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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편지

    정말 정말 보고픈 당신께   어느새 40일이 되었군요. 그동안 너무 애를 태우느라고 머리가 백발이 되지 않았나 하고 걱정해 본다오. 걱정도 팔자지? 전에 다른 목사님들이 안달하는 것은 바깥 사람들이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사태평이라던 말이 얼마나 참이냐는 것을 머리카락만큼도 에누리 없이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소. 벌을 줄 수 없는 법은 아무도 얽맬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나는 어디까지나 자유롭다는 것을 날마다 느끼고 있소. 저번 한일 축구전 방송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갇혔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성서번역의 중책을 감당 못 한다는 책임감만 어깨를 누르지 않는다면, 나의 마음은 정말 조금도 부자유를 느끼고 있지 않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자문해 본다오. “내가 정말 갇힌 것인가?”고.  건강은 말할 수 없이 좋소. 40일 동안 두통으로 약을 먹어 본 일이 한 번밖에 없었다면, 나의 건강, 정신 상태를 알고도 남음이 있겠지요. 그것도 바로 오늘. 음식은 사식, 간식 등으로 아무 불편이 없구요. 저녁이 3시30분에 들어오기 때문에 점심은 안 먹기로 했소. 앞으로 나가서도 이렇게 하루 2식을 했으면 썩 좋을 것 같은 느낌이군요. 내가 있는 棟이 여기서는 특등 棟이요. 햇빛 잘 들고, 공기가 잘 통하고, 냄새로 하나 없고. 하루 세 번 더운물을 한 바께쓰씩 주어서 몸도 집에 있을 때보다 더 깨끗하죠. 옷은 내복을 벌써 다 벗었소. 하나도 춥지 않군요. 내복이나 세타 가지고 있는 것을 베개로 쓰고 있소. 혹시 싸늘한 날이 있을 때를 생각해서 얇은 메리야스 내복을 (내가 입던 것) 아래위 한 벌 들여보내 주시오.  거의 밤마다 당신 꿈을 꾸지요. 지난밤에도. 그 흰 양복을 입은 모습, 얼마나 신선해 보였는지 모른다오. 언제 나갈지는 모르지만, 나가면 륙색에 간단한 차림으로 코스모스 길을 당신과 같이 정처 없이 걷고 싶은 생각이요. 가다가 피곤하면 냇가에 앉아 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저녁때가 되면 어느 마을에나 들어가 묵기도 하고, 버스가 오면 올라타고 가다가 또 내리고, 이런 식으로 말이요. 우리 지난 여름 강릉에서 돌아올 때 일 생각나지요?  이건 꼭 실천해 보고 싶은 생각이요. 처음에는 집 생각, 카나다 생각, 꽤 궁금하더니 “모르겠다. 하느님께 맡기지” 하고 나니, 마냥 마음이 편하구려. 죄를 짓고 들어왔다면야 그렇지 않겠지만 말이요. 재판 같은 건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소. 당당할 따름이니까.   중간에 편지 일부가 분실됨   나는 이렇게 차분히 오랜만에 기숙사 방에 처박혀 공부하는 심정이니까 하나도 염려하지 말고 밖에서는 명랑하게 잘 먹고, 잘 지내며, 즐거운 날을 기다려 주시오. 견우직녀의 즐거운 날을. 하느님의 은총이 하루도, 한 시간도 우리 위를 떠나지 않을 것이오.  굳나잇.   1976 4.11 밤   감옥에서 보낸 첫번째 편지로써 건강과 수감생활에 대한 얘기과 아내에 대한 애뜻한 감정을 표현. 총5장의 편지 중 중간 두장이 분실되었음.   

  • 신구약 공동번역 성경이 출판되다

    그리운 당신에게 이곳 들어서던 날 감방 쪽으로 돌아서는 길목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개나리 꽃봉오리들 활짝 피며 흩날릴 그 금싸라기들은 영영 볼 길이야 없겠지만….. 이렇게 속으로 읊조리고 있었는데, 당신과 성근이를 접견하러 나가다가 그 개나리가 활짝 핀 것을 보고 어찌나 기뻤던지 몰라요. 작년에는 창가에서 지저귀는 참새 소리에서 개나리가 피었으리라는 것을 알 뿐이었는데, 금년에는 그 뒤에도 개나리가 핀 것을 볼 기회가 많아서 77년 봄은 제대로 봄맞이를 한 셈이오. 접견하고 나오다가 건물 정면에 백목련이 활짝 핀 것도 보았고 옥매화가 피기 시작한 것도 보았소. 우리 집 마당의 옥매화도 피게 되었겠구나 싶어 괜히 반가웠소. 우리 집 옥매화는 감나무 그늘에서 양지바른 데로 옮겨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소. 어제 당신 편지, 영미, 이 선생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그리고 소포 속에서 나온 성경 책을 받아 들고는 얼마나 가슴이 울렁거렸는지 짐작이 가겠죠. 물론 선 신부님 생각이 간절했죠. 성서 출판에 관한 자세한 소식 보내 주구려. 출판 기념회 같은 건 없었는지? 반향 같은 것도. 내가 마지막 손질을 못 해서 유감인 동시에 성서 공회에 대해서는 미안 천만이군요. 전화로라도 내 뜻을 김 총무님에게 전해 주시오. 현주, 성우 수고 많았고 문장 면에서 좋아진 점이 많은 것 같아서 두 사람의 능력을 인정해 주어야 하겠소. 하지만 적지 않게 한계를 넘은 데가 보여서 재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느껴지오. 시편 23편 같은 것은 몽당 손이 되었더군. 이런 이야기는 현주에게나 하시오. 내가 잘 지낸다는 말을 믿는다고 머저리라고들 한다지만, 그것은 당신의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거요. 남편을 믿는 거고 하느님을 믿는 일이지요. 아이들은 내 신경이 의외로 강하다고들 결론을 내리는가 보지만, 또 내 신경이 예민한 것은 사실이구요. 그러나 그 예민한 신경을 떠받들고 나가는 다른 힘이 의외로 강했다는 것이 아마 더 정확한 판단일 것이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나를 믿으시오. 나는 건강하게, 즐겁게, 보람차게, 너무너무 뜻있게 살고 있다는 것을! 여기 교도관들도 60 먹은 사람의 몸이 그렇게 유연하고 건강하다는데 놀라고 있죠. 햇빛을 받으며 30분 동안 뛰는 나의 몸은 30대의 젊은 몸이라고들 한다오. 나의 일과는 일어나는 길로 1시간 30분 정도 요가와 뜀박질, 그 사이에 차례가 오면 세면소에 나가 세수를 하지요. 요가가 끝나면 간단한 조반(생계란 하나, 빵 등), 그리고 오전 내내 명상과 히브리어 성경 읽기, 그동안 30분 밖에 나가 운동도 하구요. 점심 먹은 다음 좀 쉬다가 할아버지, 할머니, 당신, 동지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런 다음 일반 독서, 저녁 먹고 독서하다가 한 30분 뜀박질하고는 자리를 깔고 앉아서 독서하면서 잠을 청한다오. 목요일이면 독탕으로 목욕하고, 금요일은 면도하는 날. 아직은 머리를 깎을 만큼 되지는 않았으니까 면도만 하지요. 세탁하는 날은 화요일이구요. 최근 중요한 소식을 전하면 주기도 강해 저술 집필 요청이라오. 그 일을 위해서 월요일 교무과장과 면담하기로 되어 있어요. 또 하나 지난 12일, 혼자 고요히 단식하며 명상하고, 다음 13 일 저녁, 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얼른 오지 않아 이 생각 저 생각,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가 꿈 같기도 하고 생시 같기도 한 가운데 충격적인 일을 보았고, 그 일을 생각하면서 나는 열심히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소. 눈을 뜨고 보니 그것은 분명 생시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꿈이라고 하기에는 내 머리는 생시처럼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니까. 상당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작품을 말이오. 이렇게 되면 그것을 작품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정말 곤란한 이야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게오르규의 『25시』 같은 걸 다시 작품으로 분석하며 읽어 보고 싶어졌어요. 소설까지 손을 대는 것은 나의 분수를 넘는 일이라고 생각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의 영감처럼 온 것을 밀어 버릴 수 없는 것 같은 심정이오. 이래저래 오래 살아야겠다고 더욱 극성으로 요가를 한다오. 당신은 나의 이런 과잉 의욕에 자극을 받아 글을 쓰시오. 매일 서대문으로 왕복하며 소비하던 시간, 애인을 생각하며 글을 쓰란 말이오. 예쁜 글씨보다는 힘 있는 글씨를 쓰려고 필력(筆力)을 기르시오. 예쁘게 쓰는 재간은 그러는 동안 저절로 될 거요. 힘 있는 획에 대한 자료부터 장만해야 하오. 깨알같이 시시콜콜한 편지를 자주 보내 주시오. 다른 분들의 소식도 듣고 싶구요. 한빛 교회, 갈릴리 교회, 새벽의 집 등등. 은숙의 오페라가 곧 있겠군. 물론 캐나다 소식도. 이제 지면도 다 돼 가는 것 같아 내게 필요한 걸 적죠. 제일 필요한 건 당신. 꿈자리는 비어 있으니까 언제나 오시오. 옷가지는 반바지 운동복과 옷을 넣어 걸어 둘 주머니 하나, 그뿐이오. 모두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만세. 1977. 4. 16. 7년간 종사하였으나 수감으로 인해 마무리를 못한 성경 (신구교 공동 번역)이 출판되어 옥중에서 책을 받아 보았다. 주기도 강해 집필 요청을 받았다. 꿈에서 본 환상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다.

