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9월<학자 문익환>

[시 속의 인물] 7. 장공 김재준 목사

[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어버이 같은, 아니 어버이보다 더한 스승이시여! 

 
◇서울 강북구 한신대 신학대학원 장공기념관에 전시된 만년의 김재준 목사(왼쪽)와 늦봄 사진
 
스승이시여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어버이 같은 아니 어버이보다 더한 스승이시여
― 문익환(1989), 「큰 스승이시여」, 『한 하늘 두 하늘』


늦봄은 1987년 1월 청주교도소에서 장공 김재준 목사(이하 장공)의 부음을 듣고 그를 기리는 조시를 썼다. 4일간에 걸쳐 무려 3,750여 자(띄어쓰기 제외)로 쓴 장문의 조시에서 늦봄은 ‘할 일을 유감없이 다 하고’ 떠난 그의 생을 되짚었다.

늦봄은 장공을 또 다른 부모라 여겼다. 장공은 만주 은진중학교에서 늦봄 부친 문재린목사와 함께 재직하며 동생 동환의 은사로 있었다. 해방 후 서울로 내려온 뒤 조선신학교에 편입한 늦봄은 동환과 함께 장공의 집에서 잠을 자고 기숙사에서 밥을 먹고 지냈다. 학교에서는 장공으로부터 조직 신학, 기독교 윤리, 구약학을 배웠다.
 
저의 가족이 피난 나왔을 때, 목사님과 사모님이 저의 가정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저와 동환이가 학교 다니는 동안 안방을 내주셔서 한 식솔처럼 살 수 있었던 일도 꿈 같은 추억입니다. <중략> 제 아버님과 함께 어버이로서 모실 단 한 분 스승이 김 목사님이시라면, 어머님과 함께 어버이로서 모실 단 한 분 사모님도 사모님밖에 없습니다. (옥중편지 1987. 2. 10) 
 

조선신학교 세우고 1970년까지 한신대 이끌어


장공은 스물 여섯 살이던 1926년부터 6년 동안 일본과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평양과 용정에서 교사와 목회를 한 그는 1940년 조선신학교 개교 시 실무책임을 맡았고, 초대 교수, 학장, 이사장을 거치며 1970년까지 한국신학대학을 이끌었다. 교회가 변하면 한국 사회와 역사가 변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장공은 올바른 성직자 배출에 헌신하며 수많은 인재를 양성해 냈다. 늦봄은 약 10년 동안 한신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같은 구약학자인 그를 모시며 배웠다. 
 
한국기독교장로회(약칭 기장)를 형성한 것도 장공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다. 해방 후 귀국한 외국 선교사들과 보수 교단이 서로 결탁하여 장공을 중심으로 한 한국 개신교의 ‘창조적 소수집단의 신앙 양심’을 단죄하고 추방하자, 그는 조선신학교 설립 정신과 복음주의적 신앙에 뿌리를 두는 기장을 형성하여 한국 장로교의 본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이어져 온 한국 기독교의 현실 참여와 그 성과는 가히 장공의 노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현실 변혁 신학 사상으로 민주화 운동 최일선에


장공 신학의 중심 주제는 ‘현실의 변혁’이다. <중략> 그는 음식에 들어간 소금처럼, 밀가루 반죽에 들어간 누룩처럼 자기 정체성을 잃지는 않으면서 현실에 들어가 현실을 그리스도 생명의 현실로 변혁해 가야 한다는 ‘생활 신앙적 신념’의 소유자였다 (출처: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이런 신학 사상을 바탕으로 장공은 ‘민주와 평화’, ‘인권과 생명’ 정신을 내세우며 1960-70년대에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며 민주화 투쟁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1965년 ‘한일 굴욕외교 반대 국민운동’을 주도했고, 1972년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위원장을 시작으로 ‘삼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위원 등을 맡았다.

