 일본어 간판·광고물이 늘어서 있다. 오른쪽의 대형 건물에는 日本ペイント라는 세로 광고가 크게 부착되어 있고 주변에도 시계점 등 여러 상점의 간판이 확인된다. 전신·전등선과 가로등, 노면전차, 자전거, 근대식 상점건물이 한 화면에 함께 나타나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 평양 중심 시가지의 상업·교통환경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평양의 대화정은 일제강점기 평양 중심부의 대표적인 상업가로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다. 1930년대의 상업자료에서도 대화정에는 문상당·중촌서점·미나카이 지점 등 여러 일본계 상업시설이 소재한 것이 확인되며, 사진그림엽서 역시 대화정을 평양의 ‘번화한 거리’로 반복적으로 소개하였다. 대정사진공예소에서도 最も殷盛を極むる大和町라는 별도의 대화정 도판을 제작해 다른 평양명승 세트에 편성한 사례가 확인된다. 본 자료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노면전차이다. 평양의 전기전차는 1923년부터 운행되었으므로, 현재 도상의 촬영시기는 적어도 1923년 이후로 한정할 수 있다. 이후 전차는 평양의 주요 시가지를 연결하는 도시 교통수단으로 기능하였으며, 본 엽서에서는 전차와 복선 궤도를 화면 중앙에 배치하여 대화정의 근대적인 도시경관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전통적인 평양의 고적이나 자연명승을 수록한 다른 「평양명승팔경」 도판들과 달리, 상업가로와 노면전차, 근대식 건물, 광고간판으로 구성된 근대 도시 자체를 하나의 ‘평양명승’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대화정을 ‘번영한 거리’로 강조한 표제와 화면 구성은 식민지기 평양에서 새롭게 형성된 근대적 상업공간을 여행자가 감상할 도시명소로 재구성한 사진그림엽서의 성격을 보여준다.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 #다이쇼 #평양 #평양시가지 #시가지 #대화정 #야마토 #전차 #전선 #트램 #大和町 #本町通 #平壌市街 #日本ペイント #자전거 #일본페인트 #페인트 #시계방
    생산일자 미상
  • 평양명승팔경(平壌名勝八景) - 그림 같은 모란대의 경관
    1930년대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에서 발행한 평양명승팔경 사진그림엽서 8매 중 평양성 모란대의 경치를 바라보는 기생 모습이 담긴 자료이다. 전면에는 누정 또는 전망시설 내부의 굵은 기둥과 난간이 화면 왼쪽과 아래쪽을 크게 차지하고 있으며, 난간 앞에는 한복을 입은 두 여성이 서서 맞은편 모란대의 구릉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 중앙 원경에는 낮은 산봉우리 위에 작은 누정이 자리하고 있어, 인물의 시선과 원경의 누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두 여성은 뒷모습으로 배치되어 있어 특정 인물의 초상이라기보다 모란대의 경치를 감상하는 방문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평양의 모란대는 금수산 일대에 형성된 대표적인 명승지로, 을밀대·최승대·칠성문·현무문·청류정·전금문·영명사·부벽루·기자릉 등 여러 역사유적과 누정이 집중되어 있었다. 금수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모란봉을 중심으로 대동강과 평양 시가를 조망할 수 있어 일제강점기에도 평양 관광의 핵심 명소로 반복적으로 사진그림엽서화되었다. 본 자료는 특정 건축물의 정면 모습을 기록하는 일반적인 명승엽서와 달리, 누정 안에서 경관을 바라보는 두 여성의 뒷모습을 전경에 배치하고 그 너머로 모란대의 누정과 산세를 보여주는 구도를 취한다. 영문표제가 모란대의 모습을 AS LOOKING AS PAINTING, 즉 마치 그림처럼 보이는 경관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모란대를 역사유적의 집합체라기보다 감상해야 할 아름다운 풍경 자체로 연출하려는 관광적 시각이 두드러진다. 전면에는 B라는 계열표지가 확인된다. 동일한 B 표지는 현재 「평양명승팔경」에 수록된 대동문·기자릉·칠성문·을밀대 등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외부에서는 「大同江畔平壌牡丹台名勝集 B」라는 명칭의 대정사진공예소 계열 세트도 현존한다. 따라서 본 자료 역시 대정사진공예소가 보유하던 특정 B 계열 평양·모란대 명승 사진제판을 후대의 「평양명승팔경」 8매 세트에 다시 선별·편성하여 유통한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 #다이쇼 #평양성 #누정 #경치 #경관 #牡丹台 #모란봉 #금수산 #대동강
