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5월 <문익환의 가족>

🈷️ 아이들의 편지

“아! 자랑스러워라, 나의 손주들아”

[옥중의 늦봄에게 보낸 어린이들의 편지]

 
이 옥사는 3층인데, … 따분한 거라고는 모르는 세월을 보낸다. 할아버지, 우리 손주들 생각은 다 잊어버리고 사시나 봐! 그런 생각이 들겠지? 그렇지는 않단다. 내가 어찌 너희를 잊겠니? 너희를 생각하는 게 네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인데. … 너희들만 생각하면, 내 마음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용솟음쳐 나오니 말이다. 아! 자랑스러워라. 나의 손주들아.
― 큰 손자 문바우에게 쓴 문익환의 옥중편지(1991. 7. 2) 중에서 


감옥에서도 요가, 독서, 편지, 저술 등등을 하면서 나름대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문익환 목사였지만 손주들의 편지를 기다리며 그 아이들을 생각하는 순간은 소홀히 할 수 없는 즐거움의 시간이었다. 할아버지와 마주해서 정을 나눌 시간은 적었지만 아이들의 순수한 애정과 걱정 어린 마음은 귀여운 편지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최고의 펜팔친구인 문익환 할아버지에게 보낸 어린이들의 편지를 몇 가지 소개한다. 

 

“할아버지, 어떤 언니는 북한사람이 밉다고 하는데…”
“보라야, 내가 너라면 사랑하고 싶다고 쓸래”


📩 손녀 문보라(10세)의 편지
어떤 언니는 북한 사람은 모두 밉다고 했는데 학년이 높으니 따질 수도 없었지요. 할아버지께서 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1989. 9)
 
 
📨 늦봄의 답장
보라야! 네 마음에도 통일밖에 없구나. 통일된 삼천리 강산 웃는 얼굴이구나. 교지에 실린 5학년 언니의 글을 읽고 마음이 상했구나. 북한 사람 모두 밉다는 글 실은 선생님이 문제지. 내가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구? 내가 너라면 나도 교지에 북한 사람 모두 사랑하고 싶다는 글을 써내겠다. 사랑해서 하나 되어 새 나라 만들어 가야 할 처진데 미워한다는 거, 이거 민족의 비극 아니겠니? 미워한다는 건 작은 마음이지. 사랑한다는 건 큰마음이고. (중략) 반장이 되었으니 마음이 더 커져야겠구나. (1989. 9. 20)
 

“할아버지 빨리 석방되실 걸로 믿어요”


📩 엉뚱한 상상력으로 웃음을 주는 큰 손자 문바우
할아버지가 빨리 석방되실 걸로 믿어요. 그럼 뒷면의 토막 만화 즐기세요 (1987. 2. 8, 10세)
 


📩 새로 산 클라리넷, 열심히 연습하고 배워서 할아버지한테 먼저 들려드릴께요!(1991. 7. 15, 14세)
 
 
 

감옥에 또 들어간 외토리 할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요


📩 하나밖에 없는 외손녀 박문숙(10세)
감옥에 또 들어간 외토리 할아버지가 너무 불쌍합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친구를 그렸습니다.
 
 
📨 늦봄의 답장
문숙아 할아버지는 정말 기쁘구나.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문숙의 마음이 그리도 안타깝고 그리도 아름다울 수가 없구나. 시도 좋고 그림도 정말 좋구나. 그러나 할아버지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불쌍하지는 않단다. … 우선 문숙의 사랑이 담뿍 담긴 편지를 받을 수 있는데 뭐가 불쌍하니? 그리고 할아버진 오랜만에 푹 쉴 수 있고 고요히 기도할 수도 있고 느긋이 책도 읽고 생각도 정리할 수 있는데 뭐가 불쌍하겠니? 시도 쓰고 건강에 관한 책도 완성해야지. 감옥이라는 게 사람 못 살 곳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니란다. 여섯 번째니까 난 이제 아주 익숙해져서 올 데 왔다는 생각마저 들거든. 고향 집에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단다. 사랑하는 식구들, 친구들이야 눈만 감으면 언제나 볼 수 있구. (1991. 6. 14)
※ 1991년 6월 6일 문익환 목사는 모처럼 집 마당에서 손주들이 노는 것을 보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던 중에 전화를 받고 외출하는 그길로 연행되었다. 그 다음날 손녀 문숙이 놀라고 슬픈 마음을 편지에 전했다.

 

“큰아버지 몸건강해? 지겹지 않아?”


📩 큰아버지가 좋아한 화가, 조카 문영미(12세)
나 어제 그림그리기대회에서 동상을 탔어(1977. 5. 12)
 


아이들이 재잘재잘 알려주는 소소한 일상이 평화롭고, 그것이 잔잔한 위로를 준다. 문익환 목사의 감옥생활 10여 년은 어린이를 성인으로 자라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지는 필체만큼 생각과 꿈도 여물어갔다. 쑥쑥 자라나는 아이들을 직접 볼 기회는 적었지만 오히려 글로써 소통한 덕분에 성장의 과정을 두고두고 꺼내어 볼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신비가 아이들의 편지 속에 담겨있다. 

 

  <글: 박에바>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쓰는 것 보다는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동적 내향인, IS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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