캐나다로 이주한 후에도 ‘북미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위원장’ 등을 맡았는데, 특히 1980년 광주가 피로 물들기 직전인 5월 23일에는 70여 명과 함께 시위 금지 구역인 미국 국무부 정문 문턱을 넘어서며 “미국은 한국 백성을 학살하지 말라!”고 소리침으로써 전 세계 언론이 광주의 실상을 보도하는 데 기여했다(김영철 2008). 1983년 귀국 후 고 박종철 국민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기독교의 현실 참여를 앞장서서 이끌었다. 

 

‘사립문을 밀고 나와 후천개벽의 문을 여신 분’


늦봄은 조시에서 장공의 외모와 성정에 대해 흥미롭게 표현했다. 함경북도 경흥, ‘풀려난 죄수들, 면천한 천민들이 땅을 파는 변방의 변방’에서 태어난 ‘보잘것없는 몸매’에 ‘겨우 알아들을 소리로 웅얼거리는 못난이’였지만, 샌님이 되어 쓴 글은 ‘흙내음이 물씬 풍기고 천민들의 뚝심이 불끈불끈했고 고구려의 기개가 있어 죽은 역사를 일깨우고 있었다(문익환 1999). 

그의 좌우명처럼 겉으로는 침묵하듯 고요했지만 강인한 성정으로 꿋꿋하게 믿는 바를 실행해 나갔던 장공은 ‘사립문을 밀고 나와 후천개벽의 문을 여신 분’이었다.
 
김 목사님은 그야말로 후천개벽의 문을 여신 분 아니겠소. 자유를 향해서, 스스로 자기를 얽매는 신앙, 교리를 툭툭 끊어 버리고, 삼손처럼, 자유를 향해서. 그런데 그게 똥강아지도 코끝으로 스스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립문 같은 거였거든요. 온통 철판을 붙인 성문을 열고 백만 대군이 짓쳐 나가는 듯한 기세 같은 것이 아니고 (옥중편지 1986. 6. 21)
 

‘날개 풀린 수리처럼 높푸른 창공 유유히 날고…’


선친도 버리고 유교도 버리고, 이천 년 동안 쌓아 올린 기독교의 사슬까지 끊어버리고 부정한 현실과 맞섰던 장공은, 마구간을 벗어나 내놓은 말이 되어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정신 지주 삼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스승이었다고, 늦봄은 생각했다. 한껏 당신의 뜻을 펴고 유감없는 생을 사셨기에, ‘날개 풀린 수리처럼 높푸른 창공 유유히 날고 몸은 조국의 거름이 될 때’가 되었기에, 늦봄은 노환 중인 스승의 부음을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거리낌없이 편지와 조시에 적고 있다.

1975년 힘든 상황을 맞아 늦봄이 장공에게 빨리 귀국하시라고 요청했을 때 불호령 회답을 보내왔다고 한다. “너희 젊은것들은 뭐냐? 다 늙은 내가 나가야 한다면 싸움은 이미 진 싸움이 아니냐?” 늦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알겠습니다” 이 일은 늦봄이 장공이라는 디딤돌을 딛고 민주와 통일을 향한 험난한 길을 가기로 결심하게 만든 따끔한 회초리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큰 스승이시여>
스승이시여
우리의 큰 스승이시여
우리를 죽음을 사는 길로 몰아넣으시고
그 길을 앞장서 가신 지독한 스승이시여

(1987. 1 청주에서 불초생 익환은 엎드려)
 
◇김재준 목사가 직접 쓴 자신의 신조 (생명,평화,정의)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 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1987. 2. 7~10, 1986. 6. 21)
문익환 (1989). 「큰 스승이시여」 『한 하늘 두 하늘』. 창작과비평사 
문익환 (1999). 「큰 스승이시여」 『문익환 전집 2권』 시집2. 사계절출판사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http://www.changgong.or.kr/)
김형수 (2018). 『문익환 평전』. 파주: 다산책방
김영철 (2008). 『미국에서 펼친 한국 민주화 운동』. 서울:성광문화사