    생산일자 미상
  • 평양명승팔경(平壌名勝八景) - 을밀대
    1930년대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에서 발행한 평양명승팔경 사진그림엽서 8매 중 을밀대 모습이 담긴 자료이다. 높은 석축 위에 자리한 을밀대 누정이 화면 왼쪽과 중앙을 크게 차지하고 있다. 누정에는 乙密臺 현판이 걸려 있으며, 기와지붕과 개방된 누정의 기둥, 석축의 구조가 비교적 선명하게 나타난다. 누정과 성벽 주변에는 여러 명의 인물이 올라가 주변 경관을 바라보고 있으며, 화면 왼쪽 아래에는 석주와 쇠사슬로 구성된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오른쪽 성벽 부근에는 안내판으로 보이는 시설도 확인되어, 당시 을밀대가 평양의 역사유적이면서 방문객이 경관을 감상하는 관광명소로 정비·이용되고 있었던 모습을 보여준다. 을밀대는 평양성 내성의 북쪽 끝자락인 금수산 을밀봉에 자리한 누정으로, 현대 연구에서는 고구려가 평양성을 축성하던 6세기 중엽 북장대로 처음 조성된 것으로 본다. 현재 알려진 누정은 1714년 축대를 보수하면서 다시 세운 것으로, 사방이 탁 트여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는 뜻에서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불렸다. 을밀대 일대의 경관은 ‘을밀상춘’이라는 이름으로 평양팔경 가운데 하나로 꼽혀 오래전부터 평양의 대표적인 명승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본 사진그림엽서는 을밀대를 六百年前建造, 즉 ‘600년 전에 건조된 누정’으로 소개한다. 이는 현대에 확인되는 을밀대의 건축연혁과 일치하지 않는다. 고구려시대의 최초 조영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현재 형태의 누정은 1714년 재건된 것으로 파악되므로, 해당 문구는 정확한 건축연대를 전달한 설명이라기보다 을밀대의 고색창연함과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 관광출판물에서 사용한 역사서사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 자료는 을밀대의 건축적 모습을 정면에서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성벽 위에서 경치를 감상하는 방문객과 관람시설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을밀대를 ‘오래된 평양의 고적’이자 ‘전망을 즐기는 명승지’로 재구성하고 있다. 대정사진공예소는 동일한 을밀대 도판을 여러 종류의 평양 명승 세트에 반복 편성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서도 동일 영문표제 계열의 을밀대가 6매 및 16매 구성 자료에서 각각 확인된다. 따라서 현재 「평양명승팔경」의 을밀대 역시 기존 평양명승 사진제판을 새롭게 선별·재편성하여 판매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 #다이쇼 #평양성 #을밀대 #대동강 #평양 #평양명승 #금수산 #錦繍山 #乙密臺 #乙密賞春
    생산일자 미상
  • 평양명승팔경(平壌名勝八景) - 칠성문
    1930년대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에서 발행한 평양명승 사진그림엽서 8매 중 칠성문 모습이 담긴 자료이다. 석축 위에 세운 문루와 홍예식 통로를 갖춘 칠성문이 크게 나타난다. 문루에는 七星門 현판이 걸려 있으며, 좌우로 연결되는 성벽과 문 앞의 낮은 비탈길, 홍예문 아래와 안쪽의 인물들이 함께 보인다. 본 자료는 칠성문을 멀리서 조망한 전경이라기보다, 성문 자체의 구조와 위용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보여주는 구성이다. 성문 아래를 실제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모습이 함께 포함되어 있어, 평양의 고적이 일상적 통행 공간과 관광 공간을 겸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칠성문은 평양성 내성의 북문으로, 이름은 북두칠성에서 유래한다. 현대 연구에서는 그 기원을 고구려의 평양성 축성 시기인 6세기 중엽까지 소급하며, 오늘날 알려진 문루는 1712년에 개수된 것으로 본다. 또한 칠성문은 평양 6문의 하나이며, 모란대·을밀대·기자릉·현무문 등이 함께 있는 평양 북부 명승권의 중요한 관문이었다. 