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일보에 실린 판징이 선생의 글과 상세한 이야기

아래는 중국의 《인민일보에 실린 판징이 선생의 '초목의 탄식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라는 글에 얽힌 상세한 이야기로 <신문전선>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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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앞의 소나무 탄식하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200679, 베이징에서 가장 무더운 계절이었다. 갑자기 성범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싶으니 바로 화교반점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내가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아무런 수인사도 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는 어제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천안문 앞을 지나다가 소나무들이 하나같이 앓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오후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한 시간 정도 천안문 주위를 돌아보았습니다.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야 이 나무들이 생리조절이 되지 않아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혹시 나무도 탄식을 하고 고통을 호소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그런 말을 처음 듣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무도 사람과 똑같은 생명체입니다. 건강한 나무는 웃을줄 알지요. 하지만 이 나무들은 모두 탄식을 하고 있답니다. 고통을 호소하며 울고 있어요. 한시라도 빨리 구하지 않으면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성범영은 몹시 흥분해 있었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그 나무가 자기 자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심한 부모는 모두 자기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배가 고픈지, 아픈지, 추운지, 더운지를 압니다. 저 나무들이 병에 걸린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몸에 휘감은 색색의 조명등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나무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잠을 자야 합니다. 사람은 잘 때 불을 끄고, 주변 환경이 조용해야 잠이 잘 옵니다. 밤새도록 불빛에 노출되면 불면증에 걸리게 되지요. 생각해보십시오. 밤새도록 전등불의 빛을 견디고, 화기를 견디다 보면 대사 기능에 문제가 오지 않겠습니까
성범영은 도시 관리 부서에 이 일을 시정하고 긴급조치를 강구하는 글을 써서 발표하라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는 몹시 난감했다. 첫째, 국내외의 주목을 받는 천안문에 관한 일이니 어찌 경솔하게 글을 쓸 수 있으며, 둘째, 성범영의 진단이 정확한지 여부에 대해 아무런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셋째, 설사 내가 그의 말을 수긍해 글을 쓴다고 해도 어느 매체에 감히 발표를 할 것인가. 어느 매체에서도 감히 발표해줄 수 없을 것이다. 성범영은 나의 표정을 살피더니 더 이상 강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점심식사는 그 누구도 맛있게 먹지 못했다. 서로 은근히 속만 앓았을 뿐이다.
세상에는 간혹 묘한 일이 있는 법이다. 712일 밤, 나는 당일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북경만보의 한쪽 구석에 이런 단신기사가 실려 있었다. ‘천안문 구역의 소나무 163그루 갱신이라는 제목이었는데, 그 기사와 더불어 야간시공을 하는 사진까지 곁들어 있었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근 광장의 인도에 심은 소나무의 생장조건이 불량해 소나무가 날로 쇠약해질 뿐만 아니라 일부는 병사하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해당 부서에서는 11일 밤부터 소나무들 사이에 깔았던 화강암을 제거하고 토양으로 바꾸었으며, 소나무 주변의 통풍 면적을 넓히는 등의 갱신조치를
취했다성범영은 나에게 해당 부서에서 이런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이 글을 아주 기쁘게 읽었다. 성범영은 그야말로 나무 귀신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곧바로 펜을 들어 초목의 탄식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라는 글을 썼다. 천안문 소나무 갱신 사건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다음 날 일부러 차를 타고 천안문으로 갔다. 천안문 구역의 나무들은 과연 모두 갱신되어 있었다. 아직도 일부 노동자들의 마무리 작업이 끝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운전기사인 쑈루에게 말했다. “내 눈으로 사실을 확인했네. 쑈루가 앞으로 이 일을 증명해주게!”
이렇게 해서 내가 쓴 글은 인민일보논설부 부주임 루씬닝에게 전달되었고, 그다음 날 인민논단에 게재되었다. 이 글은 아무런 논평도 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쓰는 기법으로 취했다. 다만 결론 부분에서 성범영이 말해준 도리는 기타의 영역에 대해서도 깊은 사고를 불러일으킬 것이다.”라고 씀으로써 독자들에게 사색의 여운을 남겨주었다.
아마도 이 글의 최초 독자는 남진중(신화통신사 사장) 동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초목의 탄식을 가장 먼저 느낀 독자였을 것이다.