  • 꿈을 비는 마음

    나의 코스모스에게   오늘 아침 시편 131편을 읽다가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 내 마음 평온합니다”라는 구절을 만나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오. 바로 그것이 지금의 나의 심정. 그러니 나 때문에는 너무들 마음 안 쓰는 게 좋을 거요. 그 대신 나도 어머님이 입석표로 어떻게 서울까지 가셨을까, 도중에 자리라도 잡으셨을까, 이틀에 걸친 노독이 풀리셨을까, 그런 걱정은 않기로 했소. 저번 면회 때 어머님이 어찌나 싱싱해 보였는지 몰라. 당신은 좀 안돼 보였지만. 그저께는 당신이 와서 꽤나 걱정을 하고 갔나 보죠? 보안과장, 소장님까지 와서 병문안을 하고 가셨으니. 어제 링거액에 이뇨제를 넣어서 한 대 맞았더니,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다리에 부기가 완전히 가셨군요. 이것이 일시적일지 아닐지는 며칠 두고 봐야 하겠죠. 당신이 내 말을 믿는 것을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나 본데, 웃기지 말라고 하시오. 나는 지금까지 몸이 안 좋으면 언제나 안 좋다고 했지 그걸 감춘 적이 없었으니까, 한 번도. 저번 날 내가 너무 먹어서 성근이는 좀 걱정이 되었나 본데, 사실 그날은 점심을 걸렀다오. 그동안 소화에 지나치게 자신을 갖고 마구 먹은 것이 좀 안 좋아서 1일2식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차에 어제는 기어코 속탈이 나고 말았지 뭐요. 그래서 어제 하루 단식하고 났더니 속이 그렇게 깨끗하고 기분 좋을 수가 없군요. 난 이제 하루 이틀 단식하는 것쯤은 오히려 즐거울 정도요. 오늘 점심부터 한 사흘 죽을 먹겠소. 무엇이나 지나친 자신은 안 좋은 일인 것을 깨달았소. 단식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강창순 집사도 단식 요법을 써 보는 게 어떨지. 한 번 내가 그러더라고 하며 생각해 보라고 하시오. 단식 전문가 옆에서 하면, 강 집사 같은 경우 근본 치료가 될 거라고 생각되는데, 어떨는지. 저번 면회한 후에 내 가슴을 스치는 검은 그림자가 생겼소.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우리 전 국민이 그렇게도 자유를 외쳤건만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직도 우리를 외면한 채로 있거든요. 이제 민주적인 민족통일이 우리 전 민족의 염원이긴 하지만, 우리 민족사가 또다시 이 염원을 외면한 채 지나쳐 버릴 것이 아닌가 하는 한 가닥 검은 그림자가 자꾸만 머리를 드는군요. 민주 원칙으로 이 나라가 통일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여야가 있을 수 없고 정부와 국민이 다를 수 없죠. 광적인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대다수 이북 동포들의 염원도 우리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되구요. 그리고 이 민족의 염원에 기도의 불길을 붙여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구교의 장벽이 있을 수 없고 보수·진보의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없죠. 그런데도 ‘통일’이라고 하면 한 가닥 불안을 느끼며 선뜻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요? 다른 두 이데올로기, 두 체제의 통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느냐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이건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는 일, 미루면 미룰수록 문제는 그만큼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겠소? 통일의 문빗장은 내려졌는데도 굳게 닫혀 있다고만 생각하고 이 민족은 그 대문 앞에 그대로 지나쳐 버리려고 하지 않는가, 또 그럴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만 하면 몸살이 날 것 같군요. 불신앙(不信仰)인지도 모르지만. 이 불신앙을 이기는 길도 기도하는 길밖에 없겠죠. 이런 심정에서 오래 마음속으로 궁글리던 시 한 편을 미흡한 대로 아래와 같이 읊어 보았소.     개똥 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남도 몰래 저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그러니 벗들이여! 보름달이 뜨거든 정화수 한 대접 떠 놓고 진주 같은 꿈 한 자리 점지해 주십사고 천지신명께 빌지 않으려나!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전을 해 뜨는 동해 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동해 바다가 굽어 보이는 산정에 다다라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철들고 셈들었다는 것들은 다 죽고 동남동녀들만 남았다가 쌍쌍이 그 앞에 가서 화촉을 올리고 그렇지, 거기는 박달나무가 서 있어야죠 그 박달나무 아래서 뜨겁게들 사랑하는 꿈, 그리고는 동해 바다에서 치솟는 용이 품에 와서 안기는 태몽을 얻어 딸을 낳고 아침 햇살을 타고 날아오는 황금빛 수리에 덮치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그 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 바다로 서해 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의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산과 들을 뛰노는 짐승이 되고 신나게 하늘을 나는 새들이 되고 펄떡펄떡 뛰며 날쌔게 헤엄치며 강물과 바다를 누비는 물고기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 비나이다. 밝고 싱싱한 꿈 한 자리 멋지고 아름다운 꿈 한 자리 평화롭고 자유로운 꿈 한 자리 부디부디 점지해 주사이다   「꿈을 비는 마음」이라고나 제목을 붙이죠. 짐승들도 꿈을 꾸는지 모르지만, 꿈이야말로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소. 우리를 과거에 매는 꿈 말고 미래를 향해서 끌고 가는 꿈, 그런 꿈이 없는 민족은 이미 앞날이 없는 민족이지요. 릴케의 기도 한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당신 (하느님)이 꿈을 꾸신다면, 나는 당신의 꿈이지요.” 내가 송두리째 하느님의 꿈이 된다는 생각, 얼마나 기막힌 신앙인지! 요새 식탁 앞에 앉을 때마다 나는 이런 기도를 드린다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지금 먹는 것이 내 몸속에서 당신의 뜻이 되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정의의 목소리, 당신의 사랑의 몸부림이 되게 해주십시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이름으로, 또 그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같이 헐벗고 굶주리는 당신의 아들, 딸들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정말 김경수 목사의 『이 상투를 보라』는 10년 체증이 떨어지는 시집이었소. 왜 그 시집이 이제야 들어왔죠? 여성적인 아름다움이 풍토가 되어 있는 우리 시단에 영일의 시와 함께 굵직한 남성적인 (좀 거칠지만) 목소리를 울려 주어서 오뉴월 가뭄에 소낙비 맞듯 시원했었소. 영일의 시가 무서운 현실 비판이라면, 김경수의 시는 적극적인 자기주장의 시라는 점에서 두 시인은 각기 제 나름의 목소리에서 흐뭇하군요. 안 박사의 跋文도 멋지고. 안 박사도 제법 시를 알거든. 무시 못 하겠어.  요새 갑자기 날이 추워져서 안 박사 세타 애용한다는 말과 함께 跋文 칭찬도 전해 주시오. 대부분 시인이 詩란 무력한 거라고 하지만, 그건 정말 시가 무언지 모르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소.  나의 「마지막 시」는 나의 몸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을 때마다 나를 거뜬히 밀어 올리는 힘이었거든요. 저번 「모래알들의 기도」 같은 시를 얻고 나면 1년 6개월 영창 생활이 보상되고도 남는다는 기쁨에 들뜨거든요. 우리를 밀어 올리는 힘, 모든 아픔과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기적, 주저앉은 우리를 앞으로 끌어가는 꿈이 시로 나타나는 건데, 그것이 어떻게 무력하다고 할 수 있겠느냔 말이죠. 그건 천부당만부당한 소리요. 내가 성서를 번역하다가 시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뿐. 빨리 나가고 싶다면, 지금 속에서 굽이치는 시들을 적고 싶다는 생각, 그것을 친우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어 같이 울고 웃고 싶다는 생각에서라고나 할까. 성수 덕에 앞으로 영금의 소식도 전보다 더 잘 알게 될 것 같군요. 사귀기 시작해서 결혼 후까지 그렇게 자세하게 써 보내 주어서 거기서 본 것만큼은 안 되겠지만, 궁금하던 생각이 말끔히 가셨다고 하겠소. 내가 미국 있을 때, 날마다 일기를 써서 보내던 그 솜씨 아니겠소? 빨리 사진들도 와야, 더욱 속 시원할 텐데. 신철 아빠, 엄마에게 문안해 주시오. 어떻게 좀 미안하게 된 게 아닌가도 싶으나, 언젠가 손잡고 흔들며 맺힌 이야기들을 할 날이 오겠죠. 뉴욕 언니에게도 진정으로 고맙다고 말씀 전해주고요. 성근이 결혼한다고 공부 못할 것 아니니까, 꾸준히 매진하라고 하시오. 나도 학업을 마친 것이 성근이까지 난 다음이었으니까요. 더구나 한국에서 대학원 공부하는 건데, 염려할 것 하나 없어요. 보일러는 다 되었는지? 방수는 방수제를 많이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법대로 한 번 바르고 얼마 있다 바르고 해야 하는 건데, 그대로 하지 않으니까, 안 되는 걸 거요. 겨울 동안에야 괜찮겠지만, 내년 봄에 방수를 제대로 다시 해야죠.  신 신부, 윤 목사님 건강은 어떠신지? 친지들 여러분 모두 모두에게 건투를 빈다고 전해주시고, 한빛 교회, 갈릴리 교회, 사랑방 교회에 격려를 보내오. 얼마 전에 이희호 여사가 5천 원 보내 주셨어요. 고맙다고 해 주시오. 사돈 댁에도 문안 전해주시고. 아직도 집안일 돕는 사람을 못 구했는지? 다 같이 명랑하고 씩씩하게 확신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합시다.     당신의 둥근 달   통일에 대한 의구심과 열망을 “꿈을 비는 마음”이라는 시로 표현하다 신현봉 신부, 윤반웅 목사 (민주구국선언문 사건의 공범)의 안부를 묻다.  

  • 짝짜꿍 나의 짝에게

    짝짜꿍 나의 짝에게   소낙비   하늘도 얼마나 가슴이 답답했던가 천둥소리도 속 시원히 비를 쏟으니 천지간에 자욱한 물보라도 번쩍번쩍 눈이 빛난다.   오늘 아침 그 지겹던 더위를 속 시원히 쓸어 간 소낙비를 생각하며 읊어 본 4행시부터 선을 보이고 싶어졌소. 제목은 「소낙비」라고 붙여 두지요. 여기 표준으로는 장시간 접견이었지만 우리들로서는 너무나 짧고 아쉬운 시간이라고 할 밖에. 유리창으로 내다보며 손을 흔들던 식구들의 얼굴들이 눈에 선하구려. 기쁜 것은 그 얼굴들이 하나도 침울한 얼굴들이 아니고, 다들 활짝 웃는 얼굴로 회상이 된다는 일이외다. 진실을 지니고 확신으로 사는 사람의 승리를 보는 것 같군요. 좀 더 건강한 모습을 보였어야 하는 건데, 그만 풍치 때문에. 그날까지만 해도 완쾌된 것은 아니어서 조심조심 씹어 먹어야 했는데.  오늘 점심부터는 아마 마음 놓고 씹을 것 같구려.  이제 완쾌된 셈이죠. 회복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뒤를 보고 있으니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나의 몸은 이제 완벽하게 회복되어간다고 보겠지요.   어제 아침 고린도 후서를 읽다가 6장 19절에서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에게서 새삼 깨우침을 받았소.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고 정말 말할 수 있어야 우리는 정말 확신을 가지고 소신껏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오. 「뻐꾸기 소리」라는 시 한 편을 또 적어 볼까요?   뭇 별이 사라진 다음, 홀로 물러가는 밤을 지켜보던 샛별마저 가고 찬란한 아침이 동트기 전, 그 사이의 무거운 공간을 고요한 마음으로 메우며 말없이 섰는 저 깊은 산의 외로움을 벗 삼아 주는 구름 덮인 하늘의 목소리였었구나. 새벽이면 어김없이 나를 잠자리에서 불러내는 네 그윽한 소리는.   새벽마다 나를 깨우는 뻐꾸기 소리, 평생 잊지 못할 것 같구려. 그 그윽한 소리! 또 별이냐고 성근이는 불평일 테지만, 요새 새벽마다 샛별을(아득히 사라져 가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쳐다보노라면 앞으로 좀 더 샛별을 노래해야 할 것만 같은 심정이라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일기(日記)’라는 시 한 편을 마음속으로 궁그리고 있는데, 그 속에도 샛별이 다시 등장하는구려.     77년 7월28일에서 29일로 넘어가는 한밤중 아우별과 같이 동쪽 하늘에 머리를 내민 금성을 기다리다 못해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들리는데 나는 金宗吉의 조지훈론을 읽다. 아 --- 그런데 또 저 기침 소리 금방 숨이라도 넘어갈 듯, 숨죽이고 흰 벽을 쿵쿵 울리는 외로움 같은 것은 증발해 버린 지 오래인, 두 주일 동안 풍치로 아픈 아래쪽으로 왼쪽 끝 어금니가 다시 띵하며 왼쪽 관자놀이가 깊숙이 울린다. 베켙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읽고 싶어지다.   새벽 서너 시쯤 잠이 깨는 일이 있거든 밖에 나가서 동쪽 하늘을 쳐다보시오. 유난히 크게 빛나는 별이 보일 것이오. 그것이 샛별이라고 불리는 金星이죠. 요새는 날이 흐려서 하루라도 금성을 못 보면 내 마음이 어두워 오는 것 같은 느낌이라오. ’샛별’과 ‘뻐꾸기 소리’는 나에게 새날을 열어주는 하늘의 신호.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를 읊조리는 나의 입술은 기쁘기만 하죠. 그러나 앞의 ‘일기’라는 시는 좀 아프죠. 病舍라 밤이면 남의 잠을 깨울까 봐 숨죽이고 하는 기침 소리가 늘 가슴에 마쳐온다오. 마지막 생명선에서 홀로 버티는 넋의 처절한 안간힘 같은 걸 느끼곤 하죠. 나의 방 동창으로 새벽마다 뻐꾸기가 나를 불러내지만 때로는 ‘밤빗소리’도 나를 불러내곤 해요.    이건 散文詩. 김윤식, 김현의 ‘한국 문학사’를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죠? 누가 부르는 것 같아 눈을 뜯으며 창가에 나왔더니, 그건 천지를 뒤덮은 밤빗소리였습니다. 감시탑 조명등 불빛에 빗줄기들의 가는 허리가 선명합니다. 무지개가 서고 비둘기를 날리려면, 오늘 밤새, 내일도 하루 종일 더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밤빗소리가 왜 나를 불러냈을까? 나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입니다. 빗소리가 점점 세어져 갑니다. 선창 밑 어디 짐짝들 틈에 끼어 코를 골고 있을 요나를 깨우기라도 하려는 듯, 빗소리가 이젠 마구 기승을 부립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떠봅니다. 흥건히 젖은 속눈썹들 사이로 비쳐드는 불빛이 비에 젖어 밤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입니다. 밤이 울고 있습니다. 내가 대여섯 살 되던 때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집에서 누가 죽은 것도 아닌데, 아버지가 방에서 혼자 소리 없이 울고 계시는 걸 뵌 일이 있습니다. 나도 괜히 가슴이 울먹여 뒷뜨락으로 돌아가 뽕나무에 기대서서 눈물짓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내가 이런 시를 머릿속으로 궁글린다고 내가 비감에 젖어있거니,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그냥 어떤 한순간의 분위기를 잡아 본 거니까.  ‘새가정’이 들어오고 있어요. 방현덕 씨에게 고맙다고 해주시오. ‘기독교 사상’, ‘詩文學’을 보내 주시오.  정말 사둔 영감이 ‘사랑의 노래’를 외어서 낭독해 주셨다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요? 멋진 사둔을 보게 되어서 이중으로 기쁘군요. 정말 기뻐한다고 소식을 전해 주시오. 당신의 작품을 볼 수 없는 것도 유감이지만, 사둔 영감이 낭낭한 목소리로 변변치도 않은 나의 시지만 낭독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건 정말 유감이군요. 당신 작품이야 언제 볼 날이 있겠지만. 결혼 축하식 상보를 성근이더러 써 보내라고 하시오. 어떤 이들이 얼마나 왔었는지? 은숙이는 무슨 옷을 입고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등등. 영환이도 너무 큰 선물을 했군요. 아이들이 학생 신분인데, 500불짜리 응접실 셋트라니. 큰이모님, 꼬마이모님들도 너무 큰 선물을 했구요. 정성은 고맙지만.  영미 편지를 기쁘게 읽었다고 전해 주시구려. 요새 그림 공부한다고. 열심히 해서 멋진 화가가 돼야지. 시도 지금은 음악이 아니라 그림이기 때문에, 영미하고 나는 같은 ‘아름다움’를 그리는 거죠. 영미는 크레욘이나 페인트 등 물감으로 그리고, 나는 글자로 그리고, 차이는 그것뿐이죠.  미 지상군이 철수하고 나면, Faye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군요.  우리 집에 노랑 나리꽃이 있다니, 나는 모르는 건데.   대구는 지금 형편없이 더울 텐데, 호근의 여름 작업은 어떻게 되어가는지? 호근이 번역한 ‘음악사’가 나왔으면, 그것도 읽어보고 싶구만요. 은숙이 성악과 과장이 되었다니, 축하해야 할 건지, 아닌지 모르겠소. ‘--장’이란 예술가에게 그리 반가운 것이 아니거든. 겸손하게 자기 충실을 기하도록. 아아! 정말 은숙의 노래가 듣고 싶어라.   성근아,   아직도 읽을 책이 많이 있어서 서두를 건 없지만, 김주연, 김현 편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싶다. 김영태의 ‘초개수첩 (시집)’(집에 있음). NCC에서 나온 에큐메니칼 문고들도 좋고. Von Rad의 ‘구약 신학’ (허혁 옮김), Koch의 ‘성서 해석의 제문제’ (허혁 옮김). 이 두 책은 집에 있다. 또 ’안네 프랑크의 일기’도 영문으로 구해 보내주면, 읽고 싶구나. ‘장길산’ 1권은 서대문에서 읽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2권만 찾아 읽었기 때문에 두 권만 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창비시선에서 金冠植, 朴鳳宇의 것을 못 읽었고, 金宗吉 시선도 보고 싶다. ‘새삼스런 하루’는 찾아다가 집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우를 잘 돌보아 주어라. 고은 만나면, 시집과 ‘한국의 지식인’을 지금 읽고 있다고, 고맙다고 전해다오. 쇠고기 통조림도 곧 사 먹게 된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아빠.   한 집사님   섭섭한 마음,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눈 감으신 모습을 뵙지 못해 유감 천만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저는 영원히 살아계시는 이 장로님을 가슴에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톨 거짓 없는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저의 60평생에 이 장로님같이 순수한 분을 가까이 사귈 수 있었다는 것은 더없이 소중한 축복이었다고 저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싱글싱글 웃으시는 이 장로님, 난대로인 어린이 같은 그 마음씨만 생각해도 나는 하늘나라 백성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 이상 더 큰 축복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한 집사님은 그런 분과 평생 한 지붕 밑에서 사셨다는 것을 더 없는 축복으로 알고 그와 함께 하늘나라를 거니시면서 하늘나라 백성의 참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그것처럼 기쁘고 복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할렐루야. 기영이더러 할렐루야 레코드를 틀어달라고 하고 들으십시오. 하늘나라에서 이 장로님이 기뻐 웃으시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산소에 같이 가서 할렐루야를 부를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면서.   문목사   1977. 8. 4.   한빛교회 집사였던 한신환 집사에게 (남편은 한빛교회 장로였던 이종훈 장로가 소천한 후) 위로의 말씀을 쓰다. 시 네 편을 쓰다. 1. 소낙비, 2. 뻐꾸기 소리, 3. 일기, 4 산문시  

