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8월 <옥중의 늦봄>

🈷️ 수도 없이 들락거린 감옥의 흔적

[기록으로 본 옥살이]

“난 감옥에 오지 않았으면 인생을 헛살 뻔 했어”

 

늦봄에게 감옥은 세계가 넓어지는 계기

▲ 태양의 권리를 박탈하고 정서의 샘을 고갈시키는 곳
근대적 감옥은 수감자들의 시간과 공간을 통제함으로써 그들을 다른 인간이 되도록 ‘지속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통치기술로 등장했다(이종민, 1998). 엄격한 규율에 따라 수감자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감옥 행정은 이를 운영하기 위한 세세한 규정들을 추가해갔고 수인에게 감옥은 “인간에게서 태양의 권리를 박탈하고 정서의 샘을 고갈시키는 결과 메마른 인간을 만드는 기계의 작용하는 법으로써 행하는 곳(김광섭, 1976)”이었다. 민주화운동 시기 적용되었던 행형법(법률 제3289호)을 살펴보면 그 목적은 수형자와 미결수용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며 통제된 감옥일상 속에서 외부와의 제한된 관계 맺기를 일부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옷과 음식 따위를 대어주면서 뒷바라지하는 일을 의미하는 ‘옥바라지’는 수감자를 고립시키고자 하는 감옥의 목적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후지이 다케시, 2016). 수인으로서 늦봄도 고립과 저항이 점철된 감옥에서의 시간을 보냈지만 “난 감옥에 오지 않았으면 인생을 헛살 뻔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문익환 1992. 3. 7; 4. 17)”라고 고백할 만큼 감옥을 예상하지 못했던 큰 성과이자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는 계기로 지목했다.

 

아내 봄길과의 편지는 살아있는 기록

▲어떤 흔적들이 있나
늦봄의 감옥 생활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록은 뭐니해도 ‘편지’이다. 늦봄이 감옥에서 쓴 편지, 늦봄의 아내 봄길이 감옥으로 보낸 편지, 감옥에 있는 늦봄에게 다양한 개인, 단체들이 보낸 편지들은 늦봄 아카이브가 소장하는 대표적인 감옥 기록이다. 이 편지에서 우리는 개인들의 일상과 사적 이야기뿐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풍경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늦봄의 눈을 빌어 한국 민주화운동의 다양한 사건과 정황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감옥의 흔적은 다름 아닌 늦봄이 감옥에서 읽었던 책들이다. 지난 2021년 초에 있었던 아카이브 전수조사에서는 약 6,562권의 도서간행물이 확인되었는데 이 중에서 실제로 감옥에 들어갔다 나온 책들의 숫자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가족들의 증언과 편지에 언급된 내용들로 미루어보았을 때 늦봄이 감옥에서 벗한 책은 양도 상당하지만 전공인 구약 성경 번역에 관련된 것부터 시작해 불어사전, 신학서, 각종 논문과 정기간행물들뿐 아니라 시와 소설, 동화, 요가에 관한 책까지 다양한 범주에 이른다. 
 
당신에게
편지 4신까지 받았어요. 양말, 버선도 받고 우유는 내일부터 먹게 될 것 같소. (김)원철에게 축하한다고 해주시오. 엘리아데의 Yoga : Freedom and Immortality와 박경리의 ‘토지’ 3부 2권을 보내주면 좋겠소. 요새 나온 좋은 시집들은 없는지? 그러면 다시 만날 때까지 계속 편지 주시오. 편지 받는 것이 낙이니까.
1981. 2. 13. 당신의 달님


현재 한신대의 임시수장고에는 약 152개의 보존상자에 늦봄의 책과 간행물이 담겨 있다. 감옥에 책을 반입할 때는 당국의 검열을 받았는데 늦봄의 책 중에 검열 표시와 도서열독허가증이 붙여져 있는 것들이 상당수이다.
 