성범영 선생과의 만남으로부터 초목의 탄식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글을 발표하기까지 어느덧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글은 이처럼 우연히 쓰게 되었지만 그 과정, 즉 취재대상과의 만남, 서로를 알게 되고 서로 통하게 된 과정이 중요하다. 서로를 알고 서로와 통하게 된 유대(혹은 다리라고 할 수 있다)는 바로 문화였다.
우리는 평소에 뉴스 취재에 대해 말할 때마다 기자가 취재 상대와 마음을 나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소통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혹자는 상대방의 경력이거나 기호에 대해 알게 되면 서로 마음을 나누게 된다고 한다. 혹자는 상대방의 가족이거나 친구 혹은 상대가 쓴 저서를 화제로 삼다가 서로 마음을 나누게 된다고 한다. 물론 모두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왠지 급급히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며, 결국은 기사를 쓰기 위해 매래를 하는 느낌이 든다.
상대방의 문화에 대한 동질감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교류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문화에 대한 교류는 국가, 시공, 심지어 의식 형태의 장애도 초월할 수 있다. 성범영과의 교류는 병매관기를 통해 영혼의 공감대가 형성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러므로 기자의 종합적인 문화적 자질이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자질을 갖추지 못하면 이상적인 취재 상대를 만난다 할지라도 할 말이 없거나, 이야기를 이어나가지 못해 취재에 실패하게 된다.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60여 년 전에 병매관기를 읽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그랬다면 생각하는 정원을 떠나기 전의 그 짧은 한 마디가 이끌어낸 십여 년간의 긴 이야기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기적인 색채가 짙은 뉴스 이야기
 
2006720일 아침 7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신화사 총편집장 남진중 동지가 전화를 걸어왔다. 남진중 동지는 오랜 친구지만 평소에는 좀처럼 통화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무슨 일로 이처럼 이른 시간에 전화를 한 것일까? 나는 적잖이 긴장했다.
남진중 동지는 성격이 몹시 차분한 사람인데 그날은 왠지 조금 들뜬 어조였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방금 오늘자 인민일보를 봤는데, 자네가 쓴 글을 읽고 몹시 기뻤네. ‘초목의 탄식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글인데 내가 오랫동안 풀고 싶었던 문제를 설명했더군.”
몇 년 전부터 나는 우리 신문이 통신사 뉴스 평론의 특색과 법칙을 잘 모색하기를 바란다고 강조해 왔었네. 대내적으로는 뉴스평론이 사실을 말하고, 사실 속에 천리를 담아 말하고, 전반적인 국면을 염두에 두고 말하며, 심금을 울리게 말할 것과 대외적으로는 이 네 가지 외에도 반응이 민첩하고, 현실성이 강해야 한다는 두 가지 조건을 덧붙였네. 이 여섯 가지 조건 중에 다섯 가지는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어서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을 걸세. 하지만 여섯 번째 조건인 심금을 울려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실천하기도 쉽지 않네. 또 실제 작업에서 그 경험이 많이 누적되어 있지 않다네. 하지만 오늘 자네의 글은 나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네. 글은 길지 않지만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해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네. 심금을 울린 글이라 할 수 있지. 나는 이 글을 신문사의 동지들에게 추천해서 읽도록 하겠네. 모두 계속 탐구해서 뉴스평론의 가독성과 흡인력을 부단히 제고하기를 바라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나는 이처럼 작은 수필식의 논평이 남진중 동지에게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나친 총애를 받은 듯한 느낌이 들어 감사하다는 말만 수차례 했을 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며칠 후 신화사 총편집실에서 뉴스일지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그 속에는 나의 글을 읽으라는 남진중 동지의 지시가 적혀 있었다. 그 외에도 뉴스논평에 종사하는 각 편집자 동지들이 남진중 동지의 지시에 근거해 계속 탐구하고 있다는 글들이 적혀 있었다. 나중에 나는 신화사 사람들로부터 해당 부문에서 내 글을 진지하게 토론했으며, 내 글에 대한 감동 수기를 적은 사람도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야말로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신화사 동지들은 이 글에 대해 열정적인 탐구를 했다고 하지만, 이 글이 발표되기까지 11년 동안 발생한 특별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판징이. 인민일보전 총편집장, 청화대학 언론대학원장)
(<신문전선>, 2007.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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