  • 19790416 수난 주간에 생각하는 민족의 수난과 어머니의 수난

    어머님 4월 편지는 부활절 전에 나가도록 썼었는데, 부활절이 지난 오늘 또다시 쓰게 되었습니다. 유감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잘 되었다 싶군요. 수난 주간과 부활절 명상을 몇 자 적을 수 있게 되어서요. 금년 수난 주간에는 80여 성상, 거의 한 세기에 걸치는 어머님의 피어린 수난의 역정에 초점을 맞추고 민족의 수난, 인류의 수난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저의 수감 생활은 고생이라는 말조차 붙일 수 없는 편한 생활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지금까지 저희 가운데서 드나드신다는 일이 얼마나 복된 일이냐는 것을 눈시울로 화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 민족의 수난이 한일합방이라는 국치의 역사, 대동아전쟁, 국토분단, 6·25의 비극 등으로 이어지는 순하디 순한 이 민족의 피눈물 나는 쓰라림이 종로 바닥을 우리와 함께 거니시는구나. 우리와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잡수시고, 같이 눕고, 같이 울고 웃고, 그러면서도 결코 꺾이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그렇게 80여 성상을 하루 같이 걸어오신 어머님, 우리는 어머님에게서 어떤 일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는 민족 수난의 걸음을 확인하는 거다’ 그런 것이 이번 수난 주간 명상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예수의 절규의 뜻을 뜻밖에 깨치게 된 것 같습니다. 나가는 날 안(병무) 박사의 지도를 받아 신약 논문 하나 써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부활절 아침기도에서 – 여기까지 쓰고 나가 30분을 뛰고 들어와 냉수마찰을 한 다음 빵과 사과로 간단한 점심을 먹고 나와서 다시 씁니다. – 드러난 것은 모든 참된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 크든 작든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 그 온갖 것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며 찬양하는 하루하루 1년 365일이 모두 부활절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루하루는 그대로 축제일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4월5일 어머님 생신은 마침 공휴일이어서 팥이 듬뿍 든 찰밥을 사서 어머님 생신을 잘 먹으며 지냈습니다. 어제도 찰밥으로 갈릴리교회 성찬식에 함께 했었지요. 저번 접견때 깜빡 잊었는데, 맏아들이 대접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종로에 있는 함경도 순댓집에 가셔서 순댓국에 곁들여서 거기서 내놓는 순대를 잡수세요. 그것 잡수시기까지 어머님 금년 생신을 아직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부디 건강한 가운데 오래 사세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살아있는 민족수난사로서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꺼지지 않는 희망을 주시면서. 큰 아들  봄길에게 가을에 피는 청초한 코스모스보다는 희망찬 봄의 신선한 길이 훨씬 좋은 거 같군요. 가을이 봄이 되었으니 새로워지고 젊어진 거 아니겠오? 아주 아주 좋았어. 우선 종로 함경도 순댓집 가는 길. 청계천 3가에서 31로 쪽으로 가다가 31로 못 미쳐서 마지막 골목으로 종로 쪽으로 들어가면 알라스카라는 아크릴 간판이 보일 거요.  어머니를 자주 모시고 가서 대접해 드리시오. 지난 토요일 아침에 당신의 10일 편지에 영금의 편지, 호근의 파리에서 두 번째로 보낸 카드를 받았지요. 얼마나 기뻤는지. 더군다나 영금의 편지에는 문칠의 돌에 세 식구가 ‘사람의 노래’ 병풍 앞에 돌상을 마주하고 찍은 예쁜 사진이 들어 있어서 나를 정말 기쁘게 해 주었오. 지금도 그 사진을 앞에 놓고 보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오. 문칠이는 영락없는 친할머니 얼굴이군요. 내 건강은 그동안 좀 차질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좋은 편이에요. 오늘도 30분을 뛰고 난 다음 운동 담당이 “숨도 안 차시네요”하고 감탄하는 것이었오. 저번 접견 때 건강이 좀 차질이 생겨 조절하는 때였죠. 무어나 과욕은 금물. 건강 회복도 예외는 아니죠.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보면 거기 심판자 예수가 거의 깡패처럼 우악스럽고 억세게 그려져 있지요. 미켈란젤로가 예수를 정말 바로 그려주었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수만 명 군중을 앞에 놓고 스피커도 없이 종일 날마다 가르치며 부대끼면서도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기쁨과 희망으로 부추겨 올리셨으니 예수가 얼마나 건장한 사나이였겠오? 그래서 나도 단순히 건강한 정도가 아니라 예수처럼 억센 사나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콩밥 세끼에 우유를 셋씩이나 먹어댔더니 지나쳤던 거죠. 그래서 우유도, 콩밥도 끊고 사식으로 위 조절을 해서 지금은 콩밥 아침저녁으로 먹고 점심에는 빵과 과일, 달걀 노른자위 하나로 가볍게 먹고 있어요. 내주쯤부터는 우유를 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군요.  여기 마당에 핀 개나리가 지기 시작한 걸 보니 슬슬 봄이 중반으로 접어드나 보죠? 저번에 목욕하러 가다가 진달래가 져 가고 벚꽃이 핀 것을 보았군요. 그만하면 1979년 봄을 볼 만큼 본 셈이죠. 목련꽃은 바우의 웃는 사진을 보고 있으면 되는 거구. 바우의 목련꽃 웃음을 보면서 사람은 역시 기뻐하도록, 행복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오. 아기들은 잘 먹고 잘 자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 품에 안겨 있으면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마냥 웃으며 좋아하게 되어 있거든요. 밖에서 금년 수난절과 부활절을 어떻게 뜻있게 지냈는지 궁금하군요. 3~4일 안으로 편지들이 들어오면 알게 되겠지요. 금년 수난 주간 독서와 명상을 위해서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을 주문했던 건데, 어찌나 힘든지 그야말로 그걸 읽고 이해하느라고 꽤나 고생하고 있어요. 아직도 떼지를 못하고 있으니까요. 어젯밤에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예수의 절망에 관한 대목을 읽었는데, 몰트만은 예수와 백성과의 관계를 전연 못 보았군요. 역시 유럽의 긴 신학적 전통의 틀을 벗어나기란 그렇게 어려운가 보죠. 짙은 신학적 독단, 형이상학적인 사변에 빠져 있는 느낌이 드는군요. 다 읽은 다음에라야 마지막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아버님, 어머님 전기 건은 전(택부) 형에게 부탁해서 자료를 정리하고 조사 보충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거요. 그러노라면 아버님도 나오시게 될지도 모르죠. 안되면 편지로 연락하면서 준비해야죠. 쓰기 시작하기까지 전 형이 읽고 조사할 것이 많을 테니까요. 내가 연행되던 날 오전에 홍성우 변호사에게 만원을 꾼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어제야 생각이 나지 않겠오. 그리고 보니 출판축하회에 못 오신 변호사님들에게 시집을 증정하는 것을 잊은 것도 생각이 났오. 광주, 부산에는 보내면서. 오영석, 전하은, 과천수녀원에도 보내드려야지요.  곽(노순) 군 목회하면서도 학문을 계속하면서 돌아올 날을 기다리라고 편지하시오. 곽 군이 없는 한국의 구약 학계는 중요한 한구석이 비게 될 테니까.  조갑손 집사가 복수가 차서 단단한 배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한 나의 기도의 열도가 확 뜨거워졌오. 양같이 순한 두 분. 세상에 태어날 때 받아 가지고 온 착한 성품이 별로 때 묻지 않고 그대로 있는 분들. 정말 ‘누이’라고 부르고 싶은 분. 그 좋은 분들에게 그런 시련이 오다니. 하느님은 그들의 믿음을 굉장히 크게 알아주시나 보아요. 그렇지 않고야 그렇듯 무거운 시련을 주시겠오? 하느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는 투병으로 시련을 이기시도록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기도로 그의 병상을 찾아가고 있오. 잘 말씀드려 주시오.  큰이모님께도 내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기도로 병상을 찾아간다고 말씀드려 주시오. 나는 때때로 눈을 감고 가만히 명상하다 보면 이모님이 조용조용 나를 위해서 기도드리는 소리를 듣거든요. 너무 실감이 나서 와락 손을 붙잡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기도의 자리야말로 모든 장벽을 넘어서 영으로 사귀는 자리라는 것을 이렇게 실감하는 거죠. 이모님도 기도하는 가운데 현 목사님의 기도, 나의 기도 소리를 들으실 수 있을 거예요. 1963년 내가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었을 때 온전히 남의 사랑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사랑으로 보살피는 그 손길들이 그대로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병석은 완전히 하느님의 은총에 자신을 내맡기는 때이죠. 그리고 그 은총에 보답하는 길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길밖에 없는 거죠. 이모님도 지금의 병석이 그런 자리가 되었으면 싶다고 말씀드려 주시오. 현 목사님과 같이 아들, 딸, 손자들의 이름 하나하나 부르면서 그 밖에도 동생들, 조카들, 교회 목사님, 친구들, 교회, 나라를 생각하면서 기도로 병석을 차 넘치게 하시라고. 하늘의 축복, 기쁨, 영광이 이모님의 병상을 빛나게 감싸 주실 거라고 믿어요. 평생을 주의 종의 내조자로서 직접 주의 종으로 사신, 당신 자신을 위해서 사신 시간이 별로 없으신 이모님의 병상이 찬양으로 넘치는 병상이 되기를 빌 뿐. 다시 뵈올 날을 기다리면서……. 강(찬순) 집사는 좀 차도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하느님이 사랑의 줄을 늦추지 마시고 계속 잡아당기셔서 완전한 사람으로 일어설 날이 오도록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있어요. 인간으로서도 신앙으로서도 그런 대장부는 정말 드물다고 해야지요. ‘하느님, 강 집사는 나의 믿음의 딸입니다. 가정을 위해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그를 살려주시는 것이 좋다고 확신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다가도 나의 인간, 나의 믿음이 도저히 그에게 못 미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그의 앞에 가면 마음 쓰는 것, 생각하는 것, 어려움에 대처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 나는 퍽 작고 어리게 느껴지거든요. 철이 결혼식에는 내가 여기서 기도로 복을 빌어 준다고 전해 주시오. 강 집사 파이팅. Richard Wright의 ‘Native Son’을 Faye에게 부탁해서 구해주고. 金東里의 ‘乙火’도.  집에 있는 책으로는 네루다의 시집과 李貞桓의 ‘까치房’도 읽고 싶군요. 창비사에서 펴낸 시집들은 대강 다 집에 있는데, 또 읽어보고 싶군요. 함혜련의 시집들 너무 한꺼번에 많이 들여보내지는 말고. 이만 총총 늦봄 안병무 박사, 홍성우 변호사, 오영석, 전하은, 곽노순 박사 (성서 공동 번역위원), 병환 중인 큰 이모님 (아내 박용길의 큰 언니인 박갑길), 조갑손 집사와 강찬순 집사 (한빛교회), 수난 주간을 맞아 민족의 수난과 어머니의 수난을 생각하고 병환 중에 있는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알림. 어머니에게 함경도 순대를 대접할 것을 아내에게 위치를 자세히 알려주며 당부함. 

