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서대문에 나온지 열하루째
오빠. 오랜만에 편지라고 쓰네요. 서대문에 나온지 열하루째 별탈 없이, 그러면서도 좀 섭섭한 듯한 생활을 합니다. 영금인 어리니까 더 하겠고 또 내가 어른 노릇도 못하니까 말예요. 토요일엔 집에 들어가 자고 주일엔 영규 생일이라 언니네 갔다 왔는데 다음날인 어제 벌써 식구중에 누구라도 만나고 싶었어요. 그래 언니께 전화했는데 할 말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우습게 끊고. 집에 가서(장봐 갖고) 가계부 적는데 어머님이 창근 엄마 만들어 보낸 빵을 갖고 오셨잖아요? 어찌나 반가운지 이것 저것(먹을것, 불, 청소, 빨래) 생각하고 학교에 심선생 도우러(방학동안) 나오고-결국 제일 중요한 공부를 못하고 피곤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든지 떼쓰고 싶어지나봐요. 아직 커다래도 어린앤가 봐요. 심선생님 일을 못하겠다고 말씀드려야 할가봐요. 국사시험 됬어요. 문규아빠, 작은 삼촌이 안되어서 조금 미안하지만 할수 없죠, 뭐. Andover에서 소식없으면 곤란합니다만 그냥 그렇게 살죠 뭐. 살아가는 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활기있게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에서 외따로 걷는 것 같은 외로움 같은건 사회성 보다는 나 자신의 문제이겠죠. 어느 뉘게 원인이 있기 보다 내게 결함이 있는 것 같아요. 풍성하고 아름답고, 현명한 생활을 정말 내가 영위하기전에 누구에게 베풀수 있겠어요. 영금에게 난 참 너그러운 여자이고 싶었어요. 그런데 언제나 내가 느끼는 내 표정(불수없지만)은 여유없고 빡빡하고. 머리 속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 실제로는 어림없네요. 물질적인 여유를 초월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수 없을가 몰라요. 실제로는 낭비라고 하겠죠. 그런데 낭비란 여유없는 사람이 반발로 더 하는게 아닐가요? 오빤 이번 9월에 나오시는 거예요? 1년쯤 더 계시면 좋겠네요. 만일 내가 가게되면 말이죠. 지난 금요일 영금이랑 연극(신협) "불신시대"를 보러 갔다가 앞줄 저만치 앉은 Paul을 봤읍니다. 나보고 혼자 왔느냐 동행있느냐 하고 손가락을 펴보이는 그는 혼자였고 끝나기 전에 갔는지 보이질 않아 섭섭했고, 처음으로 눈이 쌓이게 조금 내려줬어요. 이 겨울엔 눈이 참 안와요. 금년 아마 가물 모양이죠? 오빠 20일께 Paul에게 졸업축하장 내주지 않겠어요? 우리 식구가 모두 자길 미워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Boston 쯤으로 가고 싶은 모양이고요. Union 이야기도 하던데. 잊고 사는 것 같다가도 가만히 나를 보면 언제나 그 사람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울거나, 슬프다거나, 비관한다기 보다 남의 일 같이 언뜻 이해가 안가고, 꿈같은, 그러면서도 현실인 것을 알아가는 그런 상태죠. 오늘도 학교에 오다가 미끄러질 뻔 했어요. 방심상태. 총장댁으로 하시던지 대학원으로 내 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오빠 card만 아니고 한 가난한 양으로 생각해서 정말 축복해 주시면 좋겠어요. 훌륭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닌데 참 우습게도 마음이 가 있는, 그러면서도 조그만 내 dignity를 고집하려는 그런,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은 자세- 참 대단한 "나"죠? 온통 남들이 싫고, 못마땅하고, 나도 싫고 못마땅하고- 심선생등 웃는 것도 싫으니 "사랑없는 연고라"하는 거죠? 어제 오늘 전기 대학입시. 연대에 상헌(호근 친구), 병선(전 장노 아들)이 정외과 둘다 봅니다. 호근이 오늘 와보라고 했는데 올지 모르겠어요. 문규, 영규, 창근, 태근, 모두 무럭무럭 자랍니다. 창근 외할머니 편찮으시다네요. 아마 한국 못다녀가실지 모른대요. 호근인 음대 작곡과 지망생 가르치노라고 애쓰는데 거의 가망없는 앤 모량이예요. 머리는 Beatles가 되도록 깎지 않고- 의근인 어른스럽게 큽니다. 요즘은 말도 잘하고 오현명씨 아들과 친해 그집에 가서 자고 오기도 하고 늘 전화합니다. "개새끼" "이 새끼야"식이여서 할머님 걱정하십니다. 성근인 오랜만에 갔더니 전에 모두 같이 가자고 했던 영화(Home drama) 이야길 꺼내고 마중하러 달려 나오는데 얼굴이 좀 검어지고 둥글게 살쪘어요. 의근이 방으로 승격하기를 아직 거부하고 식모애와 아옹다옹합니다. 아직 애기라면서, 또 은근히 그게 싫기도 한 과도기입니다. 중학다니기 시작하면 친구도 쪼무랭이에서 중학생으로 뛰겠고저도 언니 상태가 되려 하겠죠. 의근이가 너무커서 언니누나 상대만 하니까 외톨이여서 더 클 생각을 하지 않나봐요. Classic 음악만 나오면 시끄럽다더니 저번엔 식사시간에 모르는 새 Bach와 Beethoven에 머리 끄덕대다가 저도 깜짝 놀라" 내가 왜 이런 음악에 신나하니?" 하겠죠. 의근이도 Jazz에서 Opera, Cantata로 넘어갔읍니다. Jazz도 좋와하지만, 악보 빨리 본다고 유명합니다. 목소린 노래나 말소리 다 호근이와 똑같읍니다. 어머님, 아버님, 형님 모두 안녕하십니다. 둘째 오빠가 너무 무리하시는지 얼굴이 많이 상했더군요. 그럼 이만 은희
문은희
1966.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