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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존재를 보듬는 여성주의 미술가, 윤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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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23.11.13  | 최종수정일 2023.12.04

 

문학과 미술이 만나자 봇물이 터졌다
시인과 화가의 만남은 시와 그림의 어울림, ‘시화(詩畫)’라는 향기로운 결실을 남깁니다. 1988년 개최된 여성시화전 <우리 봇물을 트자: 여성해방시와 그림의 만남>은 여성해방운동 및 여성주의 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전시입니다. ‘또 하나의 문화’의 시인들과 함께 시화전 <우리 봇물을 트자>를 기획한 화가들 중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 불리는 이가 있으니, 바로 윤석남 작가입니다.
 
불혹의 나이에 미술에 매혹되다
윤석남은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나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촬영한 영화감독이자 극작가, 소설가인 윤백남입니다. 그 아버지가 1954년 병사하자, 어머니 원정숙은 졸지에 가장이 됩니다. 혼자 6남매를 책임져야 했던 서른아홉의 여인, 인고의 세월 속에 강해진 어머니 원정숙은 윤석남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매개체가 됩니다. 주부로 살다가 서른아홉에 가장이 된 윤석남의 어머니, 역시 주부로 살다가 마흔에 화가가 된 윤석남. 그는 서른여섯에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고, 마흔에는 그림에 빠집니다. 불혹의 나이에 미술에 매혹된 그의 자아는, 봇물이 터지듯 작품 속에 분출됩니다.
 
버려진 나무를 주워다 빛을 입히듯
윤석남의 미술은 여성과 어머니, 나무를 빼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채, 존재도 없는 듯 살아갔던 여성들. 그 가운데 그의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윤석남은 버려진 나무를 주워다가 그 위에 먹으로 여성을 그리고 색을 입힙니다. 버려진 나무에 빛을 입히고, 가려진 여성을 비추는 작업. 빛나는 재능을 지녔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빛을 발하지 못했던 허난설헌의 생가를 찾은 윤석남은, 그곳에서 감나무 가지를 주워옵니다. 그 나뭇가지로 허난설헌의 모습을 만든 것이, 그에게는 최초의 나무 작업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시선으로 여성의 삶을 그린 <어머니의 눈>(1993)은 윤석남에게 이중섭미술상(1996)을 안겨줍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마흔이 넘어 미술을 시작한 윤석남은 그렇게 이중섭미술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작가가 됩니다.
 
버림받은 개들을 달래는 진혼굿
이중섭미술상 수상전, <빛의 파종>(1997)에서 윤석남은 <999>라는 제목으로 여성 목상 999개를 설치했습니다. 전시공간은 여인들의 한을 치유하는 서사의 장(場)이 됐습니다. “1,000은 완전수지요. 천수를 누리라고 하잖아요. 완전수에서 단지 1이 부족할 뿐인 999는 여성들의 한스러운 상황, 1이라는 격차를 표현한 수입니다.”
2008년 가을에는 1,025마리의 개가 전시장을 채웠습니다. 인간에게 버림받은 1,025마리의 개들이 인간 관람객을 바라봅니다. 시선이 관람객에서 전시물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물에서 관람객을 향하는 기이한 경험.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전입니다. 
“지난 5년 동안, 1,025마리 개를 만드느라 죽을 만큼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 일을 끝낼 때까지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이 작업을 하는 동안, 그는 1,025마리 개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굿을 하는 듯했다고 합니다. 또한 “인간에 대한 혐오와 존경을 동시에 느꼈다”라고 하네요. 그들을 버린 이도, 보살피는 이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소재는 개들이지만, 주제는 ‘돌봄’, ‘돌보는 여성’입니다. 돌봄은 여성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해요. 5년 전 신문에서 1,025마리의 유기견이 사는 <애신의 집>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많은 개들을, 할머니 한 분이 돌보신다는 이야기에 놀라고 감동했어요. 버려진 동물을 돌보는 이들 중에는 여성이 많습니다. 버려진 동물들과 그들을 돌보는 여성들. 이건 내가 꼭 담아야 할 주제라고 생각했어요.”
이듬해 초봄, 윤석남은 개들에게 환생을 선사합니다. 백팔 번뇌를 떨친 개들이 화사한 날개를 달고 환생을 기다립니다. <108마리의 나무-개들>(2009) 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