  • 19790516 가룟 유다의 부활

    바우 할미에게 벌써 5월도 반이 지났군요. 지금은 분명히 늦봄이라고 하겠소. 나의 철인 거죠. 나의 창 앞에 자잘한 흰 꽃이 하나 가득 핀 나무가 서 있기에 물어보았더니 보리수라는군요. 늦봄은 슈베르트의 낭만의 꽃 보리수의 철이군요. 어제 당신 편지 석 장에 호근이가 이탈리아에서 보내 준 카드 한 장 받았지요. 문칠의 사진, 호근의 멋쟁이 사진도. 정말 기뻤소이다. 손자가 저를 닮았다고 해서 기쁘지 않을 할아비가 없겠지만. 여기까지 쓰고는 철필촉이 나빠서 촉을 바꾸어달라고 했더니 오늘이 18일이 되었군요.  할애비의 기쁨은 백두산 꼭대기에나 오를 것 같은 느낌이라오. 어제는 14일 편지가 들어왔는데, 좀 기분이 언짢은 것 같으니 웬일이죠?  나의 건강은 더할 수 없이 좋다고 하겠소. 그저께는 꼭 한 시간을 뛰고도 별로 숨이 차지 않을 정도라오. 요가나 단전호흡법이 심장을 얼마나 튼튼하게 만드는지를 미처 몰랐었소. 어느 책에도 그런 것은 쓰여있지 않구요. 한 시간 뛰고도 숨이 차지 않다는 것은 심장이 아주 튼튼해졌다는 거죠. 안(병무) 박사나 문(동환) 박사도 무리 없이 살금살금 요가를 하면 반드시 심장이나 혈압에 놀라운 효과가 있으리라고 확신하오. 요사이 우유를 하나씩 먹는데, 그건 영양 전체의 균형상 우유는 하나가 충분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죠. 아무튼 6월 접견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그때 와 보면 내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알게 되겠지요. 요사이 나는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과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이라는 찬송가를 부르는 기쁨에 젖어 있어요. 그리고 ‘가룟 유다의 부활’이라는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오. 덕분에 바우의 목련꽃 웃음을 생각할 겨를도, 독서할 시간도 많이 빼앗기고 있다오. 아마도 꽤 큰 작품이 될 것 같은 느낌이 오는군요. 가룟 유다는 어느 제자보다도 뚜렷한 주관이 서 있는 사람이었다고 보겠는데, 그가 예수에게 매력을 느껴 3년을 따라다녔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고 보이지 않소? 그러면서도 그와 예수와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이 있었을 거고. 그가 예수를 팔았다고 할 때, 그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었지요. 그런 관점에서 복음서를 새로 읽기 시작했다오. 가룟 유다의 눈으로 예수에게 아무 긴장 없이 몰입했던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과 가룟 유다의 부활은 그 성격이 아주 다를 수밖에 없지요. 내가 요새 어떤 정신 상태에서 지나는지를 알 수 있겠지요. 예수를 새로운 긴장 관계에서 새로운 안목으로 보는 흥분! 가룟 유다의 복음서가 쓰였다면 어떤 것일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소? 베켙의 희곡 등, 현대 희곡들을 읽고 싶군요 전날 조아라가 입원했다는데, 정선의 딸이겠지요? 웬일인지? 요새 내가 특히 기억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이름에 아라의 이름도 들어있어요. 차진정 권사를 찾아갔을 때 일 기억나지요? 그 씩씩하던 모습, 병문안 갔던 사람들이 도리어 격려를 받던 일.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격려해 주라고 말씀드리고, 앞으로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전처럼 교회와 겨레를 봉사하시게 되도록 위해서 옛친구 문 목사가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한다고 전해주시오. 양(성우) 시인도 수술 후에 회복이 순조로운지 퍽 궁금하군요. 윤(반웅) 목사님, 강(희남) 목사님, 고(영근) 목사님의 건강도 걱정스럽군요. 문안을 전해주시오. 김(지하) 시인에게도 어머님을 통해서 소식을 전해주시오. 임 여사를 통해서 전주에 계시는 여러분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시오. 잊지 않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이런저런 분들 생각하면, 내가 이렇게 건강하고 보람있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송구스러울 정도. 나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느님께 감사할 일뿐이군요. 이건 억지로 자위해서 하는 말이 절대로 아니오. 날마다 부르는 새 찬송가, 가룟 유다의 눈으로 예수를 다시 보는 놀라움 등, 여기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지요. 밖에서 보낸 열 달, 나를 공중 분해하던 세월을 반성하면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새로운 설계 등, 또 자세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생각하면 다만 감사할 뿐이요. 아침에 일어나 203장을 부르고, “당신의 마음에 내 마음은 열려 있습니다.”라는 기도로 하루가 시작되구요. 자리에 들 때면 “이 밤에도 내 마음은 열려 있습니다. 꿈으로 찾아와 주소서” 하며 눈을 감는다오.  호근이 Florence에서 미켈란젤로의 조각들을 보아주었으면 좋을 텐데. 꼭 카나다에 들러오도록 편지를 내시오. 당신 붓글씨 쓰기가 궤도에 오른 것 같아서 정말 기쁘군요. 격려를 보내오. 좋은 작품을 많이 많이……   당신의 늦봄 바우 증조할머니 어머니가 바우를 안고 계시는 사진을 보다가 이사야서 11장 1절 생각이 났습니다. 마른 그루터기에서 돋은 새싹 말입니다. 얼마나 탐스러운 새싹인지. 그리고 그 마른 그루터기가 새싹보다도 더 크게 웃고 있는 모습……. 정말 흐뭇합니다. 80여 성상에 걸친 피눈물 얼룩진 어머님의 수난에서 한 점 티 없는 평화로운 웃음의 햇순이 그렇게 곱게, 소담스럽고 싱그럽게 돋았으니, 어머니, 어머님의 모든 고난이 충분히 보답을 받은 것이 아니겠어요? 감사할 뿐입니다. 접견 오는 한 달을 손꼽아 기다리시는 걸 애타하지 마시고 기쁨으로 생각하세요. 저는 어느새 한 달이 지났나 하고 놀란답니다. 6월 1일 뵈올 때를 즐거움으로 기다립니다. 아주 건강한 모습 보여 드릴게요. 아버님 유언 담긴 편지를 잘 읽고 명심한다고 전해주세요. 지금 같아서는 나가면 무어든 쓰고 또 쓰고 싶은 생각입니다. 성서 번역을 완성하는 일은 성서 공회에서 부탁 않더라도 단독으로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져 갑니다. 원전과 대조해 가면서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나 손댈 데가 많이 발견되는군요. 부디 건강하소서. 바보 같은 어머님의 맏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바울의 말대로 바보가 되는 일 아닙니까? 바보가 되는 만큼 믿음이 깊어지는 일 아니겠어요? 숫제 바보가 되면 억울하지도 애타지도 않게 되는 것 아닐까요? 바우 어미에게 어쩌다가 네가 우리 가문에 들어와서 내가 보기엔 이 겨레의 내일을 상징하는 것 같은 바우를 낳아 주었는지, 생각하면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요새 노래하려면 긴장을 느낀다고? 공자님 앞에서 문자를 쓰는 것 같지만 내 의견을 한마디 할게. 그동안은 자기의 목소리에만 자신을 갖고 노래를 불러왔는데 인제 그것만이 아닌 고비에 다다른 거지. 청중과의 사이와 음악과의 사이의 긴장을 풀라고 하고 싶다. 그 긴장은 곧 적대 관계지. 음악을 내 목소리로 정복하고, 내가 부르는 노래로 청중을 정복한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이 생기는 것이 아닐는지? 음악은 네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거야. 청중도 음악을 사랑해서 와서 앉아 있는 거지. 청중과 함께 음악을 한껏 사랑해 주고 즐기면 되는 거야. 성경에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 있어. 찾아보라고. 긴장이란 일종의 두려움이거든. 바우를 사랑하듯 음악을 사랑하라고. 바우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무슨 긴장이 있을 수 있어? 없지? 마냥 즐겁고 고마울 뿐이지? 그런 경지에서 노래를 부르면 되는 거라고.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럴지 모르지. 아는 것도 누가 옆에서 일깨워 주면 새삼스러울 수도 있지. 한껏 노래를 사랑하고 한껏 즐기라고. 내가 사랑하고 즐기는 만큼 청중도 그 노래를 사랑하고 즐기게 될 거야. 바우 생각보다 가룟 유다 생각을 더 한다고 섭섭해하지 말어. 파이팅! 문규, 영규 아빠에게 전도서 11장 1절을 원문에서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오. “네가 먹을 양식을 바다에 던져라. 먼 훗날 어디서 그걸 만날 거다.” 인생을 이렇게 살면 얼마나 느긋하리오. 너무 조바심을 말기를 바라오. 지금 문규 아빠가 바다에 던지는 것은 10년도 못 되어 되돌아올 테니까. 문규, 영규야 너희 아빠, 엄마의 고생을 잊으면 그야말로 벌받는다. 훌륭하게 자라서 아빠, 엄마의 오늘의 고생을 눈물겹게 갚아 드려야 해. 언젠가 부둥켜안고 춤을 출 날이 오겠지. 그동안 공부도 많이 하겠지만 인간으로 더욱 성숙해야 하는 거야. 큰아버지는 너희가 보고 싶다. 영환, 예학에게 낯선 땅에 가서 그동안 그야말로 赤手空拳에 쌓아 올린 생의 기반을 생각하면 눈물겹지. 형도 너희가 정말 보고 싶고. 인제 인생의 후반기를 같이 빛나게 살고 싶구나. 만나면 쌓이고 쌓인 회포 풀 일도 많고. 호근이 가거든 나를 만난 듯 회포를 실컷 풀어라. 언젠가 만나면 영환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 일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당동교회 청년회에 가서 음악 감상을 시키는 것을 중단시킨 일. 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이다. 한 번은 저녁 예배를 보고 들어와서 손찌검을 한 일. 그 밖에도 많이 있겠지만. 아무튼 살아가다 보면 용서받을 수 없는 일들이 있지만, 그 아픔에서 비로소 우리는 인생을 깨치는 거지. 언젠가 옛이야기를 하면서 보람있게 살아보자꾸나. 형은 부모만큼은 아니라도… 성수, 영금에게 아무 배경도 기반도 없는 데서 생을 설계해 나간다는 일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안다. 계획대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지 않는다고 너무 초조해하지 말아라. 주어진 오늘을 주어진 제약 속에서나마 충실히 살아가노라면 모든 일이 뜻하지 않은 보탬이 되어 돌아온다. 우리 세대의 좌절을 너희 세대가 겪는다는 것은 바라지 않지만, 나의 생을 생각해 봐라. 스무 살에 신학교에 들어가서 서른여덟에 목사가 되었으니 나의 생이 얼마나 좌절과 중단의 연속이었는가? 그리고 그 후로 오늘까지의 나의 생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거든. 내가 순간순간을 최선으로 산 것도 아닌데, 그 좌절들을 하느님은 몇 갑절씩 축복으로 보탬 해 주셨거든. 조바심을 털어 버리고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면 의외로 모든 일은 술술 풀릴 거다. 1979. 5. 16. 문칠의 외할아버지 씀 막달라 마리아, 가룟 유다와 예수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며 ‘가룟 유다의 부활’ 이라는 작품을 구상 중이며 가룟 유다의 눈으로 예수를 다시 보는 기쁨을 표현.  어머니가 증손자를 안고 찍을 사진을 보는 기쁨도 함께.