◇전수조사 당시 도서 간행물을 유형별로 구분하던 작업장의 모습


한편, 감옥 생활의 후반기에는 당국의 집필허가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때 쓴 것으로 보이는 원고와 노트 들이 남겨져 있다. 이 중에는 ‘건강 노트’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몇 권의 노트들도 있다. 여기에는 문익환 사후에 간행되었던 『더욱 젊게』(1994)의 초고로 보이는 글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은 파스 요법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건강 관리에 관한 생각을 담고 있다. 이 외에도 전주, 안동, 진주, 안양, 공주, 청주 등 전국의 감옥에 갇혀있었던 문익환을 면회하며 적었던 가족들의 면회기록, 수인으로써의 표현 수단이었던 잦은 단식에 관한 기록(대표적으로 아들 문호근이 쓴 “단식기”는 늦봄 아카이브에서 전문을 읽을 수 있다)과 건강 악화로 병원 치료를 받기 위해 벌였던 가족들의 투쟁기록들도 감옥 생활을 보여주는 흔적들이다. 
 
◇ 집필허가증이 부착된 집필허가용 노트(1982년 안양교도소 2255)와 건강 저술 정리 노트(1991~1993년 안동교도소 1338) 
 
◇안동 교도소에서 장남 문호근과 파스치료하는 문익환 목사
 

공공-민간영역의 숨은 기록 수집해야 

▲ 장차 늦봄 아카이브가 수집해야 할 것들
늦봄 아카이브에는 없지만 공공 영역의 아카이브에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감옥의 흔적들로 늦봄을 감옥에 이르게 한 사건과 관련된 수사기록, 재판기록, 수감기록이 있다. 이 공공기관의 기록들은 또 다른 입장에서 기록된 감옥생활의 증거이자 그 과정을 담당했던 기관 담당자들의 업무기록이기도 하다. 경찰청, 법무부, 국가정보원의 기록관들, 국가기록원, 법원기록보존소와 같은 아카이브들에 남겨져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 기록들은 성경번역을 하던 학자 늦봄이 초범으로 감옥에 가게 된 때부터 재야의 민주화와 통일운동 인사로 전과범이 되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다. 늦봄의 행적은 또한 신문, 방송을 통해 많은 부분이 기록되었다. 방송 아카이브들이 보유하고 있을 보도되거나 혹은 보도되지 못한 기록들은 보다 생생한 현장의 기록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공공과 민간 영역에 남아있을 늦봄에 관한 기록들은 장차 늦봄 아카이브가 기록화(documentation)할 중요한 수집 대상이다.

 

감옥에서 쉬지 않고 시-편지 등 집필

▲ 지면에 소개된 감옥의 흔적들
1980년대 진보적 문인들의 잡지였던 『실천문학』 1998년 여름호에는 문익환의 육필원고가 실렸다. 여기에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일제의 악랄한 고문을 받고 차디찬 주검이 되었을 때, 홀로 살아남은 벗, 문익환이 훗날 수도 없이 들락거린 감옥에서 쉬지 않고 썼던 시”라는 소개와 함께 두 편의 시가 실렸다. 1978년 2월 28일 밤 용산경찰서에서 쓴 “길가집 이층방에 앉아서”와 1976년 1월 21일 쓴 “서울 상공의 낮달”이 그것이다. 늦봄 아카이브에 원본이 남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78년 2월의 늦봄은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수감되었다 가석방 상태였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가 어떤 이유로 용산경찰서에 가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해 10월 13일 오후 7시, 기독교회관 대강당 금요기도회 후 낭독한 그의 글은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폭로한 내용을 담고 있었고 이로 인해 늦봄은 다시 수인의 몸이 되었다. 
 
◇ “서울 상공의 낮달”(1976)과 "길가집 이층방에 앉아서"(1978)의 육필원고


늦봄이 감옥에서 쓴 편지도 다양한 지면에 소개되었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간행하는 『살림』지에는 1991년 9월호부터 1993년 3월호까지 문익환의 옥중편지가 연재되었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만드는 『한국기독교와 역사』 1992년 11월호는 특집주제 “한국교회와 통일운동”으로 꾸며졌는데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자료 섹션에 1992년 1월 4일부터 2월 1일 사이에 보냈던 옥중편지 13편이 16페이지에 걸쳐 실려있다. 당시 늦봄의 편지는 대부분 아내인 박용길에게 보내졌고 그녀는 편지를 정서하거나 인쇄하여 국내외 지인과 단체들에게 보냈으며 이렇게 지면에 실리게 하여 그 생각과 뜻이 더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도록 하였다. 
 
