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한 술
이야기 한 상
오래된 사진 보존하기
아카이빙은 이런 맛으로 하는 거지 오래된 사진 보존하기  정환동 가족의 1950~70년대 포토 앨범 일단 스캔이 끝난 사진 기록들은 윈래 들어 있던 앨범에 원래의 질서 그대로 넣어두었습니다. 그런데, 스캔하다보니 부식되고 눌러붙은 사진이 꽤 많더라구요. 또 앨범에 보관된 게 아닌 낱장의 사진들은 그냥 종이 봉투에 넣어두면 상할 것 같고... 역시 어디에선가 보고 배운 건 있는 이 초짜 아키비스트는 단기노동자로 대학기록관에 근무하던 시절 만져 보았던 사진보존 필름이 떠올랐습니다. 선배님께 여쭈어 보니 "아카이브코리아"라는 기록물 보존용품 전문점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기본에 충실한 아카이브 보존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여느 날처럼 아카이빙 뽐뿌가 샘솟았던 오후에 말이죠.  1. 사진의 원래 보관상태 앨범의 사진들은 통기가 잘 되는 얇은 에코백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무덥고 습한 여름날에도 사진들에 크게 손상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앨범이 세로로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주의깊게 꺼내지 않으면 접착력이 떨어진 비닐면이 줄줄 새어 떨어져 나오기 일쑤였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시듯이, 인화된 흑백사진들은 저마다 겹쳐져서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들도 있었죠. 또 곰팡이 같은 징그러운 것들도 많이 붙어 있었어요.   2. 사진의 규격 정량화 아카이브코리아를 찾아보니 사진 사이즈별로 다양한 사진보존필름 내지가 있어서, 지금 가지고 있는 사진들의 규격을 어느 정도 정량화하기로 했습니다. 사진의 가로와 세로를 센티미터로 재고 비슷한 크기의 사진들을 모아 수량을 체크했어요. 이렇게 만든 목록을 엑셀 파일에 옮기고, 사진보존필름 품목별 규격과 맞추는 작업을 했죠.    3. 보존용품 주문 가격대가 꽤 나갔지만 앞으로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 보존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투자라고 생각하고 질렀습니다. 사진보존필름 4종과 내지 50장이 들어가는 중성보존상자를 구매했는데요, 13만원이 넘는 가격에 손발이 떨렸습니다. 부디 헛되게 쓰는 돈이 아니어야 할텐데, 사진 크기가 맞지 않으면 어떡하지? 배송은 하루만에 왔습니다. 주문을 전날 오전에 했는데 1시간도 안되어 발송완료 처리 문자가 오더군요.   4. 사진기록물을 필름에 배치 최대한 원래 앨범에 있었던 순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작은 사진들이 많았는데 빈 공간이 아까워 한 포켓에 두 장을 넣은 것도 있어요. 앨범 없이 낱장으로 있던 사진들은 최대한 시간 순서대로 넣었습니다. 부식 방지 처리를 하지 않은 게 흠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큰 작업을 하기엔 부담이 컸어요. 그래도 이 필름들은 보존을 목적으로 특수 원재료를 써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단은 안심입니다. 필름은 맨들맨들하고 부드러운 재질이지만 적당히 탄탄해 사진 인화지를 잘 받쳐주고, 녹아서 달라붙지 않도록 코팅이 되어 있습니다.      보통 실물 기록물을 정리하게 되면 아카이브에 등록된 등록번호를 라벨링해주어 나중에 찾기 편하게 하는 게 정석인데요. 이 작업을 할지는 아직 고민 중입니다. 중성 라벨지도 구입해야 하고, 작업이 많아 부담스럽기보다는 이렇게 적은 양의 사진에 꼭 필요한 작업인지 재어보는 중입니다. 어쨌거나 걱정거리 하나는 덜었습니다. 눕혀서 보관하니 사진도 쏟아지지 않고, 펼칠 때마다 떨어지던 70년 된 부스러기를 더이상 치우지 않아도 되니까요. 무엇보다도 사진들이 더이상 손상되지 않도록 잘 보관해두니 안심이기도 하고 뿌듯합니다. 아무리 목록을 잘 작성해둔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이 정리된 상태 그 자체가 바로 아카이빙의 참맛이 아닐까요?(으쓱으쓱) ⓒ 정혜지
  • 구술사 과제물
