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7월 <늦봄과 민주주의>

🈷️ 늦봄과 장준하

장준하 죽음의 충격으로 민주화·통일 운동의 길에 들어선 늦봄 

“네가 하려다가 못한 일을 내가 해 주마” 

 
[💌편집자 주] 여섯 번째로 수감 중이던 92년 초, 늦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길을 회고하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민족사의 중대 고비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고 본 1975년 상황과 76년 3.1민주구국선언 전후 과정을 정리하는 내용이었다. 75년에 늦봄은 월남전 종식과 장준하의 죽음으로 두 번의 충격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 글에서는 장준하의 죽음이 준 충격으로 3.1민주구국선언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 복음동지회 회원 도미 송별기념 촬영(1949.9.20). 아랫줄 맨 왼쪽이 장준하 선생. 윗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일본신학교 동기인 문동환 목사. 문익환 목사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유학 중이어서 같이 찍지 못했다. 


학교로는 늦봄의 3년 후배이지만 장준하는 ‘오직 유일하게 늦봄의 눈높이에서 현실정치에 관여하는 사람’이었다. 늦봄은 그가 자신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놀랄 만큼 앞서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장준하는 73년 말 ‘유신헌법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추진, 불과 열흘 만에 40만 명의 서명을 받는 등 거침없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긴급조치 1호가 내려지고 체포 1호도 장준하가 되었다.

박정희를 주저 없이 비판하고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런 장준하가 죽었다. 응암동에서의 절규, 김상진 열사의 죽음, 긴급조치 9호 등이 이어지는 동안 몸서리쳐지는 억압의 짓누름을 느끼고 있던 늦봄은, 그의 죽음으로 ‘역사의 퇴행을 막으려는 마지막 노력이 분쇄’되었다고 생각했다. 장례위원장인 늦봄의 마음가짐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장준하 씨의 관을 땅속으로 내리면서 그에게 약속했지요. “네가 하려다가 못한 일을 내가 해주마” 나는 그의 죽음을 땅에 묻어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죽음을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장지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백기완 씨로부터 “이제 문 목사님이 장준하 영감의 대타로 나서 주지 않겠습니까”라는 제안도 받았다. 늦봄은 마음으로 ‘다짐은 했지만 과연 그의 대타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늦봄은 『사상계』에 실린 장준하의 사설을 모아 그의 사상을 짚어보며 1975년을 보냈다. 1976년을 맞은 시점에서도 늦봄은 직접적인 저항 행동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76년을 맞이하는 나는 온 겨레와 함께 암담하기만 했었죠. 장준하 씨는 죽고 말았고, (중략) 그러나 내게는 성서 번역이라는 나의 생을 건 일이 있어 그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암담한 오늘의 역사를 잊으려고 했죠.


그의 이런 생각은 아내 봄길과 동생 문동환 교수가 민주화 현장에서 부지런히 뛰고 있어, 그로서는 다소 비켜 서 있어도 위안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76년 2월 어느 날 늦봄을 움직이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성서 번역을 하던 방에 있던 달력의 3월 1일 빨간 글씨가 눈을 콕 쏘았다. 곧바로 액자에 담겨 걸린 장준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3.1운동 58주년이구나. 이 시점에서 준하 네가 살았다면 뭘 할 거냐?” 늦봄은 옆에 놓인 책자에서 답을 찾았다.
 
때마침 『씨알의 소리』가 보여 펼쳐 보았더니, 거기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이라는 장준하 씨의 글이 실려 있더군요. 단숨에 읽었지요.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아, 여기에 장준하가 이 시점에서 하고 싶은 말들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내가 할 일이 눈앞에 보였어요. 이 암흑기, 이 침묵기에 민족사의 미래를 제대로 바로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기록이라도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죠.


늦봄이 전적으로 공감한 장준하의 글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은 어떤 내용인가 보자. 그것은 박 정권이 73년 6월 23일 발표한 ‘평화통일에 대한 외교 전략’의 허구성을 지적한 후, 한민족의 통일을 위한 ‘민족 외교’의 진행을 주창한 글이다. (정확한 제목은 「민족 외교의 나아갈 길」, 『씨알의 소리』 73년 11월호에 수록) 

 

