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아름다움의 시, 맑음의 시, 통일정서의 시
아름다움의 시, 맑음의 시, 통일정서의 시 申庚林(신경림) 1 문익환 목사와 나는 문학과는 상관없는 모임에서 비교적 자주 만나는 편인데, 둘이 이웃해 앉게 되면 으례 문학 얘기를 한다. 정치적·사회적 성격의 모임에서도 당장 걸린 문제는 제쳐놓고 문학 얘기를 하는 일이 더 많으니, 아무래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글장이인가 보다. 더러 그는 주머니에서 최근 쓴 것이라며 시를 꺼내 보여주기도 하고, 이때마다 나는 비교적 솔직하게 그 시를 읽은 느낌을 말해준다. 어쩌다 내가 좋은 시라고 칭찬이라도 하면 그는 어린애처럼 좋아한다. 그래서, 세상 보는 눈이 조금씩은 달라, 민주화라는 큰길을 함께 가면서 서로의 사이에 생기기도 하는 장막 같은 것이 쉽사리 걷히고 만다. 기실 나는 그의 지도노선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경우가 더 많았지만 그 일로 해서 사이가 나빠졌거나 서먹서먹했던 적은 한번도 없다. 그 인연으로 해서 이 발문도 맡게 되었지만, 그가 「열두 달 아침」을 내게 보여준 것도 한 운동단체의 북적거리는 집들이 자리에서였다. 그 시가 주는 신선하고 산뜻한 감동을 말하고 ‘창비’에 발표했으면 하는 뜻을 비치자, 그는 이 시가 구작임을 전제하면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다치고 하는 이 판국에 이런 한가로운 시를 발표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이겠는가 물었지만 몹시 좋아했다. 역시 그는 지도자이기 전에 시인이었던것이다. 그때의 느낌도 그랬지만 다시 읽어보아도 그의 시 가운데 「열두 달 아침」만큼 인간 문익환을 잘 보여주는 시는 드물다. 여기에는 세상을 보는 그의 어린애처럼 맑고 고운 눈이 있으며, 사람의 착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다. 이러한 맑고 고운 눈, 굳은 믿음, 이것이 오늘의 그의 힘의 샘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열두 대목 가운데 두 대목만을 읽어보자. 해바라기들이 고개를 못 든다 제 얼굴에서 금시 바래버릴 아침 노을 찬란한 빛깔 눈이 부시어 ― ‘구원의 아침’ 전문 더는 못 기다려 하나 둘 지는 감나무 잎사귀 소리에 떨떠름하니 익어오는 맛이야 막을 길 없다만 너무 알몸이 드러나 안쓰럽다 ― ‘시월의 아침’ 전문 여기서 철이 바뀌는 아름다움과 놀라움만을 읽는다면 이 시를 제대로 읽은 것이 못된다. 여기에는 착하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의 숨결이 스며 있으며, 그것을 보는 겸허한 눈이 있다. 물론 이 시를 문익환 시의 본령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문익환 시와 행동을 푸는 열쇠로서는 더없이 좋은 구실을 할 것이 분명하다. 그의 시와 행동은 본질적으로 미움보다 사랑에서, 원한보다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자신이 얻기 위함이 아니라 남에게 주기 위함이 그 목적임을 이 시는 엿보게 해준다. 2 지난 3월 문익환 목사는 돌연 평양을 방문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국은 이를 민주세력 대탄압의 구실로 이용했으며, 그때까지 ‘5공비리’ 청산과 ‘광주 대학살’ 책임자 처단을 요구하며 노태우 정권의 퇴진투쟁에서 공세를 취하고 있던 재야민주세력은 아직도 공산주의라면 겁부터 먹는 분단체제 아래서 반공주의에 길들여진 소시민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 속에서 수세로 몰렸다. 조선대의 이철규군의 의문의 죽음 이후 상황은 많이 달라졌지만, 반독재 민주세력을 고립시키려는 당국의 의도는 일견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3,4월 임투를 시발로 달아오르기 시작한 노동운동에까지도 문익환 목사 방북의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쳐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자 운동권에서조차 비판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령 같은 형제가 사는 북쪽을 방문하는 일은 정부의 허락 여부에 관계없이 원칙적으로 옳은 일이지만 이는 반드시 민중적 합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든가, 통일은 한 개인의 영웅적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든가, 시기적으로 노동운동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 다음이었어야 맞지 않았겠느나라든가, 지도자의 행위는 그 동기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할 때 과연 그의 방북이 통일운동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등이 그것이다. 