◇통일의 집 가옥, 안방에 있는 책장에는 늦봄이 가까이했던 책들을 넣어두었는데 제일 아래 칸에는 옥중편지가 연재되었던 『살림』지가 꽂혀있다.


늦봄의 옥중편지들은 일정 기간별 혹은 주제별로 묶어 단행본 『꿈이오는 새벽녘』(1984), 『통일을 비는 마음』(1989),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1991), 『목메는 강산 가슴에 곱게 수놓으며』,(1994), 『더욱 젊게』(1994) 로 출판되었다. 또 일본어로 번역되기도 했는데 일본의 주부들이 취미활동으로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번역 대상물로 선정한 ‘가장 주목되는 한국어 텍스트’가 ‘문익환과 박용길의 편지’였다(김형수, 2018). 이 외에 서신을 재구성하거나 해제해 소개한 책, 『청소년이 읽는 우리수필 2』(2003); 『장준하, 문익환 다시 읽기』(2019)도 출판되었다.
 

◇ 늦봄의 옥중편지집들을 비롯해 출판된 늦봄의 책들이 통일의 집 가옥, 안방 서가에 꽂혀있는 모습

 

가독성 있는 기초자료 확보 절실 

▲ 찾고, 읽어주고, 의미를 만들어주어야

아마도 아카이브에 있는 수많은 사료들은 이용자가 찾아주지 않는다면 평생 이용되지 못하고 잊힐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늦봄과 봄길의 편지들도 상당수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온라인 아카이브에서 디지털화된 이미지 형태로 서비스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이러한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료는 누군가 자기를 찾고 읽어주고 의미를 만들어주기를 기다리며 수많은 사료들 속에서 기다리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료와 이용자의 만남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다.

2020년 문익환 통일의 집은 옥중편지를 온라인 아카이브로 만드는 작업과 병행하여, 찾아보기 쉽게 주제별로 선별한 옥중편지집을 출판하였다(사단법인 통일의 집 기획, 『늦봄의 편지』, 도서출판 늦봄, 2020). 이렇게 늦봄의 편지가 빛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수많은 도움의 손길이 함께 했다. 당시 아카이브 담당자였던 필자의 입장에서 느꼈던 가장 큰 어려움은 옥중서신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으면서 많은 분량의 편지를 읽고 텍스트로 만드는 지난한 작업을 해낼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 역할을 담당해주셨던 문익환의 아들 문의근 선생께서는 편지집 서문에서 “무엇보다 악필로 유명한 아버지의 글씨를 저만큼 제대로 읽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 선뜻 나서기 어려웠던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동참의 변을 적고 있다. 필자에게 이 말은 장차 아카이브가 지향하는 서비스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했다. 

많은 양의 디지털화된 사료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가독성있는 기초자료의 확보는 아카이브 서비스의 차원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늦봄의 편지는 이미 간행된 많은 분량의 편지 텍스트가 있었지만 서로 다른 편집자에 의해 구성되고 선별된 탓에 단행본에 포함되지 못한 편지들과 내용 조각들을 남겼다. 아카이브에서는 1차 사료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데 집중했고 나아가 이용자가 읽기 쉬우며 재사용 할 수 있도록 텍스트화를 진행했다. 현재 늦봄 편지는 온라인 늦봄 아카이브에서 디지털화된 이미지와 함께 다양한 가능성을 보유한 텍스트 형태로 이용할 수 있다.
 

