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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광 김대중에게서 예술적인 스포츠 정신이 빛나는 듯해

    우리 봄길님   이번 겨울 들어서 처음으로 눈다운 눈이 조용히 오고 있군요. 함박눈이 아니면 어때요? 흰 눈, 하늘의 순결을 온몸에 맞으며 당신 손잡고 끝도 없이 걷고 싶은 날이군요. 오는 겨울 눈이 이렇게 내리는 날, 소요산에 가서 아버지 어머니께 인사를 올리고 걸을 수 있을 만큼 걸어봅시다. 안양 있을 때는 병사 2층에서 내려다보면 하늘이 내리는 은총을 거절할 수 없이 받아 휘청거리며 서 있는 소나무들이 그리도 행복하게 보였건만. 그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왔죠. 옥중일기를 펼쳐 읽어 보시구려. 그때의 내 행복한 심정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어제는 영환이, 김이곤 박사를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던지! 손주들의 세배는 받지 못했지만. 영환의 얼굴이 많이 좋아졌고, 새로운 인생길이 열리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군요. 김 박사 건강 진단과 치료를 해 줄 수 없어서 유감 유감. 이번에 나가면 이 겨레를 젊고 튼튼하게 만드는 일에 신명을 바쳐야지요.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흰 눈을 밟으며 뜨락을 거니는데, 갑자기 당신이 구운 사과 파이에 영금이가 끓인 따끈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졌군요. 어제 몽양의 정치 미학 이야기를 쓰다 말았는데, 후광의 정치 미학도 40년에 걸친 일편단심에 그 비결이 있죠. 많은 사람은 그의 깨끗한 퇴장에 감명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 아름다움의 배후에는 40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생애가 있고, 그 파란만장한 생애 속을 온갖 유혹과 죽음의 고비를 소신껏 초지일관 뚫고 살아온 그의 진실성이 있었죠. 그게 그렇게 돋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몽양의 정치 미학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데 그의 스포츠 정신이 큰 몫을 하고 있었군요. 자신이 스포츠 만능이었고 자신이 있었군요. 내가 그 어른을 뵌 것이 그가 용정에 축구대회를 주최하려고 왔을 때였죠. 조선중앙일보 주최였죠. 그것이 내가 그를 본 처음이요 마지막이군요. 경기에 자신이 있으면 어떤 사람이나 팀을 상대로 멋진 경기를 펼쳐 보고 싶거든요. 상대가 강할수록 더욱 도전해 보고 싶죠. 그가 동경으로 갈 때 임정의 어른들은 대부분 반대하는데도 갔거든요. 강대국 일본의 도전을 거절하는 것은 그의 스포츠 정신이 용납할 수 없었죠. 그는 그 도전을 멋지게 받아 완승할 수 있었구요. 승부만 있고 예술성이 없는 스포츠, 더군다나 요새는 돈 놀음마저 되어버린 스포츠, 추잡함이죠. 경기에 지고 승부에 이기는 것보다 승부에 지더라도 경기에 이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할 수 있는 스포츠 정신으로 정치를 해주었으면 얼마나 멋지고 신났겠어요. 이번 후광에게서 그런 스포츠 정신이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조국분단의 십자가를 지고 간 두 희생양은 우리에게 정치란 권모술수가 아니라 아름다움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니 그들은 결코 실패자가 아니죠. 누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요? 사랑 1993.01.14

  • "땅의 평화" 문익환

    "땅의 평화" 문익환 1993년, 인천 청년모임 책터 이충현님 기증

  • "석방하라 민족의 양심들" 일본에서 제작한 포스터

    3.1민주구국선언문 사건 당시 일본 시민단체에서 만든 포스터로 3.1 사건 관련자들의 사진과, 사형을 언도받고 복역중이던 김지하 시인의 그림이 실려있다. 배경에는 부인들이 한복을 입고 시위하는 사진이 있다. 통일의 집에 오랫동안 걸렸던 포스터이다.