    다섯숟가락 아카이브 운영자의 대학교 전공은 역사학이었습니다. 실은 역사학 그 자체를 더 심도 있게 배우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래저래 살면서 가족 아카이브를 운영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네요. 하지만 10년 전의 그 역사학도는, 구술사라는 새로운 방법론에 푹 빠져 있던 꿈많은 20대였죠. 그 열정적이던 어느 날의 과제물을 낡은 하드드라이브에서 발견했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역사문화학과에서는 문화콘텐츠의 학문적 개념을 막 학과 커리큘럼에 넣고 있던 과도기였습니다.(적어도 저는 그렇게 평가하고 싶네요.) 학부생 마지막 학기던 4학년 2학기에는 '한국근현대역사문화기행'이라는 재미있는 수업에도 참여했었는데요. 근현대 민중생활사에 대한 도서를 읽고 발제하고, 또 근현대 울산지역의 옛 마을 흔적을 답사하고 구술채록활동을 직접 해 보는 등, 지금이야 흔하지만 당시에는 생소했던 문화활동을 진행했습니다. 이 수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바로 과제 하던 일이었는데요. 어느 누구나 과제가 뭐가 재밌느냐고 되물으시겠지만 전 진심으로 즐겼던, 그리고 개인의 역사와 인생을 달리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과제였습니다. 기말을 한 달 정도 남겨놓은 때 받은 과제는 "자신의 주변 인물을 대상으로 구술사 아카이빙 하기"였습니다. 이왕이면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로요. 수업시간에 배운 방법론대로 그들의 인생사를 구술채록하고 스토리텔링 콘텐츠까지 만드는 수업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서투른 연습이었지만, 기록학에 입문하게 만들어준 소중한 경험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작성한 과제물의 목록입니다. 1. 구술 아카이빙 과정 개요서 2. 이수자씨(구술자) 구술 아카이브 질문목록 3. 보고서 작성을 위해 필요한 과정을 정리한 목록 4. 한국근현대역사문화기행 보고서 안타깝게도 할머니의 음성을 녹음한 파일 두 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네이버 MY BOX(구 N드라이브)를 아무리 찾아봐도, 흑역사 사진만 잔뜩 들어있을 뿐이네요. 정말이지 아쉽습니다.  각설하고, 제가 쓴 이 보고서의 타임라인을 설명해드릴게요. 교수님께서 지도해주셨던 구술 "아카이빙" 과정은, 1) 인적사항 조사 2) 면담일정 확인 3) 면담 및 녹취 4) 녹취내용 정리 및 주제 선정 5) 스토리텔링 보고서 정리 였습니다. 그 결과물은 아래와 같아요.    까만 ‘모나미’ 붓펜이 휘휘 움직인다. 천수경을 써내려가는 이수자 할머니의 눈길은 관음보살처럼 잔잔했다. 이리저리 적은 한자들은 획수도 참 다양하다. 어려울 법도 한데, 범어사 전(前) 신도 회장답게 그는 원문을 보지 않아도 척척 쓴다. 일과가 끝나기 직전 매일 오후 8시에 할머니는 각종 불교 경전을 두고 붓글씨 연습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잊어버리고 읽지 못할까봐 공책에 매일 적어둔 반야심경과 금강경은 책장 한 칸을 빼곡히 채웠다. “나이 들어서리 불경 한 자 못 읽으면 스님 볼 낯도 없지. 할매가 어데 가가 무식하다 소리 듣기 싫어 매일 적은 기 저렇게 됐더라. 우찌우찌 붓펜도 사고, 너거 쓰고 남은 공책에 적고, 신문지에 적고, 길바닥에 노나 주는 노트에 적고. 그 덕분에 스님더러 물어볼랑교 하면 잘 맞춘다.” 이수자 할머니는 1941년 겨울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위로 오빠들이 둘,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몸뻬에 게다신고 ‘이치 니 산 시(1, 2, 3, 4)’를 외우던 시절이었다. 마당바닥에 숫자를 적고 입으로 오물오물 외우는 것이 그에게는 신나는 일이었다. 갓 말을 배운 3살짜리 꼬마아이는 어머니 어깨 너머로 배운 일본어를 자랑하러 다녔다. “왜놈 순경이 와가 이치 니 해보라 카데. 내사 좋다고 곤니찌와 곤방와 해샇고 하면 깔깔 웃어 사. 그때가 우예 생각나는지 나는 칭찬 받는 게 그렇게 좋았어. 그리하면 이쁘다고 하하 웃고 머리 이래 만져주고. 난제 생각해보니 얼마나 우습든지. 왜놈 칭찬 받는 기 뭐가 그리 좋다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수자 할머니와 큰댁을 비롯한 대가족은 피난길에 올랐다. 10살 되던 해였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강을 건넜다. 