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해야 할 자원 낭비적인 산업 문명
당신께 어머님 가려우신 것도 무릎 아픈 것도 나으셨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오. 벌침 놔주시는 분께 감사, 감사. 그날은 비행기로 올라가셨으니 내 마음이 놓이는군요. 돈이야 들겠지만, 다음엔 오실 때도 가실 때도 비행기를 이용하시도록 했으면 좋겠군요. 또 하나 부탁은 어머님 생수를 많이 마셔야 하는데, 아침 일어나시는 길로 마시는 건 많이 마시더라도, 하루 종일 마시는 건 틈틈이 한 모금씩 마시도록 늘 옆에 냉수 그릇을 놓아 드리도록 하시오. 또 하나, 흔들의자(Rocking Chair)를 하나 사서 방에 놓아 드리시오. 정좌하고 몸을 좌우로 흔들어 보고 앞뒤로 흔들어 보면, 앞뒤로 흔들 때, 혈액 순환이 훨씬 좋아지는 걸 알 수 있거든요. 내 몸은 하느님이 실험용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이제마 선생은 손가락으로 약 건재 달인 걸 찍어 혓바닥에 대어 보고 4상을 가려냈다고 하지만, (그의 혓바닥은 약의 4상을 가리기 위해서 있었던 거죠) 나의 몸은 경락, 혈액순환, 세포들의 움직임, 전기의 흐름을 민감하게 알게 되어 있는 것 같군요. 몸을 앞뒤로 흔드는 것이 척추에 아주 좋은 것 같아요. 사람의 뇌수는 전신에서 필요한 피의 1/6이 필요한데 늘 위쪽으로 하고 있으니까 좀 빈혈 상태인 거죠. 그래서 머리를 땅에 대고 거꾸로 서는 게 좋거든요. 간디나 네루가 아무리 바빠도 그것만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했다고 하거든요. 그것은 못하더라도 정좌를 하고 앉아서 몸을 앞뒤로 흔드는 것만으로도 피가 머리에 공급이 잘 된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어요. 흔들의자 등받이에 등을 대고 (몸이 굳어지는 건 안 좋아요) 가만가만 흔드는 건 기분도 좋고 몸에도 아주 좋지요. 발을 장딴지까지 더운물에 담그고 충분한 호흡을 하면서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면 효과는 3배나 될 거라는 계산이 나오는군요. 신철 아빠와 선희도 꼭 그걸 하는 것이 좋을 거요. 그날 손가락 끝 자극하는 이야기를 했더니, 동환이가 손톱을 눌러주니까 기분이 좋다고 했지요? 당신이던가 몰라. 방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까 뇌와 연관이 된 기맥이 손톱 밑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소. 특히 가운뎃손가락 첫 마디는 사람의 머리라고 보면 틀림이 없거든요. 그런데 수지침 책 어디를 봐도 뇌수에 관한 기맥 이야기는 없어요. 적어도 가운뎃손가락 첫 마디 어디인가 뇌와 관계되는 혈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있을 데는 손톱 밑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더군요. 그리고 뇌수는 너무 중요하니까 손톱으로 보호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몸의 전기 암페어를 잔뜩 올려놓고는 손톱들을 지그시 눌렀다 떼었다 해보았더니 분명히 머리에서 약하지만, 반응이 있었어요. 만일 이것이 증명된다면, 이건 놀라운 발견이 되는 거죠. 발톱을 눌러서는 별 반응이 없는 것 같았구요. 더 많이 실험을 해봐야 알겠지만, 나쁠 건 없으니까 아침저녁으로 손톱, 발톱을 모조리 한 서너 번씩 지그시 눌러 주는 게 좋을 거요. 최소한 혈액 순환에는 좋으니까. 손끝, 발끝까지 와서 잘 돌아가지 못하는 피가 돌아가도록 도와주는 일이 되니까요. 특히 머릿속에 병이 있는 선희나 신철 아빠는 꼭 실천하도록. 뇌의 건강에 척추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건 인도의 요가 중에 쿤달리니 요가라는 게 있는데 거기서 힌트를 받은 거요. 척추는 뇌와 직통이기 때문에 이건 틀림없는 이야기죠. 반듯이 누운 다음에 누군가가 밑으로부터 척추를 천천히 가볍게 두드려서 몸을 거쳐 머리 뒤로 해서 정수리(百會)까지 자극해 주고, 척추 양옆을 또 자극해 주는 것이 머릿속의 병에 좋은 거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머릿속에 특별히 병은 없어도 뇌수의 건강을 위해서, 뇌수의 건강은 전신의 건강에 기본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다음에 머리 전체를 가볍게 두드리다가 열 손가락으로 골고루 꾹꾹 눌러 주고, 누르다가 특히 아픈 곳이 있으면 거기를 많이 눌러 주는 거죠. 그 부분과 연관이 있는 뇌의 내부 어딘가에 병이 있다는 신호이니까. 그리고 이를 가볍게 딱딱 부딪쳐 주고. 