  • "통일은 됐어" 정원철 리놀륨 판화

    "통일은 됐어" 정원철 리놀륨 판화 1995년

  • '당신' 속에도 우주만상이, '우리' 속에도 우주만상이

    우리 봄길님   “껄껄걸…하하하” 언제 들어도 시원한 박형규, 조정하 내외의 웃음 소리.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 낙천적인 성품. 아무래도 우리보다 한 수 위가 아니겠나 싶군요. 정말 잘 만난 짝이죠. 천정배필(天定配匹)이라는 게 그 두 사람을 두고 지어낸 말 같다는 생각을 난 어제 접견장 저편으로 건너다보면서 느끼게 되더군요. 그런데 부인은 주름살 하나 없는 젊음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낭군은 좀 기가 떨어지나 보죠? 눈이 트릿해지나 보니. 이여진 목사가 한신 학장으로 취임하던 때 내가 은근히 밀었던 것은 막 목사였는데. 그때 박 목사가 학장이 되었더라면, 그 난리는 안 겪어도 되지 않았겠지요. 그런 걸 보면, 내가 그를 꽤 좋아했나 보죠. 막 목사가 뻔질나게 감옥에 드나드는 걸 보면서 내가 꽤 부러워했지요. 그의 징역살이를 생각하면서 시를 세 편이나 그에게 지어 바칠 정도였으니까요. 이젠 징역살이에 관해서만은 그는 나의 관록을 도저히 못 따르게 되었지만요. 여생을 민중신학에 관한 저술에 바쳤으면 좋으련만.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좀 늦었지만, 모두 허허허 하하하 떠들며 즐거이 올라갔겠지요. 이만. 당신의 사랑 늦봄.     안병무 박사에게   어제 오후에 『종교 다원론』에 관한 대담 후반부를 읽으면서, 김경재 교수가 ‘생명’ 문제에 신학적인 조명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정말 기뻤다구요. 또 성백결이라는 젊은 친구(?)의 『한 생명 해방신학』을 한국의 풍수 이야기로 풀어가는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었구요. 그 젊은이 내가 아침마다 하는 염불을 들으면 꽤 기뻐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당신의 숨결 우리 안에서, 우리의 숨결 당신 안에서 한 숨결인 것을” “당신의 힘 우리 안에서 우리의 힘 당신 안에서 한 숨결인 것을” 그다음은 “당신의 마음”, “당신의 진실”,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름다움”, “당신의 기쁨”, 이 모두가 한 숨결이죠. “당신”속 에도 우주만상이, “우리”속 에도 우주만상이 포함되죠. 나는 얼마 전 박순경 박사의 글을 읽다가 성령은 “땅의 영”이라고 바르트가 교회 교의학에서 말했다는 말을 읽고는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구요. 왜 그러냐 하면, 땅은 하느님의 몸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도 있는 모양이니. 내가 10여 년 징역을 살면서 깨친 것을 그들은 연구실에서 깨쳤군요. 연구실도 생의 문제가 소용돌이치는 한복판이 되는 수도 있죠. 당신은 그것을 『살림』으로 끌고 가고 있고, 이래서 시대 정신을 믿게 되나요? 나는 어제 변 박사의 신학이 연구실 안의 신학의 한계를 갖고 있다고 말했지요? 그의 박사 논문의 결론, “무제약적인 책임성”이 기독교와 불교가 만나는 자리라는 건데, 이건 어디까지나 서구 신학의 범주가 아닐까요? 『무』와 『해탈』을 말하는 불교를 『책임』이라는 도덕적인 영역으로 끌어내리자는 건데, 그게 될까요? 그런데 그 대담에서는 변 박사도 슬슬 연구실 밖으로 나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구요. 아무튼 유쾌한 것은, 내가 기독교 신학의 테두리를 마구 부수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기독교 신학의 대양에 떠 있는 조각 배에 있다는 사실이군요. 내일은 성서 안의 종교라는 당신의 글에 대한 소감을 적어보기로 하지요. 오늘은 이만.  안동에서 늦봄. 1993.02.03