장마철 불어난 낙동강은 그에게 충격적인 인상을 남겼다. 인천상륙작전 소식이 들리고 대가족은 문경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본가는 우물을 사이에 두고 큰댁, 할머니네, 삼촌네 3채가 붙어있는 큰 집이었다. 굽이치는 문경새재를 넘어온 빨치산들은 점촌 큰 집에 자리 잡았다. 어린 할머니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한글을 배우고, 공산당 가요도 배웠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하이칼라였다. 그는 부유한 집 차남으로 태어나 갖은 멋을 부리며 살았다. 사실 그는 가정에 관심이 없었다. 북 치고 술 마시는 게 좋아 외지에서 생활했으며 첩도 자주 들였다. 할머니의 국민 학교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을 때, 그는 부산으로 본적을 옮겨 새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통지서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13살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엔 여러 민간 학교들이 있었다. 오빠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가갸거겨’가 배우고 싶어, 할머니는 타지에서 일하시던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학교를 갈라고 얼마나 울어 싸니까네 안 가르키주고, 공민학교, 애들 댕기는데 공민학교를 따라가서 고마 공부를 또 하고 오빠들 공부 하는데 같이 또 하고. 그러다가 엄마를 찾아갔어. 어찌어찌 물어가꼬 혼자 걸 찾아갔어. 물어서 물어서 가갖고. 그 가갖고는 이제 자꾸 학교에 여 주라고 조르는 기라.” 30리 길을 한나절 꼬박 걸어 어머니께 도착했다. 빠듯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세 남매를 공민학교에 보냈다. 이수자 할머니는 13살에 초등학교 4학년으로 입학했다. 꼬마들 사이에서, 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자란 아이에게 부끄러움은 없었다. 면장 어르신을 쫓아다니며 어린 이수자 할머니는 분수와 단위를 배웠다. 학교에서 열리는 체육대회에서는 릴레이 주자로 나갔고,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춤추고 노래도 했다. 당시 최고 상품이었던 공책과 연필을 타던 날도 있었다. 6개월간의 공민학교 생활은 이수자 할머니에게 꿈같은 시간이었다. 목침 위에 이야기책을 얹고 호롱불 아래서 읽었다. 가나다라마바사. 리터와 데시리터, 미터와 센티미터. 마당바닥에 작대기로 쓱쓱 그어가며, 입으로 외워가며 아직까지 읊조리는 할머니의 눈에는 그 시절에 대한 사랑스러움이 담겨 있다. 그러나 마음껏 공부할 수 있던 시절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부산에 계시던 아버지의 살림과 합치게 되면서, 여자는 공부할 수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공민학교에서 받았던 2학기 책은 그 겨울 땔감에 쓰이고 말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버지 몰래 장산국민학교 야간 수업을 들었다. 학비를 낼 수 없게 되었을 때는 동네 교회에서 하는 주말 교실에 참석했다. 배움은 성냥갑 붙이거나 날품 파는 일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장산초등학교, 야간에서 주산을 배우는데, 내가 주산 놓을 줄 안다고 번쩍번쩍 손들고. 하하. 공부엔 부끄럼이 없었다. 내 다른 거에는 부끄럽고 어데 용기 있게 몬 해도 공부는 내가 하고싶응께 무조건 드는 기라. (주산) 놓으라 카니 1전 놓고 2전 놓고… 반여동에서러는 18살 이런 애들이 학교 댕기. 가들하고 같이 친구매로 있어도 내가 이런 걸 잘 하니까네, 쟈는 공부도 잘하는 아가 왜 여기 와 있노 하더란다.” 심지어 오빠들도 돈 좀 벌어라하고 닦달했는데, 옛말에 살림밑천이라던 장녀가 학교에 글자 배우러 가겠다는 걸 곱게 보고 있었으랴. 이듬해 그의 아버지는 작은 어머니와 함께 옆 동네로 이사를 가버린다. 달구지에 화초장 달랑 싣곤 휑하니 사라진 것이다. 