한편 본 자료에서 칠성문을 "500년 전 지어진 평양 6문 중 하나"라 지칭한다. 이는 당시 관광엽서가 평양의 성문을 역사적 권위와 고도(古都) 이미지 속에 배치해 소개하던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 연구에서는 칠성문의 기원을 그보다 훨씬 이른 고구려 시기로 본다. 따라서 이 문구는 칠성문의 정확한 창건 연대를 전달한 서술이라기보다, 당시 관광출판물에서 유통되던 역사인식을 반영한 표제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 자료는 현재 사용자가 소장한 「평양명승팔경」 세트 안에 포함되어 있으나, 외부 동일판과 다른 평양 명승 세트의 존재를 고려하면, 이 8매 세트만을 위해 새로 제작된 전용 도판이라기보다 기존 평양 명승 도판을 선별하여 다시 묶은 재편성 세트의 일부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좌하단의 B 기호 역시 같은 계통 판본군에 속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서로 기록할 만하다.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 #다이쇼 #평양명승 #평양성 #칠성문 #산성 #성곽 #도성 #고구려 #조선 #태종 #모란대 #牡丹台 #七星門 #平壌六門
    생산일자 미상
  • 평양명승팔경(平壌名勝八景) - 기자릉
    1930년대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에서 발행한 평양명승팔경 사진그림엽서 8매 중 기자릉의 모습을 수록한 자료이다. 잔디가 덮인 봉분을 중심으로 조성된 기자릉의 능역이 넓게 나타난다. 봉분 전면에는 箕子陵이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장방형 석상과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역 좌우에는 여러 기의 석수가 대칭적으로 놓여 있으며, 뒤쪽으로는 기와를 얹은 담장과 울창한 소나무가 능역을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도상은 일제강점기 당시 기자릉으로 관리·인식되던 묘역의 공간구성과 석물 배치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기자는 중국 은나라 말기의 인물로 전해지며, 후대에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기자동래설이 형성되었다. 평양의 기자묘는 이러한 전승에 따라 기자의 무덤으로 비정된 유적으로, 고려시대부터 기자를 기념하는 제향이 이루어지고 조선시대에도 숭배가 지속되면서 평양의 주요 역사유적으로 자리하였다. 그러나 현대 연구에서는 기자동래설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기 어렵다고 보며, 평양의 기자릉 역시 실제 기자의 무덤으로 입증된 유적이 아니라 후대의 역사인식과 전승에 따라 기자의 묘로 인식·조성된 장소로 파악한다. 본 사진그림엽서는 이러한 복잡한 역사적 성격보다 三千年の歴史を語る箕子の陵, 즉 ‘삼천 년의 역사를 말해주는 기자릉’이라는 표현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는 기자릉을 평양의 장구한 역사를 상징하는 고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여행자가 감상할 수 있는 대표적인 ‘평양명승’으로 의미화한 당시 관광출판물의 역사서사를 보여준다. 실제 일제강점기 관광안내에서도 기자릉은 대동문·연광정·모란대·을밀대·부벽루 등과 함께 평양의 대표 관광명소로 소개되었다. 또한 동일한 기자릉 도판 또는 동일 계열 판본은 대정사진공예소가 제작한 6매·15매·16매 등 서로 다른 평양 명승 세트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본 자료는 「평양명승팔경」만을 위해 새롭게 제작된 전용 도판이라기보다, 대정사진공예소가 보유한 평양 명승 사진제판을 여러 종류의 봉투와 세트에 선택·재편성하여 유통한 사례로 파악할 수 있다.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 #다이쇼 #기자릉 #기자조선 #조선 #고조선 #평양 #평양성 #箕子の陵 #와카야마 #大同江
    생산일자 미상
  • 평양명승팔경(平壌名勝八景) - 대동문
