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 문익환 30주기 기념위원회 '한반도평화선언문'
[한반도평화선언문] 오늘날 지상에 가득 찬 생명의 물결을 교란하는 파탄의 정체를 학자들은 ‘인류세’라는 낱말로 포착한다. 인간은 어느새 자신의 세계를 넘어서 지상의 모든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 많은 존재’로 등극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는 땅과 하늘, 천체의 안전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치명적인 말썽거리가 된 것이다. 우리가 바라던 세상은 요원하기만 하다. 오히려 수많은 희생을 통해 일군 민주주의와 평등, 평화와 공존의 토대가 지상의 모든 곳에서 바탕으로부터 흔들리고 있다. 세상은 더 불평등하고 위험해졌다. 사회적 경제적 군사적 위기가 일상화되었고, 재난의 규모와 파급력은 더욱 커졌다. 기술 문명이 고도화하고 ‘사회적 네트워크’가 확장되며 가상공간이 새롭게 열리고 있지만, 자유는 멀어지고 경계는 더욱 굳건해지며 배제와 고립은 심화하고 있다. 만성화된 위기의 책임은 목소리 없는 이들에게 전가된다. 공론장은 약화 되고, 대의정치는 퇴행하고, 혐오에 바탕을 둔 근본주의는 날로 힘을 얻는다. 서로를 살리고 돌보는 세계로 나가는 속도는 끝없이 편 가르고 공격하고 파괴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인류와 모든 비인간 존재들의 터전인 지구가 내일에도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으리라는 보장도 전혀 없다. 그러나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봄을 꿈꾼다. 너무도 더디게 오고 있어서 결코 올 것 같지 않은 이 땅의 봄, 역사의 봄, 모든 생명의 봄을 간절히 꿈꾼다. 우리는 아직 보지 못했고, 그 봄을 살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봄이 반드시 오고,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음을 알고 있다. 지난 세기, 칠흑 같은 어둠의 시대를 우리와 함께 살아냈던 늦봄의 넋이, 마치 “언 땅속에서 부릅뜬 개구리의 눈망울처럼”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우리의 심장을 생명의 봄을 향해 뛰게 하기 때문이다. 문익환 목사는 나라의 분열 상태를 더 이상 끌어서는 안 되며 가까운 시일 안에 민족이 하나가 되는 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문익환 목사는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고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며 민중과 민족의 부활은 자주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고 하면서 자주, 민주, 통일이 일체임을 천명하였다. 문익환 목사는 남북 사이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대결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치 군사 문제와 함께 교류 문제도 병행하여 해결해야 하며 남북 교류가 민족의 단합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그 의의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이산가족 문제와 경제교류 문제 등 여러 부문에 걸친 회담과 교류가 활발하게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늦봄 문익환 목사님이 떠나시고 30년이 지났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민주주의, 인권, 생명, 평화와 통일이 모조리 부정당하고 퇴행하는 참담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목사님과 수많은 열사가 목숨을 바쳐 열어놓은 길 곳곳이 벽으로 가로막히고 있다. 이런 시기일수록 “벽을 문으로 알고 박차고 나가”라시던 목사님의 결단과 기개가 간절하다. 이제 우리가 모두 좌절과 분열, 전쟁의 먹구름을 몰아내고 푸른 평화의 하늘을 다시 열어야 한다. “벽을 문으로 알고 박차고 나가”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 한다. 남과 북, 우리 민족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전쟁과 분단 체제를 하루라도 빨리 끝내야 한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벗어버릴 수 있는 길을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는 세계 평화의 중심축이자 시금석이다. 세계 평화는 강대국의 패권적 이해관계가 집약되어 있는 한반도가 전쟁 상태를 끝내고 평화 시대로 접어들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과 분단 체제를 끝내고 평화를 열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당사자는 남과 북이 될 수밖에 없다. 남과 북이 힘을 합쳐 반민주, 반평화, 반통일 세력에 의해 조성된 긴장과 난관을 이겨내고 평화의 길로 나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한다. 30주기를 맞으며 우리는 문익환 목사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밑바탕에는 가장 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세계 평화와 남북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 안의 분열과 차별을 극복하고 목소리 없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찾게 해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더 나아가 모든 생명체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깨닫고 생명을 살리고 돌보며, 일상에서부터 작은 평화와 평등을 만들어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고,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며 민중과 민족의 부활은 자주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는 말씀을 되새기며, 30주기를 맞이한 문익환 목사님과 민주주의와 인권, 생명, 평화와 통일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모든 열사의 영령 앞에서 ‘민중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민족의 자주적인 연합과 대단결로 평화와 통일을’ 열어가는 대장정을 시작할 것을 다짐하고 결의한다. 2024년 1월 13일 늦봄 문익환 30주기 기념위원회 ◇1월 13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문익환 30주기 기념식에서 젊은 청년 6명이 한반도 평화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권산
늦봄 문익환 30주기 기념위원회
2024.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