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4월 <청년 문익환>

[시 속의 인물] 2. 통일운동가 이수병

[늦봄과 이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당신의 외침은 온몸 타오르는 불길이어라”

 
◇ 경희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이수병 열사 16주기 추모 행사에서 연설하는 문익환 목사(1991. 4. 8)

이수병 동지여
당신의 몸에 밧줄이 감기는 순간
온몸 부르르 떨며 이를 앙다물고
하늘이 쏟아지고 당이 꺼지는 소리로 외친
민주, 자주, 통일
이제 그것은 7천만 겨레 모두모두의
쏟아지는 눈물이어라.
온몸 타오르는 불길이어라. 
― 시 <이수병 동지여> 중에서


<이수병 동지여>라는 시에 나타났듯, 늦봄의 이수병 선생에 대한 애틋함은 ‘7천만 겨레의 쏟아지는 눈물’ 처럼 절절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다음 날인 1975년 4월 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수병 선생. 그와 늦봄의 인연은 사월혁명상이라는 끈으로 이어졌다. 
1991년 사월혁명연구소는 이수병 선생에게 사월혁명상을 시상했다. 사후 16년 만에 추서된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축사를 한 이가 늦봄이었다.
다음해인 1992년 늦봄은 이수병 선생의 뒤를 이어 사월혁명상을 수상했는데, ‘반독재 민주화와 민족통일운동에 헌신함으로써 4월혁명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 수상의 이유였다. 사월혁명상 수상과 동시에 늦봄은 사월혁명회보 18호(92년 4월)에 <이수병 동지여>라는 시를 실은 것이다. 
당시 늦봄은 안동교도소 수감 중에 있어 아내 박용길 여사가 시상식에 참석했다. 늦봄은 ‘자신은 4.19에 한 일이 별로 없고 3.15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글을 쓴 정도밖에 없다’면서 ‘김창필’을 언급하는 것으로써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제가 목회하던 교회 주일학교 부장이 유언장을 써놓고 나가서 경무대 앞에서 총을 가슴에 맞고 죽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김창필’입니다. 그를 대신해서 상을 받는다는 심정입니다.
― 하일민 사월혁명연구소장에게 쓴 옥중편지 중에서(1992. 6. 5)
 
통일의 집에 전시 중인 사월 혁명상 상장과 트로피. 대리 수상하는 박용길의 사진 상장 앞에 있다.
◇ 통일의 집에 전시 중인 사월 혁명상 상장과 트로피. 대리 수상하는 박용길의 사진 상장 앞에 있다.​​​​​​
 
◇ 박용길이 사월혁명상 상장, 상패, 메달을 그려서 옥중의 늦봄에게 보낸 편지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작년에는 이수병 선생에게 사월혁명상이 주어졌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축사를 하게 된 것만도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수병 선생이야말로 그 상을 받고도 남을 분이었습니다.
― 하일민 사월혁명연구소장에게 쓴 옥중편지 중에서(1992. 6. 5) 

‘4.19 32돌을 맞아’라는 부제가 붙은 시 <이수병 동지여>는 사월혁명상을 받는 늦봄이 1년 전 수상했던 고인을 기리며 4.19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라 할 수 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당신이 서울운동장에서
청정한 목소리로 외친 지
어언 32년이 지났습니다
― 『문익환 전집 2권: 시2 』 <이수병 동지여> 중에서

1960년 경희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수병 선생은 4·19혁명 이후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학내에서 ‘민족통일연구회’를 결성하고 ‘통일문제 대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통일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61년 5월13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이 개최한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통일촉진 궐기대회’에서 이수병 선생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는고!' 라는 연설로 서울운동장에 모인 수 만 명의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5.16쿠데타 이틀 후인 5월 18일 선생은 체포되었다. 서울운동장에서의 연설 등 통일운동가로서의 활동이 빌미가 되어 혁명재판소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고 7년 만인 1968년 감형으로 출옥했다. 이후 그는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도 1971년 9월 경락연구회를 설립하여 4·19혁명 시기의 동지들을 다시 규합하였고, 그 결과 서울, 부산, 대구 등에서 새로운 조직의 형성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1974년 4월 민청학련 상층부로 지목된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으로 검거되었다. 1년 동안의 악랄한 고문에 시달려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날조된 공판 조서를 바탕으로 비공개 상태의 재판을 받았다. 1, 2차 군법회의를 거쳐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이수병 선생을 포함한 8명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만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 9일 새벽에 모두에게 사형이 집행되었다. 수감되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새벽부터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기다리던 가족들에게는 날벼락이었다. 
 
당신은 그들의 손에 일곱 동지들과 함께
죽어야 했습니다.
그 처참한 죽음 앞에서
나는 60년 굳게 믿어 오던 하느님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 <이수병 동지여> 중에서, 『문익환 전집 2권: 시2』 
 

오늘은 슬픈 날이군요.(주: 인혁당 피고인들이 처형된 지 17년 되는 날) 하늘도 서러운 듯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군요. 오늘 하루 밥이나 안 먹는다고 그들의 비극에 무슨 동참이 되리오마는 그렇게라도 해서 허전한 마음이나 달래 봐야죠. 세상일이란 우연 아닌 우연들이 있어 역사를 끌어간다는 걸 발견하곤 하는데, 오늘 또 그걸 느끼는군요.

