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죽음의 고비는 해방 직전에 찾아왔다. 1945년 7월 20일 용정에서 이권찬 목사와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함경도 성진헌병대로 끌려갔다. 헌병대 방공호에 갇혀있는 동안 두 번이나 서울, 함흥으로 이송될 뻔했으나 미군의 폭격이 심해 이송은 실현되지 못했고, 8월 11일 석방되어 12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전쟁에 패할 것이 분명해지자 경성의 일본군 조선헌병대는 조선의 유지들을 한꺼번에 학살할 것을 지시했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이 끌려가게 된 것이라고 문재린은 나중에 듣게 되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죽음의 고비는 해방 전후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것이었다. 성진헌병대에서 풀려난 며칠 후 해방이 되었다. 중앙교회에 현수막을 붙여 해방을 축하했고 용정에서 한인회를 만들고 회장이 되어 새날을 꿈꿨다. 10월 1일 서울에서 열리는 기독교대회에 참석차 2주간 서울을 방문했다. 이승만 박사도 만났다. 용정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권유들을 뿌리치고 돌아온 며칠 후인 10월 18일 밤 공산당원들에게 붙들려갔다. 이승만 박사로부터 어떤 지령을 받았는지를 추궁받았지만 강력히 부인했고, 때마침 은진중학교 출신의 팔로군 3명이 용정에 와 있었기에 이들의 도움에 힘입어 1946년 1월 6일 풀려났다.
석방 3주 만에 다시 소련군 사령부 연길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반감을 품은 공산당원들의 고발 때문이었다. 미국의 스파이 아니냐는 취조를 부인한 끝에, 잡혀 온 30여 명 중 절반이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위험을 피하고 무죄로 풀려났다. 4월 26일까지 110일간의 고난이었다.
늦봄은 자신이 부친의 낙천적 태도를 이어받았다고 했는데, 문재린이 네 번의 사선을 넘을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하나가 바로 낙천적 태도 아닐까? 하느님에 대한 믿음, 이로부터 나오는 자신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낙천적 태도! 늦봄은 그런 부친을 굳건하고 거대한 ‘흰 뫼’(백두산을 지칭)로 여겼다.
<글: 조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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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1981. 9. 8, 1982. 12. 24)
문영금 문영미 (2019).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삼인
월간 문익환_5월 <문익환의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