  • '만인보'는 민족을 개체의 생명으로부터 귀납하는 수작

    당신께   토요일 청량리역에 내리는 길로 연행된 것이 아닐까 싶어 마음이 아프군요. 차라리 구속되는 것이 좋겠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막상 그 범의 굴에 들어가서 닦달을 당할 걸 생각하니까, 양을 이리에게 맡긴 심정이 되는군요. 당신이야 나보다도 세니까 잘 버텨 내리라고 믿지만요. 이 편지를 호근이나 영금이가 받아 읽을지도 모르지요. 언젠가 나가서 한숨 돌리며, 옛말하며 읽을 날이 오겠지요. 어제는 에베소서를 읽다가 1:23에서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교회)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구절에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군요. 교회는 영혼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질 일이 아니라, “만물의 완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세상만사 가운데 그 완성을 위해서 교회가 힘을 쓰지 않을 분야가 없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교회는 세상에 많고 많은 종교의 완성에마저도 등을 돌리고 있으니. 오늘은 이만.  당신의 사랑   김명식 동지께   우리 말글로 시를 쓰기 시작한 역사는 한 세기도 안 되는가요? 시조의 역사가 있군요. 우리 말글로 소위 자유시를 쓰기 시작한 역사는 최남선에게서 시작되는가요? 그리 길지 않은 역사이긴 하지만, 그동안 고은 같은 시인은 없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그런데 그의 시집에 발문을 부탁받고 당황한 일이 있습니다. 역사의식의 퇴조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썼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고은은 민중 속으로 빠져나가는 썰물이다. 언젠가 다시 밀물이 되어 밀려 들어올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나는 그의 시 세계의 전 스펙트럼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군요.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서사시 『백두산』은 사람을 총체화하는 것인 반면, 『만인보』는 민족을 개체의 생명으로부터 귀납하는 수작이라”고. 서사시 『백두산』에서는 민족의식, 역사의식이 우렁찬 주조음이지요. 『만인보』에서는? 『만인보』에서는 민족의식, 역사의식이 들릴락 말락 하는 백뮤직이라고 해야 할는지요? 한국의 리얼리즘 문학 진영이 『만인보』를 리얼리즘 문학으로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을 중요시합니다. 그런 시각으로 개인의 실존적인 현실을 읊은 시들도 볼 수 있었으면 리얼리즘 문학에 새 지평이 활짝 열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는 지난날의 민족 문제에 쏟아붓고 있는 고은의 눈길을 오늘의 민족 현실에 쏟아 붓은 일이 우리에게 과제로 안겨 오죠. 통일 예술, 통일 문학을 개척하려는 사람에게 이것은 다급한 과제가 아닐까 싶군요. 어제의 민족 현실에서 오늘의 민족 현실을 그의 눈으로 보고, 오늘의 민족 현실에서 내일의 민족 현실을 보는 거죠. 1992.10.19

  • '우리는 간다'를 극찬해 주니 참 기쁘네

    당신께   비가 오면서 추워지리라고 엄포를 놓더니 따뜻하고 포근하군요. 발바닥 문지르는 것으로 올겨울은 느긋이 날 것 같군요. 작년 겨울만 해도 두꺼운 털양말을 두세 켤레 신고 담요를 덮고도 발이 시려서 고생이었는데, 올해는 아직도 맨 발이니. 운동 나갈 때나 접견 나갈 때 말고는 양말을 신을 일이 없으니까요. 올겨울 김장했다는 말이 없으니, 아직도 안 했나요? 여기서는 지금 한창 김장인데, 김장철이라서 그런 꿈을 꾸었는지? 당신과 같이 서울 어느 식당에 들어갔더니, 시원한 김치가 푸짐하게 나와서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지. Mr. Chung Lee (Association of Korean American Victims of the LA Riot, 929 S Westlake Ave, LA. CAL 90006) 씨가 보내준 편지에 내가 답장을 했는데, 그 답장을 받았는지 궁금하군요. 당신도 가서 신세 진 일 고맙다는 편지를 하면서, 내 답장을 받았는지 물어보시오. 영환이 내일 떠나는가요? 무슨 편으로 가는지? 가서 한 달 있다 오려면, 여비도 넉넉히 가지고 가야 할 텐데. 다음번 접견 때에는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요. 그럼 오늘은 이만. 당신의 사랑 늦봄     버드나무 때는 봄님께   얼마나 애를 쓰고 안달을 했을까? 그러지 않아도 두통이 있다는데. 나의 두통 치료법은 인재근이가 알아 가지고 갔는데, 그대로 치료해 봤어? 아직 젊은 나이에 중년기 장애 같은 증후를 보여서 어디 되겠어? 언제 한 번 본격적인 진단을 하고 치료를 해 줘야지. 나도 요새는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 건강에 관한 책을 빨리 내서 한국 사람들 젊고 건강하게 만드는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 이번에 나가면, 시국 강연보다 건강 강연 요청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싶어. 그런 세상이 왔으면 얼마나 좋겠어? 난 은숙이에게 성악 지도를 받아서 독창회를 열고 싶을 정도 목소리가 젊어졌다구. 나이 일흔 중턱에서 이쯤 될 수 있다면, 젊은이들이 빌빌해서는 안 되지. 염무웅 선생의 내 시평 정말 고마웠어. 내가 쉰 중턱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땐 학자(?)로서 나의 명성이 꽤 나 있어서 누가 나의 시작을 지도해 주려고 해야지. 그래서 혼자서 끙끙했거든. “꿈을 비는 마음”이야 성(내운) 교수가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우리는 간다”를 극찬해 주어서 난 정말 기분이 좋아. 그 시는 내가 사랑하는 시인데, 그게 어느 정도의 작품인지를 알 길이 없었거든. 이번 그 시선집에 골라진 시들을 보면서, 의외라는 생각이 드는 시들이 꽤 여러 편 있었어. 내가 시언찮게 생각하던 시들이 골라진 걸 보면, 그 시도 괜찮은가보다 싶어서 한편 놀라면서 한편 기쁘지. 그 시들을 어떤 사람들이 어떤 기준으로 고른 건지, 번역은 누가 어떤 시를 한 건지, 백(낙청) 교수가 최종 감수를 한 건지, 등등 궁금한 게 많어. 한 번 긴 편지를 보내주었으면 좋겠어. 그 책들이 나오게 되기까지의 시시콜콜한 경위를 알려줘요.  이만.  늦봄 1992.12.07