이걸 얼마 계속하면 선희나 신철 아빠의 머릿속 병도 반드시 나을 거라고 확신해요. 그날 직접 당신의 손과 동환의 손을 만져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이상은 선희와 신철 아빠의 병을 어떻게 고쳐줄까 생각하다가 알아낸 거지만, 방광 하수도 처리가 중요하다는 건 안 박사와 백기완 씨의 병을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인데,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과 동환에게 당장 필요하게 될 줄이야. 두 사람 다 방광 쪽 하수도가 많이 막혔지요. 동환이는 대장 쪽 하수도까지 시원찮으니 막힌 하수도부터 청소해야겠어요. 동환이는 이뇨제를 먹고 있는데도 그 정도니까, 서양 약만 믿고 있다가는 안 되겠어요. 손인숙 권사나 이철용 장로에게 침을 맞고, 손 권사가 주신 침을 나누어 가지고 집에서 자가 치료를 하도록 하시오. 침 자리만 잡으면 되니까요. 뜸도 뜨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드네요. 당신은 백십자 약방에 가서 의논하고 이뇨제를 먹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손 권사나 이 장로에게 의논하시오. 엉덩이에 방광과 관계있는 혈이 있는데 거기에 벌침을 맞으면 썩 좋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내가 지금 쓰는 책이 인쇄되어서 읽히려면 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나의 4월 편지와 이 편지와 지난번 접견 때에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의근이 글을 하나 만들어서 돌려 읽힐 수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떨지? 내 몸에서 출력되는 전기를 100이라면 안 박사는 30~40도 되나마나 할 건데, 그 출력을 40 에서 45로, 또 48, 50으로 높여 자가 발전되는 전기로 물리치료를 받다 보면 그 병도 결코 불치의 병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하게 되었소. 오랜 고혈압으로 손목 아프던 것이 하룻밤 치료로 나았거든요. 안 박사의 경우에는 서양 의학은 한계에 와 있는데, 이제 문익환에게서 실험되어 성공을 거두고 있는 새 치료법으로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방광 요도 하수도 처리에서 시작해서 자가발전하는 전기로 물리치료를 받아 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리오. 백기완 씨는 건강에 관한 한 나를 믿으니까, 고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그의 병원 치료비를 당신이 나서서 (계 선생의 도움을 받으면서) 모금을 해보면 어떨는지? 선희의 병도 결코 불치의 병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해요. 아버님의 왼쪽 눈이 다시 보이게 되리라고 누가 믿을 수 있었소? 그런데 그 눈이 열렸거든요. 그처럼 23년 멀었던 나의 왼쪽 귀도 머지않아 열리리라고 나는 믿고 있어요. 그때는 박용수 씨도 두 귀로 들을 수 있게 될 테고, 아니 지금부터 박용수 씨도 자가발전 출력을 올리는 작업을 시작하도록 일러두시오. 안 박사가 나의 발바닥 철학을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나의 발바닥 과학을 믿을 차례가 된 것 아닐까요? 그날도 말했지만, 발바닥은 사람의 몸에서 제일 운동량이 많아서 전기 출력량도 제일 많고 성능도 제일 좋은데, 거기에 피가 고여서 죽어 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발 (가급적 장딴지까지)을 뜨거운 물에 담그면, 죽어 가던 피가 소리치며 심장으로 돌아갔다가 허파를 거쳐 맑은 피가 되어 맹렬한 힘으로 돌아오게 되죠.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 피가 제 속도로 돌아가고 세포들이 생기를 얻어 힘있게 움직이게 되면, 그 힘에서 전기가 출력되거든요. 그래서 전기의 자체 출력이 강화되면, 그만큼 몸에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는 만큼 또 더 많은 전기가 출력되는 거고, 이것이 가속화라는 거죠. 이건 과학이에요. 난 지금 한 달 이상 1일 1식인데 머리카락까지 영양이 좋아져서 머리카락이 거의 안 빠지게 될 정도가 되었는데, 이 산 증거도 안 믿으면 안 박사는 하느님 믿을 자격이 없어요. 선희는 오빠의 말을 전폭적으로 믿겠지. 선희의 편지 두 장을 같은 날 받았소. 건강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 쓰지요. 