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후예들
*영상자료: 독일통일 그후 5년 (제1부. 루터의 후예들) *촬영연도: 1993년 *자료연대: 1990년대 *수집기관: 기록콘텐츠연구소 *자료주제: 동독과 서독이 통일된 지 5년이 된 시점에서 살펴 본 통일 독일의 현주소 *사업개요: 기 수집한 자료를 구술아카이브 형식에 맞추어 정리함 *소개의 글: 독일통일 영상자료는 동서독의 통합 과정에서 빚어진 다양한 내용들을 독일 현지 취재를 통해 실증적 자료를 수집한 것임 *키워드: 독일통일, 동독교회 [대본 전체 보기] 독일통일 그후 5년 제1부. 루터의 후예들 [프롤로그] *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 * 월요 기도회 독일 통일의 횃불을 당겼던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기도회! 독일 통일 5년이 지난 오늘도 독일의 아픔을 넘어 지구촌 가족들의 고통과 함께하고 있다. 오늘의 주제는 가난문제 해결과 세계평화! 국제사면위원회와 공동으로 인도네시아 소수민족의 인권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현장음) * 국제사면위원회 회원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인들은 인권보장을 받고 있지 못합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티모르인의 인권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월요 기도회는 동서독 통합 문제 이외에도 아프리카 빈곤 문제와 소수민족 등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지난 89년 수만명이 모여 민주화 시위를 벌였던 때와는 달리 요즘 기도회의 참석자는 백명을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월요기도회는 지금도 지구촌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인터뷰) -왜 월요기도회에 참석하십니까? * 기도회 참석 신도 통일이후에는 동독지역이 많이 달라지고 나아질것을 기대했는데 변화된 것이 없어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 퓌어너 목사 평화를 위한 기도는 통일 뒤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걸프전을 계기로 전쟁이 정치적인수단으로 다시 강화되기 시작했죠. 군사문제가 바로 우리들 코 앞에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 그리고 지구 환경을보전한다는 차원에서 함께 생각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아픔을 나누면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 대규모 월요 시위 -1989. 9. 13- 89년 9월 13일 시작된 월요 기도회! * 민주화 촛불시위 -1989. 10. 9- 26일이 지난 10월 9일에는 촛불시위로 이어진다.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동독 민주화와 개혁을 소리 높이 외쳤다. 동독경찰의 탄압에도 시위의 물결은 들불처럼 동독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 베를린 장벽 붕괴 - 1989. 11.9 - 세계 매스컴의 초점이 됐고 촛불 시위는 드디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다. * 독일 통일 -1990. 10. 3- * 비텐베르크 궁전교회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는 민주화 시위가 가장 격렬했던 곳이었다. 비텐베르크 민주화 시위의 주역은 질소공장 전 노조위원장 에리히 박사! 거대한 로마 교황청에 대항해 신앙의 자유를 쟁취했던 루터의 전통이 90년 비텐베르크 시민들에게 자유와 통일을 안겨다 주었다. 1592년 루터는 궁전교회 신학대학 정문에 신앙의 자유를 외치며 95개조의 종교개혁을 위한 반박문을 내걸었다. * 마틴 루터 (1483-1546) 루터는 종교개혁 동지인 멜란히톤과 함께 로마 교황청과의 힘겨운 싸움을 계속했다 루터와 멜란히톤은 죽은 후 그들의 정렬이 배인 이 교회안에 나란히 묻혔다. (인터뷰) * 에리히 박사, 독일 민주화 시위 지도자 루터는 이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자유사상을 주창했습니다. 루터의 개혁사상은 통일을 앞둔 비텐베르크 시민들의 평화 시위에 밀거름이 됐고 정신적인 기반이 됐습니다. 루터의 고향 비텐베르그 곳곳에는 루터 기념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 루터 박물관 동독정권은 68년 사회주의 신헌법에 따라 종교를 억압했지만 교회에 대해서만은 관대한 정책을 폈다 *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반박문 역사적 전통을 가진 교회를 탄압할 경우 전체 인구 30%에 이르는 기독교 신도들의 반발 예상과 서독교회에서 보내오는 막대한 지원금에 대한 영향등이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죄문제를 해결받던 암울한 시대에 믿음을 통한 구원과 사회개혁, 정의를 부르짖었던 루터처럼 동독교회는 서서히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새벽을 여는 민주화의 요람으로 자리 잡아갔다. * 성 마리아 교회 선각자 루터는 성 마리아 교회에서 종교개혁이 왜 필요한지를 강조하면서 개혁의 선두에 나선다. 사람은 누구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고 신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루터의 사상은 독일의 유명한 화가 크라나흐를 통해 원탁의 최후의 만찬으로 그려져 오늘날 까지 길이 전해 내려온다 루터의 개혁의지는 89년 10월 비텐베르크 시민들의 가슴 가슴 속으로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퍼져나갔다. (인터뷰) * 에리히 박사, 독일 민주화 시위 지도자 89년 10월부터 매주 화요일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모일 때마다 사람들이 늘어나 3천명을 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거의 가득 찰 정도였고 교회에 들어 오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 문앞에 설치된 스피커로 함께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비텐베르크 시내 한복판 허름한 수도원 건물에 초췌한 차림의 사람들의 발 길이 이어지고 있다. * 걸인을 위한 급식소 작년 9월부터 성 마리아 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부랑아 급식소는 일자리를 잃고 떠도는 걸인들을 위한 식당이다. 