  • '일용할 양식' 에는 자유와 평등이 하나로 함축돼 있어

    당신께   영환이 지금 북간도로 가려면 두둑이 잘 입고 가야 할 거예요. 아버님 입으시던 외투가 아마 집에 있지요? 남대문 시장에 가서 등산가들이 입는 두둑한 잠바를 한 벌 사서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내복, 스웨터등도 한 벌씩 가지고 가야 할 거구요. 지금 거기는 윽윽할 테니까요. 영환이가 북간도에 가서 뭔가 값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하는데, 두 형과 조카들이 조금씩만 힘을 쓰면 다른 아무 지원 없이도 충분히 해낼 수 있겠지요. 정진동 목사 환갑 축하식 전에 내 편지가 다다라 서 좋았군요. 그 예배에 한다 하는 이들이 다 참석해서 그 자리에 무게를 주었지만, 그 어느 분보다 내가 제일 많이 그 교회의 행사에 참여했기 때문이죠.  조지송 목사님이 제일 인연이 깊기는 하지만, 건강 때문에 별로 참여는 못 했지요. 조 목사님이 감격해서 우실 만도 하지요. 정 목사님은 소 같은 분이기보다는 곰 같은 분이지요. 곰이 우리 민족정신이라면, 정 목사에게서 우리는 잃어버린 민족정신을 본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내 마음은 내일 한빛교회 당신 옆에 가 있을게요. 당신의 사랑 늦봄     박순경 박사께   전쟁·빈곤·폭력 거부 운동이 생명 사랑 운동이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명 사랑의 기본 조건은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주기도의 ‘일용할 양식’ 아니겠습니까? 생명 사랑의 기본 조건은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는 평등 사회죠(마 6장). 생명 사랑의 기본 조건이 또 하나 있지요. 그게 자유 아닙니까? 풍성하게 힘차게 자라고 싶은 생명의 본능과 아름다워지고 싶은 생명의 본능이 충분히 발휘되기 위해서 자유와 평등,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기본적일까요? 역시 평등이겠지요? 자유에 앞서 일용할 양식이 있어야 살 수 있으니까요. 자유를 누리고 주장하는 생명이 우선 존재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이 둘은 우선순위를 다툴 사이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자유가 평등 아닙니까? 일용할 양식에는 자유와 평등이 하나로 함축되어 있군요. 우리 헌법에 보장된 생존권과 자유권은 나누어진 것이 아니죠. 생존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바로 생존권을 박탈하는 일이니까요. 결국 자유와 평등을 하나로 조화시키는 일이 곧 생명을 사랑하는 일, 곧 평화운동이란 말이 되는군요.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갈등을 일으키게 되면 생명은 위축되다 되다 결국 죽어 버리고 말죠. 세상에 악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을 위축하는 일, 급기야는 생명을 죽이는 일이죠. 그러고 보면 선이란 생명을 사랑하며 키우고 활짝 꽃피게 하는 거지요. 자유와 평등뿐 아니라 선 또한 생명 사랑의 기본 조건이군요. 선 이야기를 하고 보니까 ‘참’ 이야기도 해야겠군요. 거짓, 속임수 또한 생명을 위축시키는 평화의 적이라는 말이지요. 거짓 자유, 속임수 평등, 가짜 사랑, 위선이 모두 생명을 위축시키다가 마침내는 죽이는 것이니까요. 도대체 진실은 생명에만 있는 것 아닐까요? 생명은 속일 줄 모르는 진실 그것이니까요. 진실은 생명의 기본 조건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본질이라고 해야겠군요. 1992. 11. 28.