『죽음을 살자』에 실린 시들 가운데 오식 있는 것들이 다시 박을 때 바로 잡혔는지 모르겠군요. 청주에서 편지로 알린 걸로 알고 있는데, 그때 빠진 것 하나, 85면 3행 ‘오늘도 우리집’을 ‘우리는’으로. 북간도에서 온 김 시인에게 나의 책들을 전하시오. 연변대학과 용정중학교 도서실에도 나의 책들을 다 보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명동학교에도. 전국 양심파 목사님들 가운데서 전 목사님이 먼저 가셨군요. 서운한 마음 무엇이라고 표현할 길이 없군요. 나머지 윤·육·이 목사님들도 다 몸이 안 좋으신데, 위로와 격려를 보내 주세요. 계(훈제) 선생님 정말정말 몸조심하시라고 전해 주시오. 오늘은 이만. 1987. 5. 11. 사랑 『죽음을 살자』증보판을 받아보고 시의 오식들이 고쳐지지 않은 걸 보고, 다시 적는 거요. 5면 11행 ‘전의’ →‘정의’ 등 10여 군데 (자세한 내용 생략) 다시 찍을 때는 꼭 시정되도록. 김세진 군 조사는 어떤 걸 써 주었던지 전혀 기억이 없었는데, 이렇게 활자화된 걸 보니까 새삼스럽군요. 태근이 보내준 책 오늘 저녁부터 읽기 시작해야지. 고맙다. [5월12일] 성근아 무대에 선다는 건 하나도 인기, 둘도 인기, 셋도 인기라고들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무대에 서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 되었기에 신앙의 세계에 마음을 돌리게 되었니?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신앙의 세계에 눈을 돌린다면 그것은 신앙에 대한 모독이기 전에 인생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니? 너의 몸부림은 인기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배우의 몸부림이 아니고, 예술가의 몸부림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아비 한없이 기쁘구나. 그만큼 확실한 직장을 버리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만 한 배우로 전신한다는 게 역시 예술가적인 내적 충동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있지만, 이제 그걸 다시 확인하는 기쁨을 이 아비에게 안겨주어서 한없이 기쁘구나. 의근에게도 신앙의 조용한 격동기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호근, 영근, 너는 다 튕겨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기특하기만 하다는 느낌이구나. 나는 신앙에서 예술 쪽으로 나갔고, 호근이나 너는 예술을 본격적으로 하다 보니 그 뿌리로, 그 근원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이 된 거지. 자기가 온몸으로 하는 일은 실패여서는 안 되지. 반드시 가치 있는 것으로 우선 제 마음에 들어야지. 남이 아무리 박수를 쳐도 내가 만족할 수 없으면 말짱 헛거 아니겠니? 발가락부터 머리끝까지 너의 전부를 투입하고도 유감이 없어야지. 그러려면 그것은 진실의 불덩어리여야 하고, 예술에 있어선 그것은 너무너무 참되기 때문에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이 되어야 하지. 진실이 아름다움의 극치가 되면, 그건 이미 종교다. 네가 지금 신앙에 눈을 뜨는 건, 아름다움의 극치로 표현되어야 하는 진실의 세계를 향해서 몸을 내던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씨 연대기」야 워낙 민족사의 큰 물줄기 깊은 곳에서 이는 파도를 다루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생의 근원적인 의미, 역사의 의미를 물음으로 던지는 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칠수와 만수」는 길바닥 어디서나 발길에 채이는 일, 그 피상적인 잔물결로 저 깊은 곳에서 이는 문제에 사람들의 눈을 열고 가슴을 한 대 얻어맞게 해준다는 게 그만큼 어려웠을 거라고 짐작이 가는구나. 하비 콕스의 『바보제』를 얻어서 읽어 보아라. 단테의 『신곡』을 꼭 읽어 보아라. 괴테의 『파우 스트』는 너무 지성적이긴 해도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파고들어 간 작품이지. 무대에 서는 걸 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래도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 생의 파토스를 느끼게 해주는 건 역시 도스토예프스키를 따를 만한 작가가 없을 거고. 내가 최근에 읽은 작품으로서 가장 감명 깊었던 건 위고의 『노트르담 사원』이었다. 