  • 하느님의 마음이 내 가슴에 울려오기를 바라면서 읽고 명상하고 생각하는 성경

    당신에게   즐거운 시간이었소. 아버님, 호근이만 빠지고 그리운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으니. 채원이하고 좀 더 이야기를 해야 했던 건데. 내 며느리가 된 다음 별로 오순도순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도 바우가 낯을 가려 울지 않고 마냥 즐겁게 웃어 주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지금도 바우의 손이 내 수염을 만지는 것만 같아 내 왼손으로 수염을 만져 보곤 한다오. 은숙이 너무 무리하는 것 같구먼요. 성악가의 생명은 소리고, 소리는 곧 건강에 있는 거니까 무리하지 않도록. 그리고 예술이란 들볶이면 안 되는 거야. 여유라는 것이 중요한 거니까. 의근이, 독일어하고 불어까지 앞으로 마스터해야지. 그런 재간을 땅에 묻어 두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는 거지. 죄라는 게 별것 아니지. 하늘이 준 재능을 살리지 않고 죽이는 것, 그 이상 큰 죄는 없는 거야. 생의 비약대에 올라섰다고 생각하고 한껏 뛰는 거야. 접견 때에도 말했지만 우리 애들은 다 나보다 머리가 좋은 걸 보면 결국 당신이 나보다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가 되고, 나는 장가를 잘 들었다고 해야겠군요. 분명히 우리 애들은 나보다 나은 인물이 될 거라고 믿어요. 성근이도 남 돈 버는 일 심부름이나 하고 다니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걸 가진 것 아니겠어요? 성근이도 한번 크게 뛸 준비를 해야지.  그날 당신 눈이 부었기 때문에 감옥에서 생일을 맞는 남편 생각으로 울었나 보다 생각했었는데, 방에 들어와서 생각하니까 혜강의 어머님이 임종하신 거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제 30일 편지를 받아 보니 역시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신앙인으로, 하느님의 종으로, 하느님의 종의 아내로, 훌륭한 신앙의 증거를 남기시기를 빌 뿐이오. 조(용술) 목사, 안(병무) 박사, 또 신장이 나쁘시다는 이들이 나의 기도 목록에 또 올랐어요. 나는 이렇게 건강한데……. 건강하다는 것이 이렇게 죄송스러울 수가 없군요. 얼마 전에 읽은 시몬느 베이유에 관한 책, 참 좋은 책이었소. 2차대전 중 독일에 ‘본 회퍼’가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베이유라는 기막힌 여성이 있었다는 걸 지금껏 모르고 있었군요. 그의 책을 한두 권 번역하기 위해서라도 불어를 공부하고 싶어졌어요. 내가 읽는 책은 아마 일역에서 옮긴 것 같은데 너무너무 무책임하고 어설퍼서 베이유의 생을 꼭 모욕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번역이 안 좋아서 읽기 힘들지만, 꼭 읽어 보시오. 6월은 나의 생일로 시작되어 우리 결혼 35주년이 들어 있는 달이군요. 우리는 약혼 기간이 사흘밖에 안 되었으니까 지금 이 기간을 약혼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결혼 날을 기다리는 총각, 처녀의 심정으로 살아 보십시다. 난 정말 이제 인생을 제대로 알고 산다는 느낌이라오. 나의 인생은 이제부터라는 생각이니까. 당신도 그래야 하는 거라오. 성경에 거듭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닐는지? 이제 「가룟 유다의 부활」은 대강 윤곽이 잡혔기 때문에 요새는 통일 조국에 관한 집중적인 명상을 시작했어요. 잊어버릴 뻔했군요. 지난번 접견 때 묻는다고 하다가 잊었거든요. (김)종완 씨 요새 어떻게 지내시는지? 김(대중) 선생님께 문안드려 주시고 격려를 보낸다고 해주시오. 그 밖에 여러분에게 문안을 전해 주시오.   당신의 사랑, 늦봄 6월 1일 편지를 보니까 당신 언니는 아직 건재하신 것 같아 안심했어요. 그렇다면 나 때문에 눈이 부었던 것이겠는데, 그렇게 마음이 감상적이어서는 절대로 안 돼요. 아…… 오늘 맑은 날이군요. 아침에 누가복음 7장을 읽었어요. 오늘 새벽에는 박상증 씨와 같이 5가로 가는 꿈 꾸었군요. 7일 아침.   어머님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셔서 기뻤습니다. 어머님도 제 건강한 모습에 안심하셨죠? 그날 불러 드린 찬송을 언제나 큰 목소리로 같이 부를 수 있을 것인지? 그날 어머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제 느낌을 말씀드릴까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라는 말을 가룟 유다가 했을까요? 어머니, 정말 중요한 면을 제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도 그 말을 중얼거리면서 목을 매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도 부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병을 들고 무덤으로 찾아갈 때 그의 입은 이 말을 뇌까리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런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룟 유다도 그 말을 하면서 목을 매었다는 고백을 예수 앞에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으로 예수와 가룟 유다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어머님은 또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싶은 심정으로 복음서를 읽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러셔야지요. 그런데 저는 이번 여기 들어온 이후로 하느님의 마음이 내 가슴에 울려오기를 바라면서 성경을 읽고 명상하고 생각합니다. 잘 때까지도 제 마음을 열고 기다립니다. 말씀을 듣는 것, 혹은 뜻을 찾는 것과 마음을 기다리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뜻이나 생각이나 말씀은 구체적인 곳과 때에 구체적인 문제에 부딪힐 때 그에 대처하는 구체적인 성격을 띱니다. 마음은 구체적인 뜻이나 생각이나 말이 솟아나는 바탕이요, 근원입니다. 큰 마음, 깊은 마음, 넓은 마음, 착한 마음, 맑은 마음, 어진 마음, 아름다운 마음 등등, 거기서 모든 좋은 뜻, 생각, 말, 행동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대신 작은 마음, 옅은 마음, 좁은 마음, 고약한 마음, 탁한 마음, 잔인한 마음, 추한 마음에서 온갖 악한 뜻, 생각, 말, 행동이 나오는 거구요. 때로는 악한 마음에서도 좋은 뜻이 나오는 수도 있지요. 그것은 위선이 되는 겁니다. 남을 속이는 독소를 지닌 선은 악보다도 나쁜 것입니다. 이건 특히 소위 종교인에게 많은 거죠. 여기서는 ‘겉볼안(겉을 보면 속까지도 가히 짐작해서 알 수 있다는 말)’이라는 우리의 속담은 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울리지 않고 뜻, 생각, 말, 행동에만 관심을 기울이다가는 위선이라는 무서운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죠.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의 마음에 울린 인간 예수의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구체적인 성격을 띤 뜻이나 말씀은 모두 사람의 뜻이요, 말인 거죠. 크고 깊고 착하고 어진 마음에서 나온 뜻과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할 때 우리는 기뻐지는 겁니다.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거구요. 악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위선에는 불안과 공포가 따르구요. 위선은 무엇인가요? 남을 위하는 척하면서 실은 자기를 위하는 일이죠. 왜? 남의 것을 속여서라도 자기의 부족한 구석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모든 악, 모든 위선은 일종의 허기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허기증이 없는 사람이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뜻이나 생각 가지고는 안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늘 아무 부족이 없는 하느님의 마음을 사모해야 하고 받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성서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마음에 부딪혀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성서 연구는 너무 ‘뜻’에만 매달려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뜻이 솟아난 하느님의 마음 바탕에 마음을 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님, 계속입니다. 지난 주일 마태복음 5장 8절을 읽다가 누가복음 6장과 대조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거기 제일 핵심은 ‘슬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누가는 당장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있다고 선언한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 주었구요. 마태는 그것을 선포하는 예수의 마음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팔복의 슬퍼하는 자는 제 죄를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는 예수의 마음, 곧 하느님의 마음, 그 마음을 받은 사람에게 기쁨이 있다는 걸 말하는 것을 발견했어요. 나머지 일곱도 그런 각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호근에게   수확이 많은 여행인 것 같아서 정말 기쁘다. 빨리 오고 싶다고? 와서 일하다가 비약하기 위해서 또 나가 보고 하는 것도 좋겠지. 「가룟 유다의 부활」이라는 희곡에 그새 열중하면서 네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는 생각 금할 수 없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 유다와 예수 사이에서 불꽃 튀는 것을 잡아 보고 싶은 거지. 자꾸만 예수와 유다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었으리라는 느낌이 드는 거다. 이젠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이 된 것 같다. 예수는 하데스로 유다를 찾아가고, 같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뇌까리고, 같이 부활하는 거지. 기독교 신앙이 오늘 부딪힌 현실 문제에 조명을 맞추어 보니까 가룟 유다가 다시 살아난 거다. 2천 년 동안 억울한 누명을 썼던 유다가 그 누명을 벗고 다시 살아나는 거지. 너도 그런 각도에서 복음서를 다시 읽어 보아라. 앞으로 네 부자가 같이 공동 작업할 날이 있으리라고 믿고 벌써 아버지는 흥분해 있단다. 부디 몸조심하고 좋은 여행을 하고 돌아오기 바란다. 아마 이 편지를 카나다에서 보게 되겠지.   1979. 6. 5 아버지 씀   61회 생일과 35주년 결혼기념일을 보낸 기쁨, 어머니에게 성경을 읽는 자세에 대하여 깊이 있는 얘기, 구상 중인 ‘가룟 유다의 부활’에 대하여 유럽에서 생활 중인 아들 호근과 나누고 싶은 심정.    