◇늦봄은 1976년 2월 장준하의 이 글을 읽고 곧바로 백기완을 찾았고 이어 3.1민주구국선언의 기초를 만들게 되었다


장준하는 정부 발표대로 남북이 국제기구에서 마주 앉거나 유엔 동시 가입을 해도 좋다는 말은, 분단을 국제사회에 내어놓고 합법화하는 논리가 될 위험이 있고, 분단 조국의 현실을 분단 강요 외세들의 냉혹한 국제 정치권력 와중으로 빠뜨릴 논리가 되기도 한다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남쪽을 지지해 달라’ ‘북쪽을 지지해 달라’하면서 민족통일의 중요 과제를 분단을 강요한 밖에서 찾으려 하는 것, 이는 남과 북은 물론 우리 백성 모두의 책임이라고 단언한 장준하. 그는 ‘한민족의 통일과 통일 이후 민족 활로 개척’을 위한 ‘민족 외교’를 진행하려면, 남과 북이 모든 분야에서 외세 의존적인 요소를 청산하는 과정을 거친 후 통일을 위해 외압과 외세를 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래를 제대로 보는 장준하의 견해에 대해 늦봄도 전적으로 공감을 보였다. 그러나 늦봄의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인 부분은 글의 후반에 보인 장준하의 안타까우면서도 간절한 외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장준하는 글 후반에서 조국은 누구의 것이며 누가 진실로 통일을 원하는가를 묻고 대답했다. 조국은 특정인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며, 통일을 원하는 사람은 분단으로 고통받는 민족적 양심들과 절대다수 백성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도 분단 현실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백성들을 에워싼 채 서로 할퀴고 물어뜯고 있는 현실에 대해 그는 통탄했다. 5천만이 힘을 합해도 1억이나 2억 인구를 가진 외세에 대항하기 어려운 마당에 지금은 어찌하여 민족의 단결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돌진하고 있느냐고 그는 개탄해 마지않았다.

그리고는 간절한 외침을 토해냈다.
 
겨우 5천만을 단결시킬 위대한 통일 정신이 아닌 삼천리 금수강산에 비길 수려한 통일 양심의 거인이 없단 말인가. 
아니다, 내 백성 중에 한 사람이면 누구든지 반드시 통일을 쟁취해 낼 속힘이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다만, 민족통일이라는 위대한 성사 앞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통째로 바칠 수 있는가를 다짐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동시에 내버릴 수 있어야만 한다.
 

이 대목에서 늦봄은 장준하를 땅에 묻으며 한 약속 “네가 하려다가 못한 일을 내가 해주마”를 다시 떠올리지 않았을까? 

장준하의 글을 읽은 늦봄은 곧바로 백기완을 찾았고, 두 사람의 생각이 같음을 확인한 후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성명서를 기초했다. 이미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는 구국선언문의 초안은, 장준하의 뜻과도 일치하는 ‘민주화를 하라, 통일의 길을 열라’는 요구와 노동자 생존권과 빈익빈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늦봄의 생각인 ‘경제정의를 실현하라’는 요구, 이 3가지가 근간이 되었다.

 
◇장준하 선생 9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문익환 목사와 김영삼 전 대통령. 


장준하의 기일이자 1989년 방북 사건 4차 공판이 있었던 8월 17일, 늦봄은 시 「장준하」를 써서 말했다. “당신은 … 모든 통일은 좋다며 김구 선생님 뒤를 따르다가 갔지만 나는 … 젊은 학생 노동자들이 … 민족 제단에 희생 제물로 몸을 바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 … 뒤통수를 얻어맞고 정신없이 갔다 왔다오”
 
나는 그 보고를 국민에게 드리려고 오늘 법정에 섰지요.
이제 나도 김구 선생이나 당신이 앉아 계시는 응원석에 앉아 응원이나 해도 될 것 같군요. 경기장에는 진짜 팔팔한 젊은 선수들이 들어섰으니까요.


방북 사건으로 첫 법정에 선 날은 김구 선생의 40주기였고 새 법정에 선 날은 장준하의 14주기라며, 늦봄은 이 모두를 우연이 아닌 하늘의 섭리로 느꼈다.
 
“하느님은 이렇게 김구-장준하로 이어지는 통일운동 선상에 나를 꽉 박아 세우시는군요”
(고 장준하 선생 부인에게 쓴 편지. 89년 8월 17일)


<글: 조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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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문익환 옥중 편지 (1992. 2. 13~29, 1989. 8. 17~27)
김형수 (2018). 『문익환 평전』. 파주. 다산책방
문익환 (1999). 『문익환 전집 1권, 2권』시집1,2. 사계절출판사
장준하 (1973). 『씨알의 소리』. 7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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