◇ 편지집 간행을 위해 진행했던 텀블벅 행사 


 

전체 편지 아카이브 소장기록으로 재정비

▲ 봄길이 감옥으로 보냈던 편지, 2,304통
하지만 늦봄의 옥중편지는 주고받은 편지로 봄길 박용길이 쓴 약 2,304통에 달하는 내용적으로 연관된 기록을 갖고 있다. 그간 이 편지들은 옥중편지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으나 2019년 봄길 탄생 100주년 기념편지집 간행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자 했던 “비타민보다 더 영양제” 같았던 봄길의 편지에는 가족이자 동반자로서뿐 아니라 한 사람의 주체적인 여성 활동가로서 성장해가는 그녀의 면모가 유감없이 담겨 있다. 
 
◇ 말린 꽃과 사진 등으로 예쁘게 꾸며 작성한 봄길의 편지


빈번한 활용을 감당하기 위해선 편지 실물의 체계적인 관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2021년도 하반기에는 봄길 편지에 대한 전체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 작업을 통해 전체 편지가 아카이브 소장기록으로서 고유번호를 얻었고 보존에 적합한 재료로 재정리되었다. 또한 기록학 대학원생들의 자원봉사 활동으로 편지의 텍스트화 작업도 진행되었다. 이 편지가 늦봄 편지 보다 상대적으로 읽기 쉽고 일상적 내용을 다루고 있어 친근하며 동시대의 사건과 인물이 소재로 등장한다는 특징은 학생들로부터 큰 흥미를 이끌어내었다. 이러한 호응에 힘입어 한 학기 만에 약 천 통에 가까운 텍스트화된 초고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양적으로 늦봄 편지 분량의 세 배가 넘는 데다가 손으로 쓴 탓에 알아보기 어렵게 흘려 쓴 부분도 있고 일본어, 한자, 영어가 섞여있다는 문제로 인해 앞으로 교정 작업에 많은 노력이 추가되어야만 아카이브를 통한 서비스가 가능하다. 
 
◇ 당신께 편지가 들어있는 보존용 박스의 모습


감옥을 매개로 작성된 늦봄과 봄길의 편지는 내용적 연관성이 깊을 뿐 아니라 사건과 인물 관계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주고받은 편지를 연계해 통합적인 활용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대개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정황을 공유한다는 전제하에 특정 독자(발신자 또는 수신자)를 위해 씌여진 것으로 맥락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부족한 편이다. 게다가 제한된 지면으로 인해 압축적이며 생략이 빈번하다는 점 또한 서간문의 맥락 파악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장유승, 2009). 따라서 두 편지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고받은 편지 간의 맥락을 밝혀 편지 텍스트를 해석하는 연구 작업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두 사람만의 색깔로 바라본 한국 현대사의 단면

▲ 여보와 당신의 대화가 담긴 디지털 아카이브를 기대하며
늦봄과 봄길이 남긴, 감옥에서 주고 받은 편지는 여보와 당신의 대화이다. 이 사실은 편지가 단순히 디지털화된 형태로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지속적인 기억(perpetual memory)인 기록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록 특성에 적합한 쉽고 편한 방법으로 기록을 제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며(오명진, 2022) 편지가 갖는 특성에 기반한 디지털 컬렉션으로 재탄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편지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시간, 공간, 인물, 사건에 관한 이해를 토대로 두 사람만의 고유한 색깔로 바라본 모두를 위한 한국 현대사의 단면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며 기초 자료로서 장차 다양한 새로운 해석과 창작의 플랫폼으로 거듭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 늦봄문익환아카이브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이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글: 아키비스트 지노>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의 삼 년 묵은 아키비스트로 늦봄과 봄길의 기록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하는 아카이브하는 사람이다.





[참고문헌]
김광섭, 思想犯, 나의 獄中記, 창작과비평사, 1976, 205쪽
후지이 다케시, 옥바라지 기억하기 (2016. 2. 28). 한겨레
이종민, 식민지하 근대감옥을 통한 통제 매카니즘 연구,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1998
오명진, 박용길의 편지 ‘당신께’ 컬렉션의 특성과 과제, 기록학연구 제72호, 2022. 4.

월간 문익환_8월 <옥중의 늦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