  • 대통령의 비극과 조국의 평화로운 통일

    당신에게   40일 기다린 보람으로 편지를 받는 기쁨, 그 편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는 나의 기쁨이 겹쳐 나는 어제 정말 기뻤어요. 종이 한 장의 무게가 그토록 클 줄이야. 오늘 아침 히브리어로 시편 126편을 읽었더니 첫 절에 “꿈인가, 생시인가”라고 번역된 구절이 가슴에 왈칵 밀려왔소. 전문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우리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가 되는 거죠. 그저께 겨울옷이 나왔고 내 문밖 복도에는 연탄난로가 열을 내고 있어서 오랜만에 사과 차도 끓여 먹는다오. 어제는 밤에 난로를 놓았는데, 날이 풀려서 피지를 않고 월말에 온다는 추위 때나 피우게 될는지? 침낭이 좋아서 영하 11도의 추위에도 내복을 다 벗고 가벼운 몸으로 잘 수 있어서 얼마나 개운하고 좋은지 몰라요. 지난밤도 열두 시에 자리에 들었는데, 단숨에 아침 기상나팔이 울릴 때까지 잘 수 있었소.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로 옆에서 사과 차가 열심히 끓고 있어요. 세타는 당신이 언젠가 짜주었던 꽈배기 세타 (녹색)가 있었지요? 그거면 꼭 좋을 것 같구만요. 그것이 없다면 그보다 좀 여유 있게 짜주면 좋겠소. 요새는 점심은 여기서 울면 등 중국요리를 사 먹는다오. 아주 맛있게 해 주어서 점심때를 더 기다리게 되는군요. 오늘은 간짜장이라고 해서 그만두었지만. 간짜장은 뜨거운 국물이 없거든요. 건강은 단식으로 줄었던 몸이 이젠 완전 원상회복이 되었소. 어제도 60분 잠시도 쉬지 않고 뛰었어도 조금도 힘든 줄 모를 정도였으니까. 12월 접견 때는 아주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리라고 자신하고 있어요. 어머님의 신경통은 아침녁으로 더운물 찜질을 해드리고 주무시기 전에 뜨거운 목욕을 하실 수 있으면 좋을 거요. 약보, 식보에 계속 마음 쓰도록 하시오. 잣죽도 마련해 드리도록 하구려. 당신 붓글씨가 많이 필력이 생긴 것 같아서 좋군요. 구슬같이 예쁜 글씨보다는 힘 있는 글씨가 좋다고 생각해요. 나의 「흰 뫼」 같은 시를 많이 쓰노라면 훨씬 씩씩한 글씨를 쓰게 되지 않을는지? 기완 님에게는 「나의 별들아」라는 소품이 퍽 좋은가 보지요? 「흰 뫼」를 더 좋아할 줄 알았더니만. 꼭 한 가지 충고. 내리긋는 획이 아직도 휘어 있어서, 힘이 빠지는 것 같군요. 내리긋는 획을 줄을 따라 곧게 내리긋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면, 많이 달라지리라고 생각되는군요. 요사이 나의 심정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대통령의 비극이 민족의 비극이요 서러움으로 점점 더 아프게 살을 파고드는군요. 이 나라 초창기 대통령들의 거듭되는 비극은 이 민족의 비극적인 운명의 단적인 표현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국토 분단의 비극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도 정상적인 정치적 발전을 할 수 있었을 테고, 정치인들도 떳떳하고 보람 있는 생애를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루속히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인 민족 분열, 국토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고마운 건 ‘국토’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이 모든 비극을 소리 없이 받아들여 속으로 삭이고, 그것을 거름으로 해서 봄만 되면 영락없이 새싹을 돋쳐 주고 꽃을 피워 주는 국토의 고마움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의 몸은 곧 국토라는 것, 국토의 정수의 정수라는 것을 나는 요가를 하면서 더욱 절실히 느끼는 것이라오. 국토는 결코 절망하는 일이 없어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 다시금 다시금 꽃을 피우고. 우리 집에는 바우를 태어나게 하고 키워 주면서 모든 비극이 기쁨으로, 한숨이 찬양으로 바뀔 날을 기다리고 있는 거죠. 이 국토의 비극 속에 약속된 행복, 한숨 속에서 들려오는 찬양, 절망 속에서 빛나는 희망,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몸이라는 걸 아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나는 특히 6·25의 비극을 생각하고 있어요. 6·25는 우리 민족사의 최대, 최악의 비극이었죠. 그때 죽어 간 수많은 겨레의 죽음을 우리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게 할 수는 없는 일이오. 나는 요새 그 아우성이 나의 살 속에서 들려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군요. 그 죽음들을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의 몸에서, 우리 개인들의 몸에서, 국토라는 이 겨레의 몸에서, 그것은 곧 조국의 평화로운 통일을 이룩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빛나고 값있는 문화를 창조하는 일이지요. 우리는 지금 서구 문명의 세기말적인 증상을 목격하고 있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근대화는 서구 문명을 뒤좇는 일이어서는 안 되어요. 서구 문명은 땅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땅을 착취하는 문명이지요. 땅에서 솟아나는, 땅을 사랑하고 아끼는, 땅의 마음에 어울리는 문화를 우리는 찾아야 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땅을 멸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땅에서 가장 천대받고 있는 것이 땅을 가는 농민들이라는 데 문제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땅을 살찌게 해서 땅에서 무한한 힘이 솟아나게 하는 문화, 땅과 즐거운 노래로 화답하면서 이룩해 가는 기쁘고 즐거운 문화가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문화라는 생각이 이제 뺄 수 없게 내 가슴에 자리를 잡았소. 땅을 떠난 콘크리트의 문화가 아니라 흙 내음을 풍기는 문화를 우리는 지향해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이런 생각과 요가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묻고 싶겠지요. 간단한 이야기요. 요가는 나에게 몸과 마음이 하나임을 실감 나게 깨닫게 해준 거거든요. 이를테면 몸의 값을 마음의 값만큼 올려놓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죠. 내 마음이 시름에 잠기면 한숨짓는 것도 몸, 슬프면 눈물짓는 것도 몸, 기쁠 때 뛰고 웃으며 좋아하는 것도 몸이 아니겠소.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는 몸으로 사랑하는 거구요. 모든 창조적인 일을 할 때도 물론 몸으로 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몸이 곧 나다”라고 말해도 되는 게 아닐까요? 그 몸이 요새 나에겐 눈물 한 방울로 느껴지는 거지만. 그런데 이 몸이라는 게 신비한 것이어서 기막히게 아름답고 좋은 생각을 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대는 것이니! 조물주의 신비라고나 할지! 철저하게 물리적·화학적 법칙으로 살고 움직이는데 그 법칙을 초월하는 몸이 곧 문화 창조의 본체인 마음이라는 걸 신비로 느끼지 않는다면 이상하다고 해야지요. 내가 먹을 걸 남에게 주면서 진정 사람 된 기쁨을 맛보는 몸의 신비죠. 그런데 이 몸은 땅이 준 것이요, 땅이 길러 주는 것이거든요. 우선 요가는 숨 쉬는 일인데, 그 공기라는 게 땅의 숨결이 아니겠소? 땅이 내는 진액을 먹고 햇빛을 받아 자라는 풀포기, 나무 잎사귀가 내뿜어 주는 산소가 내 몸의 숨결이거든요. 땅에서 솟는 물이 이 몸의 생명이구요. 풀과 열매, 낟알들이 우리의 뼈요, 살이요, 피가 되는 거구요. 땅의 정수의 정수가 생각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나의 몸이 되는 거죠. 그래서 내 몸이 국토, 국토의 정수라고 하는 거죠.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이 국토를 내 몸으로(처럼이 아니라) 사랑하고 내 몸을 국토의 극치로써 소중히 알게 되는 거죠. 이리되면 내 마음의 시름이 몸의 한숨이 되고 이 땅의 한숨이 되는 거라오. 바울이(로마서 8장에서) 자연의 탄식 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구약 성서에서는 인간의 죄가 땅을 더럽힌다는 믿음이 있어요. 주민의 죄로 부정 탄 땅은 생산력을 잃는다는 거요, 힘을 잃고 죽는다는 거죠. 이건 땅의 말할 수 없는 슬픔인 거죠. 그런데 하느님 구원의 손길이 사람을 새롭게 하면(성서는 그걸 거룩하게 한다고 부르죠) 하늘과 땅은 기뻐 노래하고 노루, 사슴은 춤을 추고 나무들은 손뼉을 친다고 하거든요. 나는 지금까지 이건 그냥 시적인 표현이라고만 생각해 왔었소.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땅과 거기 있는 만물과 내 몸은 하나인데 어찌 같이 슬퍼하지 않고 같이 좋아하지 않겠소? 이 땅이 받아들여 속으로 새기는 온갖 ‘희비애환’이 그대로 내 몸속에 들어와 내 몸을 이룬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겠소? 6·25 때 죽은 그 많은 사람의 비극이 땅에 스몄다가 지금 우리 혈관에서 외치는 걸 듣는다는 건 조금도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내 몸속에서 외치는 그들의 주장, 아니 이 땅의 주장에 우리는 머리를 숙여야 하고 그 주장을 이 몸으로 이루기까지 이 몸은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이렇게 우리의 몸이 땅과 하나가 될 때 우리의 몸은 다른 사람과도 하나가 되는 거죠. 여기 있는 온갖 흉악범도 내 몸인 거죠. 내 몸으로 아끼고 사랑해야 할 소중한 몸이 되는 거죠. 이렇게 되면 국토통일이 없는 민족통일이 없고 민족통일이 없는 국토통일이 없이 되는 거죠. 그리고 이것이 곧 조국통일, 곧 역사의 통일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이 이상 더 긴급하고 큰 과제가 있을 수 없는 거지요. 통일이 우리에게 있어서 최우선인 거죠. 그러면 ‘선통일 후민주’인가요? 아니지요. 그건 민족통일이 없는 국토의 통일만을 말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전 민족이 참여하는 역사의 통일도 안 되는 거구요. 민족사의 모든 과제를 성취하는 통일이 안 되는 거죠. 우리는 우리의 몸인 땅을 살찌우고 땅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고 문화 창조의 토대가 되어 주는 새 세계에 눈을 뜰 필요가 있어요. 이것이야말로 묵시록 21장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죠. 당신 동창님께 각별한 문안을 드려주시오. 참고 기다리노라면 회포를 풀 날이 있겠지요. 김 장로님이 우리 집에 오셨었다니, 건강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기쁘군요. 아 참. 영규 졸업 사진이 든 선희의 장문 편지가 서울에서 전송되어 와서 정말 반가웠었소. 조카들이 하나같이 자랑스럽군요. 여기서는 사진을 한 주일 주었다가 찾아가기 때문에 지금도 성근의 결혼 때 사진 석 장이 있는데, 그도 사실 어제로 찾아가야 할 것이 아직 그대로 있는 형편이오.      어머님   누워 버리실 정도로 긴장이 풀리셨다니 어머니답지 않으시군요. 앞으로 우리가 민족으로서 부딪치며 풀어나가야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그 일들을 위해서 어머님의 씩씩한 격려와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지 아십니까? 아버님, 어머님이 씩씩하게, 꿋꿋하게 서 계시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짐작이나 하세요? 어머님이 기운을 놓으시면 그만큼 우리는 김이 빠진다는 것을 아세요. 어머니, 약보, 식보도 사양 마시고 많이 많이 잡수시어 우리와 같이 좋은 자리, 기쁜 자리에 가셔야 합니다. 그 자리에 어머님이 안 계시다면 우리는 그 자리가 하나도 좋지 않고 기쁘지 않을 거예요. 만주에서부터 일당백으로 살아오시던 그 기개를 되찾으세요. 요새 제가 드리는 ‘주기도’를 적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하느님의 마음에 쏟아부어 형체도 없이 녹여서 제 생에 쏟아부었더니 이런 기도가 되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울고 웃으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을 펼쳐 주시는 하느님! 당신의 크신 마음, 우리의 작은 가슴을 울려 우렁찬 찬양으로 천지를 진동하게 해주소서. 사랑으로 이 세상 정복하시고, 올바른 뜻 세우시어 평화의 새 나라 세워 주소서. 우리 모두 먹을 걱정, 입을 걱정에서 풀려나 사람 된 기쁨에 젖어 서로 아끼고 떠받들며 오늘도 내일도 값있게 살게 해주소서. 서로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으면서,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전우가 되어 다 같이 역사의 새 출발점에 나서는 기쁨, 당신의 한없는 너그러우심으로 우리 가슴에 안겨 주소서. 이것을 믿을 수 없어 몸과 마음이 무너질 때면 눈물 글썽이는 당신의 모습 쳐다보게 해주소서. 우리를 불신의 구덩이에 처넣으려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건져내 주소서. 할렐루야, 당신의 영광, 정의와 사랑으로, 자유와 평화로 길이 빛나리이다. 아멘.’  저도 건강할 테니까, 어머님도 건강하세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 뵙기를.   1979. 11. 16.   대통령의 죽음을 보며 민족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평화통일 방안을 얘기함. 어머니께 보내는 ‘주기도’.  