민중의 신이 무엇이냐는 걸 그렇게 처절하게 그려준 작품이 또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인간의 구원, 곧 자유는 법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서 오는 것이라고 바울 서간의 세계를 작품화했고, 『노트르담 사원』에서는 예수가 살아간 민중의 신을 그려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를테면 복음서의 세계를 그려 주었다는 거다. 그 두 작품을 통해서 신약의 세계를 건너다보면 신약 성서의 세계가 과연 대단한 세계라는 걸 알 수 있다. 극적이라는 면에서 신약은 구약에 댈 바가 아니지. 끝도 없이 펼쳐지는 드라마로서 구약 성서를 면밀히 읽어 보아라. 정말,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도 예수와 가룟 유다 사이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를 다룬 작품으로써 꼭 한 번 읽어 보기 바란다. 김은국 씨의 『순교자』를 연우 무대가 한번 각색해서 무대에 올린다면 어떨까? 난 얼마 전에 호주의 한 사회학 교수가 쓴 『풍요를 포기하라』는 책을 읽고, 이제 우리는 모든 문제를 지구촌의 생존이라는 안목에서 새로 설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촌에게서 들었는데, 금년 3월 『뉴스위크』에 지구 생태계의 위기에 관한 특집이 있었다는데, 그걸 정말 읽어 보고 싶구나. 그건 정치적인 시사성이 있는 게 아니니까 그 부분만 잘라서 보내라. 어쩌면 허락이 날지도 모르니까. 그 책을 읽기 전까지 나의 관심은 동서 냉전 이데올로기와 체제, 정책 등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이겠나 하는 데 있었어.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바로 민족통일의 길이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적으로는 유물론의 극복인 거고. 유물론의 부정이 아니라 극복인 거지. 유물론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는 거고, 자원 낭비적이라는 면에서 공산주의 세계도 자본주의 세계와 다를 것 없고. 그런데 『풍요를 포기하라』는 책을 읽고는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유물론이라는 이념이 아니라 자원 낭비적인 산업 문명이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이것의 뿌리는 유물론이고. 그 책은 이 지구의 모든 자원이 완전 고갈될 때를 2050년경으로 보는데, 『뉴스위크』에서는 2030 년경으로 보는 모양이니, 그만큼 지구촌의 위기는 보다 절박해진 거지. 빙하 시대 이후로,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위기에 지구는 처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지구촌 전체가 송두리째 망하느냐 살아남느냐는 문제 앞에서, 인류는 사소한 이념의 차이나 이권의 차이 같은 건 훨훨 털고 하나가 되어 전무후무한 지구의 위기, 인류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데, 아직은 모두들 산업 경쟁의 열기에 들떠서 냉정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구나. 인류의 자멸을 초래할 자원 낭비적인 산업 문명의 대안은 무엇일까? 그건 아무래도 흙의 문화, 발바닥의 문화가 아닐까? 흙에서 나는 양곡과 채소만으로, 그것은 최소한으로 살아갈 수 있는 문화여야 하는데, 하루 한 끼니 생식을 하는 생활이어야 할 것 같다. 연료라야 나무밖에 없을 텐데, 나무는 산소 공급을 위해서 최대한으로 보존해야 하니까. 내가 왜 네게 이 얘기를 장황하게 쓰는지 알겠니? 누군가 이 문제를 각본화해서 무대에 올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아라. 어쩌면 너는 2030년대까지 살 것 아니니? 1987. 5. 12. 아비 씀 당신께, 지구촌의 생태학의 문제에 관해서 더 읽었으면 좋겠군요. 모든 친지들께 문안을 전해주시오. 내가 지금 몸으로 실험하고 있는 것이 인류의 위기 극복에 기여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모두 모두 건투를. 사랑. 아내에게는 경락을 이용한 치료법을 중심으로한 건강에 대한 얘기, 연극을 하는 아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조언과 자원 낭비적인 산업 문명에 대한 비판.
문익환
1987.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