오늘 자정 넘어서 자리에 들기 전에 『말』을 펼치니 눈에 들어온 것이 이수병 씨에 관한 글이었어요. 단숨에 내리읽었지요. 속으로 아프게 흐느끼면서. 작년 16주기에 가서 추모사를 하면서도 그가 그렇게 출중한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었군요. 정말 아까운 사람이군요. 나머지 일곱 사람도 다 그런 사람들이었겠지요. (후략)
― 4.9통일열사 17주기를 맞아 사건을 회고한 옥중편지 중에서(1992. 4. 9)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재판과 사형집행은 늦봄에게도 충격을 넘어 신학자와 신앙인으로서의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허무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 허무함에서 늦봄은 <사월의 비가(悲歌)>(부제:여덟 명의 아벨을 생각하며)를 쓰지 않았을까?
 
이루 다 이름할 수 없는
풀바람 꽃바람 별바람들의
흐드러진 사랑의 몸짓에서
어쩌다 태어났더냐?
아벨/아벨/
아벨/아벨/아벨/아벨/아벨/아아아아아아아아
벨 

허리 부러진 태초의 산기슭에는
머리 터진 아벨의 피
지금도 흐르고 
― <사월의 비가>(1975) 중에서, 『문익환 전집 1권: 시1』
 


이수병 선생을 포함한 8명 사형수의 가족들은 장례도 치를 수 없었다. 유신정권은 고문을 은폐하기 위해 주검을 탈취하고 화장터로 빼돌려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8명 중 마지막으로 송상진 씨의 관을 실은 트럭은 영결미사를 위해 응암동성당으로 이동하던 중 녹번동 삼거리에서 경찰에 가로막혔다. 가족과 신부님들이 트럭 아래에 드러눕는 등 거세게 저항했지만 경찰은 크레인을 동원하여 트럭 째로 주검을 탈취해갔다. 이 날 현장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며 모든 과정을 겪은 늦봄은 시 <길-5>(부제:우리 모두의 가슴 터지던 응암동 길, 1975)에서 이 날의 울분을 상기한 바 있다.
 
75년 4월 9일은 나에게 있어서도 역사적인 날이 되었군요. 억울한 시신을 끌고 응암동성당으로 향해 가던 영구차가 도중에 경찰에게 탈취되던 응암동 큰길이었죠. 내가 경찰과 처음 몸싸움을 한 것이.
― 1975년 4월 9일의 사형 집행과 주검 탈취 상황을 언급한 늦봄의 옥중편지 중에서(1992. 2. 13)


늦봄은 4·19 당시 (이수병 선생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외침과) 학생들의 휴전선을 향한 행진이 소박한 민족감정일지 모르나, 이러한 통일에 대한 염원이야말로 4·19와 함께 저절로 터져 나온 아주아주 소중한 것이라고 그 의미를 평가했다. 
 
통일이 얼마나 복잡한 문제들을 얼마나 많이 안고 있는가를 몰랐고, 이에 대한 아무런 연구도 대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이 민족감정의 민중적인 표출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학생들에게서 터져 나왔지만, 그것은 민중의 아들딸인 학생들의 가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온 민중의 염원이었습니다.
― <역사를 보는 눈>, 『문익환 전집 3권: 통일1』


이수병 선생 사후 17년에 늦봄은 <이수병 동지여>에서 선생의 외침의 의미를 다시 되새겼다. 지배자의 속임수로 생겨난 민족 간의 불신과 적개심 같은 마음 속 분계선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통일은 이루었으되, 외세는 물러가지 않고 분단 지배를 영원히 계속하겠다니, 이제는 외세를 물리쳐야 한다고, 민주정부를 세워 민족자주를 쟁취해 내야겠다고.
 
4월 혁명으로 무너뜨린 것은 이승만 정권이기보다는 미국과 일본이라는 외세를 타도했다는 의미에서 ‘민족자주운동’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완성으로서 재작년에 이 상을 받은 이수병 열사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외침이 나왔습니다.
― 1993년 제3회 사월혁명상 시상식 축사, 『문익환 전집 6권: 수필』
 
이수병 동지여
-4·19 32돌을 맞아

(전략)
당신의 죽음으로 지켜 낸 정의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을
그것을 부인하면 인생도 없고 역사도 무의미한 것을
그리하여 모든 것에 의미를 주는 정의의 뿌리에서
당신의 마음에서
나는 버렸던 하느님의 체취를
다시 내 코끝으로 맡을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16년 깜깜한 세월이 흘러
당신의 목소리, 민중의 외침이 다시 터져 나오고
당신의 아내의 목에 메달이 걸리는 걸 보면서
우리는 드디어 정의의 승리를 믿게 되었습니다.
7천만 겨레는 눈을 와짝 뜨고
강요당해 왔던 허위의식을 떨쳐 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갈라놓은 것은 군사분계선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갈라놓은 것은
불신이요 증오심이요 적개심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 분계선이
지배자의 속임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그리도 서러웁게 애절하게 바라던
민족통일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남은 것은 절차뿐입니다.

(중략)

이수병 동지여
이제 우리는 겨레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미국놈들과 일본놈들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죽어 지내게 되느냐 아니면
자주 하는 민족으로
평화로운 아시아 새 질서의 초석이 되느냐
이 갈림길에서 우리는 다시 외쳐야 합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외치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군요.
온몸으로 미· 외세를 물리치고
민중의 기반 위에 튼튼히 선 민주 정부를 세워
민족자주를 쟁취해 내야겠군요.
이리하여 통일운동 민주구국운동이 되었습니다.

(후략)
― <이수병 동지여>, 『문익환 전집 2권: 시2』
 
 
◇ 이수병 열사 동상(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내 경희평화민주동산) 
 

※ 이수병 선생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밝힘으로써 2007년 1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고 2월에 경희대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1990년 결성된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가 현재까지 선생의 추모사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선고 후 희생된 8분은 이수병,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이다.



  <글: 조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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