 
큰 스승이시여
-장공 김재준 목사님 영전에

문익환

(전략)

풀려난 죄수들 면천한 천민들이 땅을 파는 변방의 변방이었지만
당신은 거기선 드물게 선비의 끄트머리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덕에 샌님이 되셨지만
당신의 글에선 흙내음이 물씬 풍기고 있었습니다
억울한 죄수들의 울분이 아우성치고 있었습니다
천민들의 뚝심이 불끈불끈했습니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하며
손끝만 까닥거리며 백성의 고혈로 살아가는
서울의 벼슬아치들의 좀상스런 모습을 껄껄 웃어 주는
말갈기 휘날리며 대륙을 주름잡던
고구려의 기개가 있어 죽은 역사를 일깨우고 있었습니다
(중략)

그 울분으로 당신은
선친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자유가 좋아서 기독교인이 되셨지만
거기도 툭툭 끊어 버려야 할 사슬이 많았군요
되지 못한 우월감으로 콧대만 높은
서구인들의 전통과 풍습은 더 무거운 사슬이었습니다
공자 왈 맹자 왈에서 풀려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슬은
그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문자주의였습니다
유교의 사슬을 끊어 버린 당신의 울분은 다시
기독교의 사슬도 끊어 버리고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뼛속까지 길들여진 노예 근성을 못 털어 버리고
뒷걸음치는 우리를 이끌고 당신은 앞장을 서셨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자유의 황무지를 갈아엎는 보습이었습니다

그 뚝심으로 당신은
기라성 같은 예언자들과 지성들이 이천 년 걸려 쌓아 올린
교리의 금자탑들을 허무셨습니다
이 겁쟁이들 세상이 무서워서 숨어드는
도피성을 아무 미련 없이 무너뜨리시고
길바닥으로 내모셨습니다
(중략)

권모술수로 온몸이 절어 있다는
같이 앉아 차만 마셔도 부정 탄다고 기피당해 오던 정치인들과
민주수호국민협의횐가 뭔가를 만들고
의장이 되어 사회봉을 두드리시는 당신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지만
농담이라기에는 너무도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내놓은 말이었습니다
이단이요 분열분자로 파문을 받았습니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정신으로 손수 세우시고
온갖 정성 다 바쳐 키우시던 조선신학교는 풍전등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걸 두려워할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적 기독교라는 기치 아래 동지들이 혁신 교단이라는 걸 만들자
단신으로 이와 결별하고 나오신 ‘당신의’ 담력이
그 정도로 움츠러들 수야 없었지요
남이야 성서 파괴자라고 하든 말든
이단이니 뭐니 하며 칼을 빼들고 달려들든 말든
당신은 그냥 아무 일도 없는 듯
오던 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었습니다
(중략)

당신은 그 고요한 침묵과 웅얼거림으로
역사의 새 장을 여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역사의 실체가 되셨습니다
위선과 독선으로 독기를 뿜는
살인과 전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오만불손한 기독교의 역사를 당신은 툭 꺾어
민족사 속으로 겸손하게 끌어들이는 만용을 부리신 겁니다
드디어 두 역사는 소리치며 하나로 어울려 도도히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는 분단의 찌꺼기를 깡그리 쓸어내고 통일의 대해에 이른 것입니다
(중략)

아- 당신은
저 두꺼운 역사의 벽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어렵잖이 무너뜨리시고
백지장 뒤집듯 역사의 새 장을 여셨습니다
마치 똥강아지 코끝으로 사립문을 밀고 나서듯이
당신이 하신 일을 우리라고 왜 못 하겠습니까
갓 풀려난 죄수들의 울분이 가슴에 살아 있고
갓 면천한 천민들의 뚝심만 있다면
당신이 지난날 해낸 일
우리도 내일 또 모레 해보일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고마운 스승이시여
길이 우리와 함께 계시소서

(청주에서 불초생 익환은 엎드려)
 

월간 문익환_9월<학자 문익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