서운함과 야박함에 할머니 남매는 서로 부여잡고 울었더란다. 이후 남매에게는 야간학교에 낼 학비가 없었다. 한국전쟁 후 누구나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이수자 할머니는 부모님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공부를 해야만 했다. 대신 교회 주일학교에 갔다. 네다섯 살은 어린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다가, 중학교 수업을 듣자니 수준이 맞지 않았다. 그러나 중학생 수자, ABCD에서 한문까지 못 하는 게 없는 우등생이 되었다. 온갖 기호가 뒤죽박죽인 수학만 빼고 말이다. “그때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었던지. 미군들 쓰레기장이 집 앞에 있었어. 마분지가 억수로많더라. 마분지를 갖다가, 꼬매가지고 못으로 탕탕 뚫어가 꼬매갖고. 그거다 나라 국 자 하나에, 국가, 국제, 국회…무슨 잔줄은 몰라도 글자를 배우는 기라. 근데 누가 고 책을 훔쳐갔어. 얼마나 울고불고 난리를 부리고 책을 응? 아주 알아보기 좋도록 설명을 잘 적어가지고 놨더만. 공책을 훔쳐가뿟는 기라.” 우여곡절이 많은 시대였다. 재정문제에 따라 교회는 통보 없이 수업을 쉬는 날도 있었다. 교회 마당에서 여선생님에게 기계체조 수업을 들은 적도 있었다. 안락동 교외에서 소담스러운 운동회를 열었던 한편, 교사 탄핵이라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다. 기계체조 전공자였던 선생님이 사정상 그만두게 되고 새로운 남자 선생님이 오신 적이 있었다. 교회 학교의 남학생들은 그 선생님과의 수업을 거부했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그 선생님은 별칭 ‘스트라이커’, 데모 주동자인 것이었다. “머스마들이 선생 안 좋은 거 여 준다고. 그래갖고, 학교 나오면 맞아 죽는데이 이라는 기라. 선생 좋은 거 여 줄 때까지 학교 나오면 안된데이! 이라는 기라, 남학생들이. 그래갖고 안 간 기 고마 그 길로, 마 몬 갔다. 교회에서러 뭐 학생들 안 오면 그만이지, 그 뭐 선생 좋은 거 여 주겠나. 고마 그 길로 몬 갔다 야. 아이고 참, 이 공부를 못 해가 천날 만날 내가 애를 다 먹고. 그래가지고 주산 그거를 시집 가갖고는 만날 혼자 놓았거든.” 교회의 목가적 분위기를 어지럽힌다는 이유일는지, 아니면 그 당시의 데모가 10대 학생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학생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생님의 부임은 없었다. 남학생들의 협박에 못 이겨 교회수업 거부를 했던 그날 이후 이수자 할머니는 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했다. 할머니에게는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주판 놓는 것뿐이었다. 두 가정 먹여 살리기에 빠듯했던 아버지께서는 문경에 계시던 어머니를 부산으로 불렀다. 남매끼리 삭막하게 살던 집안에 어머니의 손길이 닿으면서, 등 따시고 배부른 생활은 아니더라도 삼시세끼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가 되었다. 이수자 할머니는 매일 공부가 하고 싶었다. “내가 대학이니, 어디니 목표가 있어서러 공부할라 하는 기 아니라, 그저 공부하는 기 좋았다. 손 번쩍 들고 ‘선생님요, 이기 뭡니까?’ 하는 게 좋았다는 거지. 일 안해도 돼서 그런가? 하하하. 칭찬 받고, 공부하고, 그기 좋았다. … 할아버지한테 시집가서는 뭐, 내내 일만 했지를.”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영문도 모른 채 한 결혼이었다. 외로운 삶을 살았던 어머니의 눈에, 자기 딸을 점찍었다 자신 있게 말하던 군인 청년이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여자는 그저 저 좋다는 남자한테 가서 행복하게 살면 그만인 것을, 하셨단다. 실제로 야심찬 청년 사업가였던 할머니의 남편은 군 제대 후 스테인리스강 사업에 뛰어들어 제법 큰 회사를 가졌다. 풍족한 사람은 조금 전까지 자기가 필요로 했던 무언가를 잊기 쉽다. 넉넉했던 생활 속에서 이수자 할머니는 공부에 대한 열망을 잠시 잊고살았다. 이수자와 유을수의 결혼식 사진 1972년, 할머니 말 그대로 남편 사업 ‘쫄딱 말아먹고 난’ 뒤에 그는 부산 평화시장으로 들어갔다. 약 30여 년 동안 시장에서 옷 장사를 했다. 