  • '잠꼬대 아닌 잠꼬대' 는 통일 정서 일으켜

    당신께   아버님 빈소에 가설했던 전화 비용일 텐데, 왜 돌려주죠? 요새 내게 나타나시는 아버님은 아주 건장하시고 씩씩하셔서 내게 부쩍 힘을 붙여주시는군요. 고맙지 뭐예요. 난은 물을 많이 주면 꽃이 안 되어요. 김병희 목사 부인이나 유운필 목사에게 난 기르는 강의를 한 번 듣구려. 그보다는 난 기르는 책을 사서 공부하시오. 난뿐 아니라 화초 기르는 책이 많이 있는데, 공부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기왕 손을 댄 거니까 제대로 잘해야지요. 생명 사랑이 사랑만 가지고는 안 되지요. 지식으로 안이 받쳐진 사랑이라야 사랑 구실을 제대로 하니까요. 오늘은 이만. 당신의 사랑 늦봄.   김명식 동지께   지금은 차별성이 아니라 동질성을 찾아야 할 때라는 이야기까지 썼던가요? 며칠 건너 뛰어야 했습니다. 난 경락 공부를 하면서 한국 사람뿐 아니라 일본 사람, 중국 사람, 필리핀 사람도 치료해 보고, 아프리카 사람, 미국 사람, 독일 사람도 치료해 봤는데, 경락의 운행이 다 한치 어긋나지 않고 똑같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살갗이 희다, 검다, 누렇다는 차이, 먹고 마시는 식생활의 차이 등은 극히 사소한 차이에 지나지 않죠. 같은 사람이라는 동질성에 비하면 말입니다. 그러나 한겨레라는 같은 사람이 지닌 동질성을 찾는 것도 우리가 이룩해내야 할 대종합의 기초가 아니면 출발점에 지나지 않죠. 그렇다고 해서 동질성을 찾아 회복하는 일이 이념적, 제도적 종합보다 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죠. 기본이, 출발점이 더 중요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것은 지성의 영역이 아니라 정서의 영역이지요. 예술의 영역이라는 말도 되겠지요. 한 겨레다, 같은 사람이다, 라는 정서적인 일치가 이루어지면, 이면적인, 제도적인 종합은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뜻과 열의가 생기죠. 지성의 눈으로는 전혀 안 될 것 같이 보이는 것도 기어코 해내게 되죠. 절벽을 뚫고라도 길을 내죠. 그 대신 그게 안 돼 있으면, 분명히 될 수 있는 일도 이 구실, 저 구실 안 될 구실만 찾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일으키고, 북돋우고, 확산시키는 일 없이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종합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죠. 따라서 통일 정서를 일으키는 일이 통일 예술, 통일 문학의 첫째 되는 관심사여야 하죠. 그렇다고 해서 예술, 문학만이 통일 정서를 일으키는 일을 하는가? 그건 아니지요. 현정화와 이분희가 탁구의 세계 정상을 정복한 것이 통일 정서를 확산시키는 데 얼마나 큰 몫을 했습니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해낸 것에 못지않은 일을 해낸 것 아닙니까? 적십자사가 주선한 남북 이산가족 만나기도 꽤 큰 몫을 했고, 앞으로도 할 거로 생각합니다. 통일 정서를 일으키고 확산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요. 그러나 그 일을 위해서 예술이나 문학이 해야 할 몫에 비길만한 일을 해낼 분야가 어디 또 있겠어요? 그런데 과학적인 세계관, 과학적인 역사관을 가진 예술인, 문학인은 이것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는 것 아닙니까? 나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는 통일 정서를 일으키는 데 자그마한 공헌이라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시가 “부르조아적인 소박한 민족 감정”으로 극히 소극적인 평가를 받았거든요.   늦봄 1992.09.30

  • 01. 말에는 생명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