    1930년대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에서 발행한 평양명승팔경 사진그림엽서 8매 중 대동문 모습이 담긴 자료이다. 대동강변에 위치한 평양성 내성의 동문인 대동문(大同門)과 주변 강변 경관을 수록하였다. 엽서 전면 상단에는 영문으로 THE DAIDO-GATE BUILT BY THE EMPEROR TAISO 500 YEARS AGO, HEIJO., 일본어로 (平壌名勝)五百年前大宗の建立せられし大同門이라는 설명이 인쇄되어 있다. 동일한 영문표제의 판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사진그림엽서 자료에서도 대정사진공예소 제작 자료로 확인된다. 전면에는 대동문의 높은 석축과 그 위에 세워진 2층 문루가 화면 중앙에 크게 배치되어 있으며, 문루 중앙에는 大同門 현판이 확인된다. 문 아래로는 대동강변의 석축과 수변 공간이 이어지고, 화면 왼쪽에는 포대와 짐꾸러미 형태의 물품들이 다량으로 쌓여 있으며 여러 인물이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동강 수면에는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고 오른쪽 하단에는 차양을 갖춘 선박도 일부 나타나, 대동문 주변이 단순한 역사유적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강을 통한 이동과 물자 취급, 주민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음을 보여준다.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처음 건립된 시기는 6세기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중수·재건되었으며, 오늘날 남아 있는 형태 역시 조선시대의 재건과 보수를 거친 것이다. 대동문은 대동강 남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했으며 문 밖에는 나루터가 있어 사람과 물자가 대동강을 건너는 주요 지점으로 기능하였다. 한편 본 사진그림엽서의 설명문은 대동문을 五百年前大宗の建立, 영문으로는 BUILT BY THE EMPEROR TAISO 500 YEARS AGO라고 소개한다. 이는 당시 일본계 관광안내에서 대동문을 약 500년 전 조선 태종이 건립한 것으로 설명하던 서술과 연결되지만, 현대 연구에서는 대동문의 연원을 고구려시대까지 소급하고 이후 여러 차례 중수·재건된 것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본 자료의 문구는 대동문의 실제 건축연혁을 정확하게 전달한 설명이라기보다 당시 관광출판물에서 유통되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표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 자료는 대동문 자체뿐 아니라 성문 아래의 대동강과 선박, 강변의 인물과 물품까지 넓게 화면에 포함시킴으로써 대동문을 평양의 역사유적이면서 동시에 대동강의 생활경관과 결합된 대표적 명승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대정사진공예소는 동일한 대동문을 서로 다른 구도와 설명문으로 여러 차례 사진그림엽서화하였으며, 현재 도판 역시 다른 평양 명승 묶음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본 자료는 기존 평양 명승 사진제판을 여러 종류의 세트에 선택·재편성하여 유통한 대정사진공예소의 제작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 #다이쇼 #대동문 #평양성 #평양명승 #平壌名勝八景 #大同門 #대동강 #태종 #이방원 #읍호루 #挹灝樓
    생산일자 미상
  • 평양명승팔경(平壌名勝八景) - 대동강변 연광정과 종각
    1930년대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에서 발행한 평양명승팔경 사진그림엽서 8매 중 대동강변 연광정과 종각 모습이 담긴 자료이다. 왼쪽에는 대동강 쪽으로 돌출한 높은 석축과 성벽 위의 연광정 일대가 크게 배치되어 있으며, 성벽 아래로는 바위가 드러난 강변이 이어진다. 화면 왼쪽 아래 물가에서는 여러 인물이 빨래를 하고 있고, 오른쪽 대동강 위에는 돛 또는 깃발을 단 작은 배가 떠 있다. 강 건너편으로는 낮은 구릉과 평야가 길게 펼쳐져 있어, 역사적 누정과 성곽뿐 아니라 대동강변 주민들의 생활 모습과 수상교통까지 한 화면에 담고 있다. 연광정은 평양 대동강변 덕암 일대에 자리한 누정으로, 고려시대인 1111년 산수정이라는 이름으로 누정을 다시 세운 뒤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대동강을 내려다보는 뛰어난 경관으로 관서팔경 가운데 하나로 꼽혀왔다. 