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7월 <늦봄과 민주주의>

🈷️ ‘청년’ 문익환 목사가 꿈꾼 민주주의는?

[1958, 1961년 설교문을 중심으로]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고민 등장 

▲설교노트 속의 민주주의
문익환 목사가 생각하고 꿈꾸는 민주주의는 어떤 것이었을까?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도 지켜낸 민주주의가 좌절된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1976년의 3.1민주구국선언이 있기 한참 전인 1958년과 1961년의 설교문 속에서 ‘젊은 목사’ 문익환의 민주주의를 살펴보려고 한다. 

 
◇ 40대의 문익환 목사. 교수로 재직하던 한신대에서 제자들과 


문익환 목사는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신학 유학을 끝마치고 1955년 귀국했다. 그리고는 부친 문재린 목사가 설립한 서울 중앙교회의 목사직을 이어받아 38세에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한다. 이 교회는 나중에 중부교회가 되었다가 한빛교회가 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 시기에 매주 설교를 준비하며 정리한 설교노트가 보존되어 있어 당시 설교 내용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문익환 목사의 설교에는 당시의 사회 문제와 연관 지어 교회가 해야 할 일에 관한 고민이 종종 등장한다. 여기서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교회에 전하는 메시지 중 두 가지 설교를 소개한다. 
 
◇ 문익환 목사의 설교노트들
 

“교회가 민주주의의 산파 노릇을 하지 못하면, 영원히 민주주의가 있어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1958년 중부교회 설교
-날짜: 1958년 12월
-성경구절: 야고보서 1장 19~25절 
-제목: 그리스도인과 민주주의
 
◇ ‘중부교회(한빛교회 전신) 강단’ 설교노트(1958)와 ‘그리스도인과 민주주의’ 설교 원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한국의 민주주의> 
사실 우리 민족은 민주주의 비슷한 데도 도달해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헌법은 확실히 민주주의적입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와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헌법은 민주주의라는 새 아기를 받을 강보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헌법이 기다리던 민주주의라는 아기는 아직 탄생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근본사상 ① - 개인의 존엄성>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냐? 현대 민주주의의 근본 사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의 존엄성입니다. “한 사람의 생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인 것입니다. … 전체를 위해서 어느 한 사람도 까닭 없이 억지로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값이 전국민의 값과 같다는 것입니다. …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와 맞먹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이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이미 그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존엄성을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는 기독교회의 산물입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근본사상 ② - 자유>
다음으로 그것은 자유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난 24일 통과된 *보안법 개정안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국민의 기본 권리인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2·4파동: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1960년 차기 정·부통령선거의 선행책으로 야당의 언론제한을 주제로 하는 신국가보안법(新國家保安法)을 구상, 1958년 12월 24일 국회에서 야당의원들을 폭력으로 몰아내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여러 법안들을 통과시킨 일련의 정치사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법을 진정으로 이룸으로 교회가 민주주의를 낳아야> 
한국의 헌법은 결코 다른 나라의 헌법보다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죄악이 가득하고 법을 범하고도 종로 네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법에서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법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따라 행하는 것이 법을 이루는 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신교도들이 그 신앙에 철저해지고, 참자유인이 되어서 그 자유를 수호하게 될 때 비로소 한국에도 민주주의가 탄생할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서 헌법이 마련되어 있고, 정부도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민주주의의 산파 노릇을 하지 못하면, 한국에는 영원히 민주주의가 있어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5·16 쿠데타는 한국 민주주의의 실패를 세계 만방에 선포한 것입니다”


▲1958년 중부교회 설교
-날짜: 1961년
-성경구절: 로마서 7장 14절~25절
-제목: 한국에서도 민주주의는 성공할 것인가?
 
◇ ‘중부교회 강단’ 설교노트(1961)와 ‘한국에서도 민주주의는 성공할 것인가?’ 설교 원고.
노트 표지에 ‘하나님은 계신가?’라는 주제를 적은 문구가 있다.

<설교문 앞 장의 기록>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눈앞이 아찔해지고, 무엇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바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데, 이 4.19, 5.16을 겪고 난 후에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무엇과 투쟁해야 하는가? 
제가 만일 지난 주일 예고한대로 “회의와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다면, 얼빠진 사람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택한 제목이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성공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5·16 군사쿠데타는 한국 민주주의의 실패>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신교도로서 민주주의를 최선의 것으로서보다는 비교적 좋은 것으로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가 한국에서 과연 살 수 있는가? 이것은 5·16 군사 쿠데타와 함께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커다란 문제입니다.
5·16 쿠데타는 한국 민주주의의 실패를 세계 만방에 선포한 것입니다. 한국 민족이 아직 민주주의를 해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세계의 이목 앞에 드러낸 것입니다.


<온상에서 자라는 것과 같았던 기독교인의 어린 신앙>
기독교적인 신앙의 뒷받침 없이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노력한 우리, 그리 되리라고 믿은 우리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로 가득 차 있는 인간의 야망을 이루려는 생각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자유가 허락될 때, 우리가 할 일은 그 자유를 남용해서 서로 잡아먹는 것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어렸고, 경험이 없었습니다. 진정으로 자유를 행사해 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의 신앙은 온상에서 자라는 신앙에 불과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 누리는 자유>
법의 제재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자유로 원해서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될 때에만 참자유가 수립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소원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뀌어져서 새사람으로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것만이 깨어진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요, 잃은 자유를 다시 찾는 길입니다.


앞의 설교는 1958년 12월 24일 2·4파동으로 민주주의의 근본인 자유사상이 침해될 위기에서 쓰였다. 두 번째 설교는 그 이후 4.19(1960)와 5.16(1961)이라는 역사적인 두 사건을 겪고 나서이다. 4.19에는 교인 김창필 씨가 경무대 앞에서 총에 맞아 숨지는 일도 있었다. 1992년 사월혁명상을 수상한 문익환 목사는 이 상은 김창필을 대신하여 받은 것이며 자신은 4.19 때 3.15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사설 「한국은 경찰 국가인가」(기독교사상 1960년 5월)를 쓴 것밖에는 한 일이 없다고 했다. 40대의 문익환 목사는 이후 민주화 운동이 수십년에 걸쳐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그리고 현재의 민주주의를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메시지를 남길지 궁금해진다.

 
“일제 36년을 기다리던 해방이 왔다고 좋아하는 것도 잠깐 우리 앞에는 분단의 절벽이 버티고 섰거든요. 4·19때의 감격 또한 어떤 것이었소? 이제야 정말 새 시대가 오나 보다 했는데 5·16 을 맞아야 했고, 10·26으로 박 정권이 무너지자 민주의 새 시대가 열리는 줄 알았는데…… 는데... 는데, 이좌절 하나하나로 민족은 골병이 드는 거예요…. 
역사를 산다는 건 기다림을 산다는 말이 아닌가 싶군요. 기다림의 성취에 안주해 버리는 건 역사를 사는 일을 포기해 버리는 일인 거죠. 한 기다림의 성취는 또 다른 기다림의 약속일 뿐, 역사를 산다는 것은 기다림과 기다림의 연속을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문익환 옥중편지 1989. 6. 11.)
  

  <글: 박에바>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쓰는 것 보다는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동적 내향인, IS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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