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문익환 통일의 집’은 작은 빨간 벽돌집으로 늦봄 문익환 목사와 가족들이 1970년부터 살던 집이다. 2018년 6월 1일 문익환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의 성금으로 복원하여 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소장하고 있는 근현대사의 자료 수만여 점은 평소 기록을 남기고 모으는 데 각별한 애정을 기울였던 부인 박용길이 수집한 것이다. 소장 자료들은 격동기를 지나온 한 가족의 기록이자, 민주화와 민간통일 운동의 기념비적인 사료이다.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는 디지털 시대에 맞추어 누구나 언제, 어디서라도 소장 사료들을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늦봄의 평화 정신을 배우며 세대를 넘어 소통하는 열린 아카이브로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하며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열어가고자 한다.──────────────────▮ 늦봄 문익환(文益煥, 1919년 6월 1일~1994년 1월 18일)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문재린과 김신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55년부터 한국신학대학 교수, 한빛교회 목사로 활동하였다. 1968년부터 신·구교 공동 구약 번역 책임위원으로 성서를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하였고 그 과정에서 시인이 되었다.전태일과 장준하의 죽음을 계기로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작성하며 민주화운동에 뛰어든다. 평소 민주와 통일이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던 그는 1989년 3월 25일 평양을 방문해 '4·2남북공동성명'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는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의 기초가 되었다.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의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고문,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1992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1976년 첫 구속 이후 6차례에 걸쳐 생의 마지막 18년 중 11년 3개월을 옥고를 치었다.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특히 어려운 이웃들과 아픔을 함께 했다.1994년 1월 18일 77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자택(통일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