인근의 종각에는 1726년 주조된 평양종이 걸려 있었으며, 현재의 종각은 1827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전면의 별도 설명문은 이곳을 文禄の役に小西行長と明の使節沈惟敬と和を媾せし所, 즉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사절 심유경이 화의를 논한 장소로 소개하고 있다. 연광정이 임진왜란기의 강화담판과 관련된 장소로 전승되어 온 것은 확인되지만, 현대 연구에서는 심유경과 고니시의 1592년 초기 강화회담이 평양 북쪽 강복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따라서 해당 내용은 본 사진그림엽서가 연광정에 부여한 역사적 설명과 관광서사로 기록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 자료는 연광정과 종각이라는 역사유적만을 고립시켜 보여주지 않고, 성벽·대동강·강가에서 빨래하는 인물·배·원경의 산지를 함께 구성하여 평양의 역사성과 일상생활, 자연경관을 하나의 ‘명승’ 이미지로 재구성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기의 강화담판이라는 역사적 일화를 일본어와 영어로 병기함으로써, 대동강변의 경관을 여행자가 감상할 수 있는 역사적 관광명소로 의미화하여 유통한 사진그림엽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동일 도판은 대정사진공예소의 14매 평양명승 계열과 교토대학 소장 「最も新しき平壌名勝絵葉書」에도 확인된다. 따라서 본 자료는 특정 8매 세트를 위해 새로 제작된 단독 도판이라기보다, 대정사진공예소가 보유한 평양 명승 도판을 여러 종류의 세트에 선택·재편성하여 판매한 사례로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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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전경 02
    1910년대 초반 공주야기사진관(公州野崎寫眞館)에서 발행한 마산만 전경이 담긴 사진그림엽서이다. 제목·판형·조판이 일치하고 其二라는 연속번호가 부여되어 있어, 공주 야기사진관에서 제작한 마산 전경 연속도판 가운데 제2도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전면에는 고지대에서 내려다본 마산의 해안 시가지와 마산만이 넓게 펼쳐져 있다. 화면 아래에는 기와지붕을 중심으로 한 건물들이 해안 가까이까지 밀집해 있으며, 오른쪽 해안에는 여러 척의 선박과 돛대, 접안시설로 보이는 구조물이 확인된다. 만 안쪽에는 소형 선박들이 떠 있고, 바다 건너에는 크고 작은 섬과 산지가 연속적으로 나타나 당시 마산만의 폐쇄적인 내만 지형과 도시·항만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마산은 1899년 개항한 뒤 일본인 거류지와 각종 상업·행정시설이 들어서면서 기존 마산포와 신마산이 함께 성장한 근대 항구도시였다. 특히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마산선이 개통되고 일본인 거류지역이 확대되면서 1910년대에는 항만과 철도, 상업시설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빠르게 확장되고 있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 관보에도 馬山港及行巖灣貿易狀況이 별도로 보고될 정도로 마산항은 남해안의 주요 무역항으로 기능하였다. 지역의 옛 전경자료에서는 1910년경부터 1920년대 초반 사이의 마산 시가지를 조망한 사진에서 돝섬과 이시미곶, 마산만 건너편 산지가 주요 지형요소로 확인된다. 본 자료 역시 해안 시가지뿐 아니라 마산만과 주변 도서를 화면의 절반 이상에 배치함으로써 항구도시 마산의 입지와 자연지형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다만 현재 도상만으로 화면에 나타난 개별 섬과 해안지형의 명칭을 모두 확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특정 시설이나 명승 한 곳을 소개하기보다 마산의 시가지와 항구, 바다와 섬을 하나의 넓은 조망 속에 수록하여 도시 전체를 시각화하였다. 其一과 其二로 이어지는 번호체계는 야기사진관이 한 도시의 전경을 여러 도판으로 분할·연속하여 보여주는 방식으로 제작했음을 시사한다. 동일 발행처가 경성 전경을 其一부터 其四까지 번호화한 사례도 확인되므로, 본 자료 역시 도시의 전체 경관을 연속도판으로 구성하려 한 전경 사진그림엽서 계열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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