사모님에서 수복상회 아줌마로 강등되었을 때 그는, 오히려 여유를 가졌다 말한다. “영감 장사할 적에는 내내 수금만 하고 돌아댕길 데도 없었는데, 시장에 있더니 사람들캉 이야기도 하고, 돈도 벌고 좋더라. (사업) 망해서 집구석에 다다미 깔아놓고 복닥복닥하게 살아도. 고생 많이 했제. 오남매 키우는기 쉬운 일이가. 할매(어머니)도 있고. 할매는 성당 댕겼는데, 내는 범어사 다니면서 하도 찔락거려가 신도회장도 하고 그랬다. 재밌었다. 고때 공부도 옛날 맨치로 하고 싶었지.” 1970년의 이수자 그는 경제적으로 고달파도 여유 있어 좋다 했다. 여유는 20여 년 전 해프닝으로 놓아버렸던 공부를 다시금 상기시키게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아줌마가 공부를 할 만한 공간과 시간과 선생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각종 매체에서는 한자가 자주 쓰이던 시절이었다. 신문지를 뒤덮는 글자들을 볼 때마다 그의 뇌리엔 어린 날 활기와 열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하면 순수하게 배우고 적어 내려가고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까. 그때 시작한 것이 불경 필사였다. “할매가 공부한 게 없어서 어려운 한자들을 보면 눈이 시린 기라. 결혼을 해뿟으니 공부를 할 겨를이 어데 있노. 마침 스님이 불경 써보라고, 수양하는 방법이다 해가 적어봤지. 뭔 뜻인지도 모르고 썼다. 볼펜으로 달력 다 쓰고 남은 뒤에 요래 적어보면, 참 뿌듯하더라. 오랜만이었지.” 2001년 이수자 할머니는 한국어문회 한자능력검정시험에서 1급을 땄다.* 20대 ‘젊은 애들’ 사이에 돋보기 쓰고 오도카니 앉아 살살 적었단다. 자식들이 어머니 편하시라고 해외여행 보내드리는 것도 마다했다. 그저 앉아서 오목조목 써내려가는 게 좋다고 하셨다. 지식과 학문적 추구도, 많은 공부로 인한 부귀영화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삶에서 공부하기란 어떤 것이었을까. 적어도 이수자 할머니의 삶에서는 아름다운 나날의 연속이고, 아름다운 나날들이 늘 그렇듯이 고난을 겪기 마련인 것이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내 울던 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는 그의 모습은 좌절을 겪어 슬픈 인생은 아니었다. *이 구술 스토리텔링 콘텐츠는 2차례에 걸친 이수자 씨 인터뷰로 구성되었으나, 몇 가지 정혜지가 오인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 획득에 대한 부분은 사실이 아니며, 이수자 씨에 따르면 실제로 시험장에 가서 시험을 치렀으나, 한자음을 한글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맞춤법이 틀려(예를 들어 刮目相對의 경우 '괄목상대'가 아닌 '갈목상대' 등) 1급 자격증 획득에는 실패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이 과제가 시사했던 바가 한 개인의 교육에 대한 열망과 인생이자, 근대를 살았던 많은 여성들의 보편적인 삶에 초점을 두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아카이빙 작업에서 반가운 과제물을 만나게 되면서, 두고두고 읽을만한 옛 기억을 꺼내놓게 되었네요. ⓒ 정혜지  
  • 그 시절의 디스크립션
    기록은 활동에서 생겨난 산물이니 만들어내거나, 또는 누가 만들어놓은 것을 가져오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기록을 확보하는 이 두 가지 방법은 생산, 수집이라는 용어로 자주 부르죠. 다섯숟가락 아카이브의 기록은 주로 수집된 기록(매뉴스크립트)입니다. 앞서 써두었던 아카이빙 노트 첫 번째 글에서 언급했듯이, 처음 아카이브를 구축한 계기가 할머니 댁에서 발견한 사진앨범들이었으니까요. 수집기록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는 바로 이 기록을 누가, 언제,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 알아내기가 힘들다는 점일 것입니다. 단지 같은 주제나 관계를 공유하고 있어서 가져온 기록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의 정보라도 없다면 기록을 등록할 때 애를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행히 이번 앨범 등록작업을 통해 재미있는 힌트들을 발견했습니다. 