이와같은 비판들은 물론, 소영웅주의자니 감상적 통일론자니 유치한 낭만주의자니 하는 악의적인 욕설과는 달리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겠지만, 여기는 그것을 시비할 자리는 아니다. 다만 이 시집에 ‘서시’로 실려 있는 「잠꼬대 아닌 잠꼬대」는 그가 방북하기 직전에 발표를 부탁한 시로서, 그가 무슨 생각으로, 또 무슨 목적으로 평양에 갔었는가를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시여서 흥미롭다. 이 시는 잠꼬대를 핑계대어 1989년이 가기 전에 평양엘 가서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하면서 북한의 주장에 덮어놓고 동조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그는 그의 방북이라는 행위가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는 사실을 알지만, 역사를 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진다. 그 단단한 마음가짐이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나부끼는 일이라고/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라는 아름답고 다부진 절구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상식을 가진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도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하고 점친다. 그리고 이 구절과 함께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의 삽입구는 긴장된 시의 가락에 휴식을 주어 읽는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 이 시는 형식이라는 면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라 할 수 있겠다. 이 시의 절창은 역시 마지막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 이 시는 마침내 파란 불꽃으로 타오른다.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3 이 시집의 시들 중 많은 것들이 직간접으로 통일을 주제로 하고 있다. 「통일꾼의 노래」라는 시도 두어 편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통일노래꾼이라 부른다. 하지만 최근 일부 언론이 빈정대는 것처럼 그는 환상적 또는 낭만적 통일주의자는 아니다. 관념적·추상적으로 통일을 외치는 말만의 통일꾼도 아니다. 그나름으로 통일에 대한 진행표도 있고 과학도 있다. 가령 「양심이라고」라는 시를 읽어보자. 이 시는 전반부에서는 양심의 일반론을 가지고 너스레를 떨다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통일문제로 몰아간다. 88올림픽 남북 단일팀을 만들고 서울 평양 왔다갔다 하며 축구다 농구다 수영이다 육상이다 얼싸안고 목이 터지게 평양 이겨라 서울 이겨라가 아니라 우리 팀 이겨라 응원할 수 있다면 그거야 북쪽 사람도 좋고 남쪽 우리도 좋고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는 통일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그것은 손 가까이 있는 것이며 아주 쉬운 일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칠천만 모두가 천의무봉의 동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은 그의 여러 시들을 읽어보면 분명해진다. 「비무장지대」는 무기를 가지고는 못 들어가는 비무장지대의 확대로 통일을 이루자는 내용으로, 북의 병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날씬한 허리 용수철로 튀었다 펴며 푸른 하늘 밀어올려라 아아아아아 비무장지대 너희는 백두산까지 밀어붙여라 우리는 한라산까지 밀고 내려가리라 비무장지대 만세 만세 만세 문익환 시의 미덕은 부드럽고 유연한 말과 유려한 그 구사에서도 찾아져야 할 것이다. 재야의 지도자요 더욱이 감히 아무도 해내지 못한 방북을 해낸 그는 자칫 강하고 억센 이미지를 갖기 첩경이겠지만, 이 시 속의 말들은 아름답고 깨끗하고 부드럽다. 또 그 구사도 빡빡하지가 않고 여유가 있다. 더러 과감히 사투리를 구사하고 속어나 구어를 채용하는 방법도 그의 시를 거부감 없이 읽게 만든다. 시집을 통독하면서 재야의 지도자 문익환이 아닌 시인 문익환이 새삼스럽게 더 좋아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
2023.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