급식소를 찾는 사람은 하루 평균 삼 사십명 선! 아침에는 기름빵과 커피가 무료로 나오고 점심엔 우리 돈으로 5백원을 받는다. 걸인들에게도 최소한의 자존심을 세워 주기위한 조치였다. 성 마리아 교회 장로인 뢰버씨도 민주화 시위를 이끈 주역 가운데 한명이었다. 질소공장 노조위원장이던 뢰버 장로는 통일이후 직장에서 해고되자 아예 사회활동가로 나섰다. 민주화 시위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통일 이후에는 소외받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또다른 통일 독일의 숙제들을 풀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터뷰) *뢰버 장로, 독일 민주화 시위 지도자 통일에 기여한 우리가 통일 뒤의 사회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서독은 잘 살고 동독지역은 못사는 그런 독일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잘 살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정의가 실현될 때 또다른 문제가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번 총선거에서 나타났듯이 많은 동독출신 사람들은 지금의 다양한 제도와 체제에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 무의탁 노인 보호소 뢰버 장로는 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무의탁 노인보호소 책임자다 노인보호소는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을 치료해 주고 돌보는 사회복지 단체다 시민들로부터 쓸만한 옷가지들을 모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데 옷을 가져가는 사람들은 우리 돈으로 5백원 이상 능력껏 내면 된다. * 노인 전용 아파트 보호소가 지정한 노인전용 아파트를 찾는 것도 뢰버 장로의 주요한 일과다. 간호사와 함께 노인들의 건강상태를 점검하고 상담원 역할을 한다 통일 이후 동독 실업자는 2백만명에 육박했다 옛 동독주민들은 실업과 경제적 격차로 패배의식에 빠져 있다. 사회복지 혜택도 대폭 줄어들고 무의탁 노인과 부랑아 문제는 서독법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민주화 주역들과 동독교회가 동독 주민의 소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올해 아흔 한살인 이 할머니도 노인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한다. (인터뷰) *노인아파트 거주자 딸이 하나 있었는데 죽었어요. 남편도 죽고요 저기 사진이 내 딸이죠남편은 철도역에서 일했어요. 동독 국가철도였는데 52년 동안 일했어요. - 통일 이후 생활은 좋아졌습니까? 글쎄요. 옛날엔 집도 컸고 돈도 많았지만 그때는 남편이 돈을 벌어와서 그랬는데 지금은 좀 그러내요 사는게 다 그렇죠 뭐. *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니콜라이 교회의 마기리우스 목사는 라이프치히 월요시위를 이끌었던 민주화 운동의 기수였다. 마기리우스 목사는 통일 이후 독일교회의 상징 인물이 됐고 교계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추앙받는다 (인터뷰) - 독일 통일 후 교회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마기리우스 목사, 니콜라이 교회 통일 이후에도 같은 임무를 수행합니다 어느 사회나 있기 마련인 문제와 긴장관계를 인식시키는 역할이죠 우리는 독일이 하나로 통일된 것을 천만 다행으로 여기고 있지만 과거 공산당 정권 때와는 또 다른 문제들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는 정의와 인권이 존중되는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 민주화 시위의 주역들은 지금어떤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현실에 실망해 그냥 지내는 분들도 있지만 민주적인 공동체 형성에책임을 다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기리우스 목사의 생활은 통일 이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목회활동에 열심인 목사는 교회 일이 끝나면 가정의 평범한 가장으로 돌아 온다 오늘은 멀리 서독지역의 울름에서 사촌동생이 놀러 왔는데 시집간 외동딸도 외손녀와 함께 들렀다. 달라진 것이라면 통일 이후 유명해졌다는 것과 서독 사는 사촌이 자유롭게 놀러 오게됐다는 점이다. [에필로그] 통일의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역사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민주화 시위의 주역들 그들 가운데는 대중 정치인으로 변신한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업으로 돌아와 통일의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의 노력은 통일독일이 초기의 혼란에서 벗어나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가는데 소중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루터의 후예들은 오늘도 동독과 서독 두 지역에서 살아오면서 쌓여진 두터운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제2의 통일 운동을 위해 끊임없이 뛰고 있다. 취재 : 강철원 홍성보, 촬영 : 조성룡 제작 : YTN , 1994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