사진 속에 최소한의 기억을 남겨두려고 했던 제 할아버지만의 디스크립션(記述, description)을 소개하겠습니다.   1. 기축년 새해를 맞이해 정환동이 친구들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사진   갓 스무 살이 된 시절의 할아버지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낯선 얼굴이었습니다. 사진의 맨 위쪽에 서 계신 젊은이가 바로 저희 할아버지인데요. 1949년 무렵의 우정사진 포즈는 아마도 먼 미래를 함께 바라보고 함께 가자는 의미를 뜻하는 것 같아요. 아버지나 할머니께 여쭈어보아도 너무 어린 시절의 얼굴이라 어느 친구분인지 알아보기 힘들다는 이 사진에는 그나마, 1949년 새해를 맞은 네 친구들의 우정을 남기고 싶은 할아버지의 마음이 메모로 남아 있었습니다.   2. 합천국민학교 제29회 졸업기념 단체사진 이 사진은 할아버지의 사진은 아닙니다. 할아버지의 동생인 정환두 작은 할아버지의 사진이에요. 당시 합천국민학교의 졸업생들은 50명이 조금 넘는 인원. 거기에서 작은 할아버지는 잠깐의 교편을 잡으셨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헌병대에 입대하셨다는데, 늘 엄격하셨던 얼굴이랑 썩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 남겨둔 메모는 이렇습니다. "앞 줄에서 왼쪽편 4째 자리에 있는자가 정환두군이다. 잊지 말 것" 아마도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동생의 모습을 기억에서 잊지 않기 위한 다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3. 정환동의 산림경찰 복무 시절 동료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 할아버지는 산림경찰로 군 복무를 하셨다고 합니다. 1957년 복무를 마치면서 함께 동고동락해 온 동기들과 기념 사진을 찍으셨죠. 어김없이 그 사진의 뒷면에는 함께 해 온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메모해 놓으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세월이 많이 지나고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만년필로 적어둔 글자 대부분이 지워진 상태지만, 오랜 시간 군 생활을 함께 한 동료를 잊지 않노라 기억하는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전방이 조O철. 앉은 것이 공법용(공짜배기). 공서방 이 놈은 아주 유O한 놈이였다. 아마 그 OO에는 어째서 O지 알아주는 존재가 되리라고 믿는다. 조O철 이놈은 무골호인이였다. OO한 농촌OO가가 되리라. 1957.2.26" 써놓고 보니, 디스크립션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짧은 메모일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런 몇 마디의 메모로도 이 사진들이 왜 할아버지에게 중요해서 지금까지 남아 있었는지 알게 되었죠. 게다가 날짜가 정확해서 할아버지의 연대기를 짜맞추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진을 남긴다는 것. 오늘날이야 하루에도 수천 장 찍어내 바로 확인할 수 있지만 70년 전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값비싼 필름으로 딱 한 장만 찍어서, 며칠을 기다려 현상을 하고, 그것을 받아 내 보케트*에 간직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진을 남기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었죠. 그런데 사람의 기억이란 믿을 만한 것이 못되어서 그렇게 중요한 순간에 간직한 기억을 까맣게 잊을 때도 있죠. 그런 의미에서 할아버지가 사진 뒷면에 남겨둔 메모들은 소중한 순간에 찍었던 사진에 대한 추억을 남기려는 최소한의 디스크립션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보케트: 우리 할아버지는 늘 호주머니를 포켓의 일본식 발음인 "보케트"라고 부르셨어요. 중요한 것은 늘 보케트에 여- 놓으라고 하셨죠. ⓒ 정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