  • 37년간 아내에게 진 빚

    37년을 하루같이 살아온 당신에게   이달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63년 고개를 넘기는 달인 동시에 당신이 37년을 하루 같이 나의 마음의 안식처요 보이지 않는 기둥이 되어 준 결혼 37년을 맞이하는 달이군요.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것을 느끼고 있어요. 지난 6월 1일은 참으로 즐거웠소. 그 좋아하는 인절미를 많이 먹지 못해서 당신은 퍽 서운한가 보지만, 나는 그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 시간 담소하는 즐거움이 너무 컸어요. 당신은 (정말 조금도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37 년 전보다 훨씬 더 충만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었소. 37년 동안 우리는 결코 늙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 나게 해주었소. 늙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해서 쑥쑥 자라고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정말 기뻤소. 이것이 모두 우리에게는 갚아도 갚아도 도저히 다 갚아 낼 수 없는 사랑의 빚이 아니겠소? 여기까지 썼는데, 구매 담당이 왔기에 딸기 한 근, 우유 하나, 치약 하나 주문하고 무인을 찍어 주었더니, 기막힌 시상이 떠오르는군요. 그동안 엄지손가락 지문이 다 없어지지 않나 걱정되도록 무인을 많이도 찍었는데, 요새는 그것이 모두 하찮은 나를 확인하는 무인이거든요. 그런 무인이 아니고, 민족이 통일되는 날, 당신의 눈에서 쏟아질 눈물로 이 손을 깨끗이 씻고 당신의 부드러운 가슴 한복판에 활활 불타오르는 무인을 꽉 찍고 가슴이 터져 죽고 싶다, 그런 심정을 읊어 보았소.  그런데 당신과 나와의 지난 37년은 몽땅 내가 당신에게 빚지는 생이었죠.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없었을 거라고 믿고 있소. 당신은 몹시도 신경이 가녀린 나를 부드럽게 감싸 주는 대지의 품이었다고나 할지? 지난번 접견 때도 말했지만, 파란 많은 민족의 63년 역사 속을 뚫고 걸어온 나의 생은 송두리째 사랑의 빚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구려. 나는 너무나 훌륭한 부모님에게서 몸과 마음을 받고 그 그늘에서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소. 너무나 좋은 스승들과 친구들, 형제들 사이에서 숨 쉬며 꿈을 키울 수 있었고. 게다가 당신 같은 짝을 만나 좋은 아들, 딸을 두고, 바우, 보라 같은 친손자, 문칠이 같은 외손까지 두고, 너무나 깨끗한 젊은이들과 가슴을 맞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것도 배웠지요. 그리고 나의 마음을 깨끗하게, 튼튼하게, 아름답게 살찌워 주는 많은 사상가, 문인, 예술인들의 피땀 어린 업적들 또한 사랑의 빚이 아니겠소? 그러나 조금 있으면 배식이 될 콩밥 점심이 내 앞에 놓이기까지 애쓴 모든 사람의 손길을 거쳐서 오는 사랑의 빚을 나는 요즈음 더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그 갈퀴같이 굳어지고 터진 손길들 위에 나로서는 갚아 낼 길이 없는 사랑의 빚을 갚아 주십사고 목이 메어 기도하곤 하지요. 조 목사님은 지금 나의 생이 그 빚을 갚는 것이라고 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요. 이 겨레를 위한 나의 작은 고생은 이미 나에게 존경과 찬양으로 여러 갑절 되돌아왔으니까요. 빚만 더 진 셈이지요.  전주에서 얻은 시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기어이 여기서도 빚을 섬으로 지고 마는구나.’ 게다가 하느님은 나에게도 너무너무 큰 것을 계속해서 주시는군요. 오늘 아침에도 고린도 전서를 1장부터 11장까지 읽으면서 또 중요한 것을 깨달았어요. ‘너는 부름 받던 그때 그 상태로 있으라’고 권고한 바울의 말이 결코 소극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소. 요새는 ‘나의 신약성서’라는 책을 구상하고 있어요. 누가복음, 사도행전, 고린도서, 빌립보서로 이어지는. 정말 안(병무) 박사가 윤동주에 관한 책을 쓰라고 했었는데, 저번 날 동주의 ‘별똥 떨어질 때’라는 산문시를 읽다가 이제 나도 동주에 관해서 무언가 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소. 요가만 해도 그렇소. 약을 끊고 두 주일 만에 200-130에서 130-90으로 혈압이 완전 정상화되었을 뿐 아니라, 거의 한 달 동안 두통을 모르고 살게 되었구려. 그것뿐인 줄 아세요? 사흘 전에 요가를 하다가 갑자기 교도소가 고요해지는 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가만히 살폈더니, 교도소는 달라진 것이 없었소. 달라진 것은 내 머리 뒤통수 속에서 40년 동안 나를 괴롭히던 소리가 멎은 것이었소.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요. 정말 하늘로 날 것 같은 기분이요. 이 일을 어떻게 하느님께 다 감사하겠소?   또 엄청난 빚을 하느님은 내게 지워주시는구려. 이런 걸 즐거운 비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소?  복음 – 기쁜 소식-이란 바로 이런 거죠. 그것이 우리의 생 구석구석에서 복음이 되어야 하는 거죠.  방금 점심을 먹고 나와서 계속하는데, 먹은 밥이 살로 가서 건강, 행복, 목소리, 마음, 생각, 뜻, 보람 있는 삶이 되는 것이 모두 모두 복음이 아니겠소?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나의 빚, 내가 탕감받고 사는 사랑의 빚을 일만 달란트라고 하셨더군요. 거기 비해서 내가 용서해 주는 빚이란 기껏 일백 데나리온이라는 것이었소. 그것이 얼마만 한 차인가요? 현대 영어 번역(NEV) 성서는 한 달란트를 천 달러라고 번역했어요. 그때 로마의 화폐 가치를 오늘 미국의 돈으로 환산해서 번역한 거죠. 그런데 한 달란트가 몇 데나리온이냐면 육백 데나리온이오. 그러면 일백 데나리온은 대략 백오십 달러라고 보겠지요.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가 탕감받는 사랑의 빚은 천만 달러인데, 그것을 용서받고 살면서 백오십 달러 내게 빚진 사람을 용서 못 한대서야 너무 야박하고 각박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기도문의 죄의 용서를 비는 대목이 이해되는군요. 내가 백오십 달러 용서해 주었으니 나의 천만 달러 빚을 용서해 달라고 빌 수 있겠어요? “용서받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줄 알아 티끌 같은 빚이라도 용서해 보았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겠어요? 땅 위에서 맺힌 매듭들을 용서로써 풀면서 살 때,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거죠. 오늘은 목요일, 하루 종일 용서를 빌면서 보내는 날, 우리 속의 모든 매듭을 풀고 몸과 마음이 하나로 어울리는 기쁨을 주십사고 비는 날이오. 이렇게 우리의 나날은 천만 달러 빚을 지면서 백오십 달러 빚을 벗겨 주면서 용서하는 즐거움, 서로 푸는 즐거움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다만 감사할 뿐이지요. 또 한 해 그런 기쁨을 뿌리면서 살아 봅시다. 정말 그날 뵈니까 아버님이 좀 부으신 것 같던데, 자세한 건강 진단을 받으셨으면. 성근이, 채원이 너무 말랐어. 나한테서 요가를 배워야 할 터인데. 은숙에게 써야 하겠기 때문에 오늘은 이만. 사랑 은숙에게   너희가 보낸 생일 카드와 함께 소식을 듣고 기뻤다. ‘극적 진실’을 노래하도록 지도하는 이에게 한 번 레슨받고 노래를 못 부르게 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정말 기뻤다. 1. 네가 이번에 그 경지를 뚫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개바윗등에 갔다 오는 격이기 때문 (좀 심한 말일까? 용서) 2. 한 번 레슨에 목이 막힐 정도 은숙이는 비상한 예술적인 감수성의 소유자라는 것이 아니겠어? 만세!  이제 은숙이는 ‘내가 노래를 부른다’는 생각을 깨끗이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예술의 신 뮤즈가 은숙의 속에서 은숙의 목청으로 노래 부르게 되어야 한다. 예수가 “내가 하느님 안에, 하느님이 내 안에”라는 말씀을 하셨지. 그런데 은숙의 하느님은 뮤즈인 거야. 기도하라고. 예술이 진정 예술이 되려면 그런 종교적인 경지에 깊이 들어가야 해. 예수님의 하느님은 ‘사랑’이었어. 나는 지금 그 사랑의 하느님을 ‘슬픔’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그런데 사랑은 아름다운 거지. 철학자들의 하느님은 ‘참’이고 플라톤의 하느님은 ‘선’이었지만, 예술가의 하느님은 ‘아름다움’ 곧 뮤즈인 거지. 사랑도, 참도, 선도 아름다운 거야.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이요, 참이요, 선이요, 아름다움인 거야.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이요 참이요 선이기 때문에 아름다우신 거야. 멋진 분이시라는 말이지. 사랑과 참과 선과 아름다움의 근원이요 창조자이신 거지. 그 하느님이 은숙의 속에서 은숙의 목청으로 노래를 부르시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야. 이제 정말 그 기막히고 그윽하고 깊은 하느님의 품에 어린애처럼 푹 안기라고. 그 하느님이 온몸에 넘치시도록 기도하라고. 이것을 종교에서는 죽었다가 다시 나는 거라고 한다. 예술가도 반드시 그런 경지를 지나야 하는 게 아닐까? 호근이는 ‘극적인 진실’이라고 했더군. ‘극적인 진실’이 무얼까? 나는 그걸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의 기원과 본질이 슬픔이 아닐까? 그래서 드라마의 본령은 ‘비극’인 거겠지. 희극도 따지고 보면 그 속엔 몸을 가누기 힘든 슬픔이 있는 것이 아닐까? 드라마 작가들은 왜 비극을 쓰는 것일까?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 무지무지한 고독과 절망 속을 절망하지 않고 몸부림치며 헤엄쳐 나가는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슬픔으로 표현되는 사랑에서 사람은 위안을, 용기를, 희망을, 기쁨을 찾는 것이 아니겠어? 나는 하느님을 슬픔으로 경험하면서 비로소 그의 사랑을 가슴 뭉클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지금 은숙이는 그걸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은숙이 예술의 출발점이 된다고 나는 굳게 믿어요. 그 슬픔이 예술로 표현될 때, 그것은 서정이 되는 거 아니겠어? 나는 그 대표적인 예를 한국에서는 한용운, 윤동주에게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두 분의 시를 읽으면서 슬픔의 서정을 키우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은숙이는 너무 성량이 커서 어지간한 서정으로는 제어하기 힘들 거라고 믿어. 그렇기 때문에 음악 수련과 함께 시를 많이많이 읽어야 할 거라고 믿어. 나는 믿어. 은숙이에게 그 목소리를 주신 하느님이 은숙의 속에 들어가셔서 훌륭한 노래를 불러서 인간의 슬픔을 쓰다듬어 주시고 기쁨을 주실 거라고. 이제 어린애로서 새로 시작해요. 나는 그동안 요가를 해왔는데 혈압은 200-130까지 올라갔었어. 그래서 원점으로 돌아가서 가장 기본적인 데서부터 다시 차분히 시작했더니 두 주일 만에 고혈압뿐만 아니라 40년 고생하던 머릿속 소리도 이겨 낼 수 있었어. 바로 그거야. 은숙의 목소리에서 하느님의 노래가 울려 퍼질 날을 기다리면서…….   당신에게 은숙에게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윤동주의 시집, 또 문병란 시선, 이종욱 시선 (창비)를 보내 주시오. 나의 시집도 심심하면 읽게 보내주시오.    결혼 37주년을 맞아 아내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성악가인 며느리에게 예술의 경지에 이르러면 종교의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전함.  

