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5월 <문익환의 가족>

🈷️ 네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문재린

일제에 공산당에 소련군에…죽음의 문턱 넘나든 일생


민족주의자 기독교인이었던 문재린은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고 공산당원들의 적이었다. 그로 인해 북간도 지역 지도자로서 피할 수 없었던 죽음의 고비를 네 번이나 맞닥뜨렸다.
 
◇1941년 선교사 송별사진. 뒷줄 오른쪽 두번째가 문익환 목사. 그 옆이 문재린 목사.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무자비한 탄압…주민들 살리려 자수

첫 번째 죽음의 고비는 북만주 독립운동의 여파에 따른 것이었다. 1910년대 북간도에서는 민족운동 흐름이 거세어졌는데 명동촌은 그 중심이었다. 문재린은 명동중학교 졸업 즈음에 중국으로 유학, 3년 반의 중국생활을 마치고 1916년 명동촌으로 돌아와 교사를 거쳐 소비조합을 맡아 일했다. 독립운동이 거세어지자 문재린도 조합 일을 내던지고 간도 최대독립운동체인 <국민회>의 지회 서기를 맡음과 동시에 <독립신문>의 기자가 되어 민족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용정 3.13만세운동,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독립군의 승리, 15만원 탈취 사건 등으로 북만주의 독립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자 일본군은 1920년 8월부터 북만주 지역에서 무자비한 탄압을 시작했다. 10월에는 명동촌 인근에서도 청장년 33명이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명동촌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 명동교회 간부들은 회의를 열고 주민 전체의 참변을 피하기 위해 문재린을 포함한 5명이 자수하기로 했다. 11월 10일 자수한 이들 간부 중 1명은 결국 처형되었고 4명은 1921년 2월 10일에 석방되었다. 

 

헌병대 방공호에 갇혀…학살 모면

두 번째 죽음의 고비는 해방 직전에 찾아왔다. 1945년 7월 20일 용정에서 이권찬 목사와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함경도 성진헌병대로 끌려갔다. 헌병대 방공호에 갇혀있는 동안 두 번이나 서울, 함흥으로 이송될 뻔했으나 미군의 폭격이 심해 이송은 실현되지 못했고, 8월 11일 석방되어 12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전쟁에 패할 것이 분명해지자 경성의 일본군 조선헌병대는 조선의 유지들을 한꺼번에 학살할 것을 지시했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이 끌려가게 된 것이라고 문재린은 나중에 듣게 되었다.
 

 

공산당원에 끌려가…은진중 동창이 풀어줘

세 번째와 네 번째 죽음의 고비는 해방 전후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것이었다. 성진헌병대에서 풀려난 며칠 후 해방이 되었다. 중앙교회에 현수막을 붙여 해방을 축하했고 용정에서 한인회를 만들고 회장이 되어 새날을 꿈꿨다. 10월 1일 서울에서 열리는 기독교대회에 참석차 2주간 서울을 방문했다. 이승만 박사도 만났다. 용정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권유들을 뿌리치고 돌아온 며칠 후인 10월 18일 밤 공산당원들에게 붙들려갔다. 이승만 박사로부터 어떤 지령을 받았는지를 추궁받았지만 강력히 부인했고, 때마침 은진중학교 출신의 팔로군 3명이 용정에 와 있었기에 이들의 도움에 힘입어 1946년 1월 6일 풀려났다.

 

소련군 연길 감옥에 수감…무죄 석방

석방 3주 만에 다시 소련군 사령부 연길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반감을 품은 공산당원들의 고발 때문이었다. 미국의 스파이 아니냐는 취조를 부인한 끝에, 잡혀 온 30여 명 중 절반이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위험을 피하고 무죄로 풀려났다. 4월 26일까지 110일간의 고난이었다.


늦봄은 자신이 부친의 낙천적 태도를 이어받았다고 했는데, 문재린이 네 번의 사선을 넘을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하나가 바로 낙천적 태도 아닐까? 하느님에 대한 믿음, 이로부터 나오는 자신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낙천적 태도! 늦봄은 그런 부친을 굳건하고 거대한 ‘흰 뫼’(백두산을 지칭)로 여겼다.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1981. 9. 8, 1982. 12. 24)
문영금 문영미 (2019).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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