  • 고마운 발바닥

    당신에게 (11월8일) 오늘 아침에 시편 131~136편까지 히브리 성서로 읽고 고린도 후서 11장을 읽고는, 너무 햇빛이 좋아서 팬티만 입고 일광욕을 하면서 예배 시간을 보냈구먼요. 지금은 오후, 사랑하는 벗들과 같이 예배하는 심정으로 편지를 쓰는 거요. 햇빛을 받으며 손바닥으로 온몸을 문지르는 일이 그대로 하느님을 예배하는 일이 되는 것을 나는 요사이 절실히 느끼는 거요. 이 질그릇이 그렇게 소중해지는 거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얼마나 실감 나는 말인지!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두 손바닥으로 애정을 담아 문지르다 보면 내 몸을, 아니 이 질그릇을 두 손으로 정성껏 문지르듯 이웃을 살뜰히 사랑한다면, 거기가 바로 하늘나라가 아니겠소? 그렇게 내 몸을 문지르다가 나의 두 손바닥은 마침내 발바닥을 문지르게 되었지요. 발바닥을 문지르다가 나는 정말 가슴이 뭉클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오. 거의 햇빛을 못 보고, 온갖 굳은 땅을 밟고 다니는 발바닥, 냄새나는 신발 속에서 무좀이 나서 귀찮아 죽을 지경이 되기 일쑤인, 나 자신도 거의 알아주지 못하는 발바닥, 나의 인생의 맨 밑바닥인 발바닥이 갑자기 눈물겹도록 고마워지는 거지요. 63년 동안 한 번도 고마움을 알아주지 않았는데, 불평 없이 나를 오늘까지 지고 다녀 준 발바닥이 고마워 더욱 뜨겁게 만져 주다가는 입술을 대고 키스해 주곤 하지요. 그럴 때면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작은 발바닥으로 대한민국 천지가 좁다고 돌아다니는 당신을 생각하고, 나가는 날로 당신의 발바닥을 눈물로 닦아주고 싶어지는 거예요. 키스도 해주고. 성경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는 말이 있지만 ‘발’이 아니라 ‘발바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는지? 전할 좋은 소식도 없으면서 애가 타서 돌아다니는 발은 어떻다고 해야 할까요? 아마 “얼마나 서러운고”라고 해야 하겠지요. 이만하면 나의 오늘 아침 예배의 뜻이 무엇인지 알만하겠지요? 어제 새벽에는 윤반웅 목사님과 같이 임자 없는 새 무덤에 둘러서서 장례식 예배를 드리는 꿈을 꾸다가 깨었군요. 윤 목사님 찬송가를 인도하시면서 나더러 성경을 읽고 증언해 달라는 것이었소. 그래서 성경을 뒤적이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의 경험을 하신 다음에 이야기하셨다면, 그 이야기는 그전에 하신 이야기와는 퍽 달라지지 않았을까?”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꿈에서 깨었더니, 창에 새벽 푸른 빛깔이 물들어 있었소. 그 절망적인 터널을 통과해나가신 예수의 마음을 불러내는 일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셈이지요.   나는 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기 전에 피눈물로 읊조리기만 하고 종이에 옮기지 못하고 간 시들을 어떻게 살려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었는데, 우리와 예수와의 관계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는지? 누가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마음에서 절망적인 어두움을 뚫고 나간 예수의 마음을 읽었던 것이 아닐까요? 스테판이야말로 그 예수의 마음의 울림으로 생을 끝냈다고 누가는 믿었던 것이 아닐까요? 십자가란 하느님이 인류에게 용서를 비는 사건인 거죠. 그런 방식으로 인류에게 사죄를 선포하시는 거구요. 제4복음서 저자는 ‘사랑’밖에는 할 말이 없었던 거구요. 그런데 나는 요새 슬픔이 씻겨진 사랑(헬라 문명을 통과하면서)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은 은총과 긍휼과 자비로 참고 참고 또 참으시는 분이셨어요. 제 태에서 나온 자식이 실패하고 고생하고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애를 태우고 가슴 아파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긍휼이라고 한다면, 이건 사랑이기보다는 슬픔이지요. 그러나 그냥 슬픔이 아니라 사랑으로 푹 젖어 있는 슬픔이지요. 슬프다 못해 가슴이 찢어져 피를 쏟는 사랑이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대자대비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는지? 그동안 우리의 주석은 문자에 너무 얽매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예수의, 하느님의 마음을 우려내는 일을 주석의 과제로 삼아야 하지 않을는지? 그런 점에서 참 좋은 주석은 성서 학자들에게서 보다 예술이나 문학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성서학자들의 공적을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어제는 ‘악에서 구해 주소서’를 기도하는 날인데, 저녁에 자리에 들어 이 기도를 드리다가 깨달은 것은, 악을 쳐부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건져 달라고 비는 것은 소극적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소. 분명히 소극적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악과 싸우는 것을 우리 기도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핵심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라는 것을 어제야 깨달을 수 있었어요. 오늘은 이만큼 쓰기로 하지요. (11월14일) 어제는 좀 서글픈 접견이었던 같군요. 약해지신 어머님의 얼굴만 쳐다보고, 손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하는 접견이어서 그랬던지, 마음껏 이야기도 못 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군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신 어머님이나 당신, 성근, 또 같이 오셨던 두 분의 심정은 나보다 더했겠지만. 저녁때 두둑한 세타를 받아 입었더니, 얼마나 따뜻한지 몰라, 고마워요. 어제도 말했지만, 잠자리에 들어서 발이 녹지 않아 잠을 못 자던 고통이 갔기 때문에, 겨울을 나기가 훨씬 쉬워진 셈이지요.  하루 두 끼니 내 몸에 채우는 열에너지는 바로 쌀 한 톨 한 톨에 담겨 있는 이 땅의 가난한 농민들의 애타는 염원이요, 그 염원으로 불타오르는 하느님 사랑의 뜨거움이기 때문에 요까짓 추위쯤이냐고 생각하며 이 겨울 추위를 녹여 버릴 거예요. 마침 오늘 당신의 편지가 곁들인 백두산 천지 사진이 들어와서 흐뭇했어요. 그 추운 백두산 꼭대기 흰 눈 위에 피어있는 노랑꽃 나무의 싱싱한 푸르름, 그 그림을 벽에 붙여 놓고 보면서 나도 저 강인한 생명의 아름다움으로 이 겨울 추위를 웃어줄 것이오. 또다시 고맙군요. 그 그림에 딸린 시도 좋았구요. 이역만리 타향에서 고국의 통일을 비는 그 애타는 마음으로 내 가슴도 탈 테니까…….이스라엘의 구원을 보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었던 시몬, 안나처럼 이 나라의 구원, 곧 이 나라의 통일을 보시기 전에는 우리 아버님, 어머님도 눈을 감으실 수 없죠. 이제 아버님, 어머님도 그 확신을 하느님께 받으셨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오. 찬양, 찬양. 어쩌다 보니 용서를 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거의 매번 언급하는 것 같군요. 눈만 감으면 그런 하느님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치고, 그 모습이 내 마음에 깊이 파고드는 때문인가 보오. 본 회퍼는 ‘하느님의 무력’을 말했는데, 그 의미는 별로 밝히지 못했던 것이 아닐는지? 나는 그걸 이렇게 이해하고 싶군요. 하느님은 무력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손을 쓰실 수 없는 거라고. 왜? 우리의 운명, 역사의 운명을 사람들에게 완전히 맡기셨기 때문이지요. 가슴이 터지는 아픔을 겪으시면서도 다만 보고 계실 수밖에 없죠. 그러니 가슴이 터지는 아픔으로 용서를 빌 수밖에 없죠.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슬픔이 아니겠소? 동양에서 부모상을 당하면 자식은 죄인이 되죠. 부모의 은혜를, 그 엄청난 빚을 다 갚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자식이 없지요. 절대로 그러한 부모상을 당해서 죄인이 되지 않을 자식이 없지요. 그러나 그 마음과, 자식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은 또 다른 것 같아요. 자식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은 그냥 아픈 거예요.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일 것 같군요. 그 하느님의 슬픔이 때로는 무서운 분노로 폭발하면서 역사 속을 흐르는 거죠. 하느님의 마음에 가슴을 열고 있는 사람들(역사의 주인)의 마음에 울리면서! 하느님이 역사를 이끄신다면 사람들의 마음에 울리는 당신의 슬픔으로 이끄신다고 믿어야 할 것 같군요. 찢어지는 가슴에서 당신의 뜨거운 피를 역사 속에 쏟아부으시면서, 그 아픔과 슬픔으로 역사를 움직여 나가신다고 나는 믿어요.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몰트만이 생각하듯 성부와 성자 사이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비는 하느님의 슬픔으로 역사의 한복판에 서있는 거죠. 십자가는 인간의 절망과 고뇌를 메고 어두움에 도전한 사건이라는 면과 함께, 용서를 비는 하느님의 아픔과 슬픔이라는 두 면을 지니고 있는 거요. 그런데 이 둘은 하나인 거요. 하느님의 마음이, 그의 슬픔이 인간의 절망과 고뇌를 외면할 수 없었던 거죠. 그 마음이 곧 용서를 비는 마음이오. 인류에게 사죄를 선포하는 것이었죠. 이렇게 진정 아프고 슬픈 사랑만이 맺힌 매듭을 풀고 막힌 담을 허물고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를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라고 본 바울은 십자가의 뜻의 깊이를 바로 들여다보았다고 하겠지요. 민족 화해라는 것도 말이야 쉽지만, 진정 십자가의 절망과 고뇌, 그 아픔과 슬픔, 모든 것을 용서하고 용서받는 하늘 같은 마음에서만 울려 나올 수 있는 말이겠지요. 1981년 크리스마스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고 싶은 나의 마음은 어제 말했지만, 잘 모를 것 같아서 여기 다시 적지요. “이 슬픈 땅 산허리에서 뿜어내는 아침 햇살이어라. 아침 햇살을 숨 쉬는 사랑의 눈물이어라. 진실의 반짝임이어라.” 사랑과 진실이 하나가 될 때, 그것은 끝도 없는, 깊이 모를 슬픔이 되는 것 같소. 그런 슬픔만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인 거고, 그런 슬픔이 역사를 움직이게 되어야 하느님의 마음이 역사에서 실현된다고 말해야 할 것 같구려. 오늘은 이만큼 쓰지요. (11월16일) 어제 주일 날 아침 꿈 이야기부터 쓸까요? 어느 교회에 갔는데, 나의 제자가 새로 취임하는 날이었어요. 그런데 그 교회 마당에 내려갔더니, 거기 하늘을 덮는 큰 나무가 서 있었어요. 자그마한 숲 정도 큰 나무였소. 세상에 그렇게 큰 나무가 있을 수 없지요. 그런 고목인데, 마른 잔가지 하나 없는 싱싱하게 젊은 나무였어요. 옆으로 뻗었던 가지들이 아래로 굽어서 온 공간을 감싸 주었는데, 불이 켜진 듯 속이 환했어요. 눈을 들어보니, 그 나무가 끝나는데, 같은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이었소. 장관이었소. 꿈을 깨었더니, 비닐 창이 푸르스름 새벽을 알려주고 있었소. 이제 완전히 터널을 통과한 것 같은 느낌이었소. 마음에 우러나는 감사 기도로 주일을 맞았지요.  아침을 먹고 앉아 찬송을 부르는데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나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여유 있고 우렁차지 않겠소? 나의 한창 시절이었던 20대에도 이런 목소리는 내게서 나 본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해방의 종소리」, 「뜨거운 마음」, 「맑은 샘 줄기 용 솟아」 등을 부르다가, 또 허밍으로 부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시오? 찬송가를 들여다보며 가사에 정신이 빨려 옆에 있는 사람도, 하느님도 잊고 찬송을 부르는 예배 형식을, 허밍만으로 하늘의 마음, 형제들의 마음과 같이 울리는 경험을 하는 예배로 형식을 바꾸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작곡가들이 제목만 있고 가사가 없는 허밍용 찬송을 작곡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글자에서 풀려나서 옆의 사람과 손을 잡고 어깨를 걸고 몸을 흔들면서, 때로는 손뼉을 치면서, 옆의 사람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마음과 마음이 울려 찬송을 부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바싹바싹 마른 목소리가 물기 오른 싱싱한 젊은 목소리가 되니까, 미친 소리 같지만, 두 며느리의 지도를 받아 가면서 성악 훈련을 본격적으로 받아 보고 싶은 생각이 다 드는군요. 오페라는 무리지만 성심에게서 가곡을 배우고 싶어졌구요. 오현명 선생에게서 한국 가요 창법도 배우고. 지난번 금식 기도 후로 나는 몸과 마음이 이렇게 새로워지고 젊어졌군요. 그동안 당신이 육감이 있어서 노래들을 들여보내 주었나 보죠? 지금도 나의 코끝에는 포스터(Foster)의 「Beautiful dreamer」가 향내처럼 묻어 있어요. 그렇게 배우고 싶으면서도 못 외던 「개척자」도 3절까지 보지 않고 부를 수 있게 되었구요. 박태기 선생 작사, 작곡인 「은진 교가」를 부르면서는 좀 눈물을 흘리기도 하구요. 쪼깐이들과 같이 부르던 노래들을 흥얼거리면서는 콧날이 찡해 오기도 하구요. 난 요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한국 속담을 회의하기 시작했어요. 이건 군주 시대의 속담이에요. 민주주의 시대에는 “아랫물이 맑아야 윗물이 맑다”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소. 윗물이 맑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가 아니겠소? 아버님이나 동환이가 생각하는 ‘국민교육’, ‘민중교육’, 안(병무) 박사나 서(남동) 목사가 생각하는 ‘민중신학’, 내가 깨친 ‘새살의 생명’ 등은 다 아랫물을 맑게 하자는 것이 아닐까요? 맑은 호수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사람들이 그 호숫물로 얼굴을 씻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일을 위해서 한국에서 기독교와 불교는 손을 잡아야 할 것 같군요. 하느님의 나라와 함께 회개를 외치신 예수의 심정을 이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내 혈압 때문에 모두 걱정을 할 것 같은데, 오늘 아침 의무과장 이야기는 추위에 몸이 적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과도기적인 현상이라는 거였소.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고. 뒤통수가 굳어진다든가, 머리가 아프다든가, 그런 일이 전혀 없고, 몸은 가볍고 머리는 맑기만 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어요. 오늘 아침에도 170-120, 체중은 66 kg. 그러나 안심해서는 안 되지요. 나는 건강관리에는 도사니까 안심, 안심. 어머님 건강을 위해서 더 신경을 써 주시오. 내 생각에는 콩을 여러 가지로 많이 먹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콩가루, 콩비지, 콩죽 등등. 화분에다 콩나물을 길러 먹어도 좋고요. 들깨도 상비해 두면 좋을 것 같군요. 성심이는 꼭 한약으로 보해 주도록 하시오. 할머님이 ‘부디’ 이야기를 시작하시다가 마셨는데, 바우가 비운 자리를 보라가 훌륭히 채우는 것 같아서 정말 정말 흐뭇하군요. 채원이 미국 갔다 온 소식을 가지고 오는 줄 알았는데, 못 보아서 좀 서운했군요. 독일에서는 호근이가 보냈다는 편지와 사진이 아직도 미달. 그렇게 쉽게 편지를 잘 쓰는 호근이가 그 정도 바쁘다면, 그만큼 성과가 많은 거겠지요. 당신이 들여보낸 그림 (웃으시는 예수)는 보기만 하고 영치시켰소. 그것도 편지로 부쳤으면 들어오는 건데. 영미의 그림도 그런 식으로 들어와야 내가 받을 수 있을 거로구만요. 이제 한 달 남짓하면 크리스마스인데, 감옥 안팎, 국내 국외의 친지들에게 뜻깊은 성탄이 되기를 빌고 또 빌 뿐이요. 모두 모두에게 나의 뜨거운 마음을,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마음을 보내 주시오. 그들의 뜨거운 마음으로 나의 몸과 마음도 뜨거워질 거구요. ‘성령’도 한문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하느님의 뜨거운 마음’이라고 밖에 번역할 길이 없었지 않았을까? 나에게 이 뜨거운 마음을 안겨준 당신은 나에게 하느님의 사도인 거죠. 그 불덩어리를 뜨겁게 안고 이 겨울 추위쯤 간단히 이겨 내는 거죠. 만세, 만세. 저녁이 들어왔군요. 입에 침이 돌아서 이만. 사랑, 1981. 11. 기도의 의미에 대한 명상과, 아내가 보낸 그림과 통일을 노래하는 시에 대한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