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10월 <봄길 박용길>

🈷️ 키워드로 본 봄길의 생애

늦봄, 편지, 봉사, 민주, 통일

일생을 관통한 다섯 가지 빛깔의 삶 

 

1. 늦봄

부모 반대에 “6개월만 살아도 함께 하겠다” 

 
◇젊은 날의 봄길과 늦봄(1940년대) 


봄길 박용길은 1938년 도쿄와 요코하마에 있는 한국학생들이 모이는 관동신학생회에서 ‘학생’ 문익환을 처음으로 만났다. 박용길이 졸업 후 전도사 생활을 하던 시나가와(品川) 교회에 문익환 학생이 목회 실습을 하러 다니면서 서로 가까워졌다. 이후 봄길은 서울로 돌아가 숭동교회에서 전도사로 일을 하고, 문익환은 폐결핵으로 학교를 휴학하고 금강산으로 가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건강에 대한 염려로 봄길의 부모님은 결혼을 반대하였으나 ‘6개월만 살아도 함께 하겠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행히 이후 건강검진에서 이상이 없었고 결혼에 이르러 일평생 뜻을 같이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1944년 6월 17일 안동교회에서 열린 문익환과 박용길의 결혼식
 

2. 편지

2,304통에 이르는 사랑꾼의 기록 

박용길과 문익환의 편지 역사는 옥중편지가 있기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0년대초, 일본 유학생활이 끝나고 만주로, 서울로 흩어지면서 편지가 오가며 장거리 연애가 시작되었다. 결혼 후에는 피난과 전쟁, 두번의 유학으로 떨어져 지내면서 다시 편지로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부부가 함께 지낼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그로 인해서 둘도 없는 50년지기 펜팔 친구와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기록을 얻게 되었다.

 
◇ 박용길이 문익환에게 쓴 연애편지(1941. 4. 26)


박용길 장로는 수감 중인 늦봄에게 매일같이 날짜와 번호를 매겨서 편지를 보냈다. 봄길이 감옥으로 보낸 편지는 무려 2,304통에 이른다. 이처럼 방대한 양의 글들은 현대사의 여러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록학적 의미도 가진다. 일련의 번호는 검열로 인해 누락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만이 알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예쁘고 아름다운 풍경 사진, 꽃잎, 낙엽, 악보, 목사님에게 온 편지 뒷면에 편지를 적어서 받은 내용을 전달하기도 하고 초청장에, 각종 소식지의 여백에 편지를 쓰기도 했다. 내용과 형식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감옥으로 보내는 편지에 온 정성을 들였다. 
 
◇1992년 박용길이 옥중의 문익환을 대신해 4월 혁명상을 받았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 


기록에 진심이었던 봄길은 늦봄이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자신을 부르는 다양한 호칭들을 횟수까지 표시해서 메모로 남겼다. 사랑꾼 늦봄의 면모 뿐만 아니라 봄길의 꼼꼼한 기록가의 모습 또한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기록물이다.
 
◇봄길은 늦봄의 옥중편지에서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분류해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우리 봄길님
“나의 봄길님” 이라고 쓰려니 당신은 나의 아내만이 아닌 우리 모두 모두에게 너무 소중한 생각이 들어,
가는 곳곳에서 모두에게 편안함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문익환 옥중편지 1991. 6. 28)

당신 없이 내가 설 수 없고, 나 없이 당신이 설 수 없는 것이 틀림 없소. 사실인가 하오. 그래도 나는 당신을 참으로 마음껏 기쁘게 못해주는 것 같아서 늘 마음에 걸리오. (…)주님 품안에서 고이 깊이 잠드소서. 당신의 짝 달님 드림
 (문익환이 전쟁 중에 미국에서 보낸 편지 1952. 7. 11)

당신께  제435신 1990.7.18(水)
아빠 안녕하세요? 짐정리를 하다가 50, 51년에 보내 주셨던 많은 편지들을 발견하였는데 글씨가 그렇게 똑똑하고 예쁠수없군요.
(박용길이 감옥으로 보낸 편지)
 

3. 봉사

평생토록 노력한 헌신의 삶 

 
◇박용길이 자신의 봉사활동 내역을 정리한 기록 


박용길은 일생을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어려운 시기에 일본에 유학 가서 공부할 수 있었던 만큼, 그 혜택을 주변의 이웃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곧 봉사를 통한 섬김의 삶으로 이어졌다. 봄길은 1919년 음력 9월 1일 황해도 수안에서 박두환, 현문경의 넷째딸로 태어났다. 부친 박두환은 ‘의신학원’을, 어머니 현문경은 ‘의신유치원’을 세워 계몽사업과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이 같은 봉사의 가풍은 그를 자연스럽게 섬김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다. 여신도회 연합회, 원광회(경기동창회 장학사업), 여순교자 기념 사업회 등을 통해 봉사를 생활화 했으며, 특히 원광회를 통해 전쟁중 구호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한신대 사택 거주 시에는 목사들 부인들을 대상으로 한신 부인회를 조직하였으며, 동서교류를 위한 동서 자매회를 결성해서 각종 활동을 이어나갔다. 코스모스회를 조직해서 생계가 어려운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편물을 가르쳐 주고 짠 걸 팔아서 임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경기동창회의 장학사업 원광회에서 상장을 수여하고 있는 박용길(1974. 11. 23) 
 

4. 민주

구속자 가족들과 독재에 맞서다

‘운동가’ 박용길은 늦봄이 처음 수감된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과 궤를 같이한다. 봄길은 3.1 민주구국선언을 계기로 양심수가족협의회를 결성하고 구속자 부인들과 함께 남편들의 수인번호를 가슴에 달고 시위에 나섰다.
당시 봄길을 포함한 구속자의 가족들은 경찰들에게 뺏기지 않을 시위 용품을 고민한 끝에 보라색 원피스를 맞춰 입었다. 보라색은 기독교에서 고난과 승리를 상징하는 색이기에. 가슴에는 남편의 수인 번호를 수놓았다. 이 옷을 입고 경복궁 옆 법원(현 시립미술관) 앞에서 공개 재판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박용길은 이후 문익환이 다시 감옥에 들어가자 변경된 수인 번호를 구슬로 수놓아 가슴에 달고 다녔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구속자가족협의회’에서 회장을 역임하며 구속자 석방 운동을 위한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1985년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 협의회’, 즉 민가협 설립의 모태가 되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3.1 민주구국선언(명동사건) 구속자 가족들. 뒷줄 왼쪽부터 이희호, 박영숙, 이종옥, 공덕귀, 함석헌, 이우정,
앞줄왼쪽부터 고귀손, 김석중, 박용길, 박순리
 

5. 통일

남편 뜻 이어받아 하나된 겨레를 위해 

 
◇문익환 목사 추모 공원에서 문익환 목사 걸개 그림을 배경으로 무대에 서 있는 박용길 장로와 가족들 


아무런 준비없이 맞은 해방에서 분단의 아픔을 겪었기에 봄길은 통일만큼은 반드시 준비하여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을 시작했으나 사무실 집들이 후 열흘 만에 남편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나면서 늦봄의 뜻을 이어받아 이사장직을 맡았다. 통일 교실, 통일 출판, 통일 여행, 통일 공연, 통일 자료실 등을 운영하면서 남북의 이질적인 면들을 하나하나 통일시키려 노력했다.
 
◇겨레 손잡기 대회에 참석하여 웃고 있는 박용길(2000. 5. 28)
  
◇박용길이 김일성 주석 1주기 조문 갔을 때 남북의 언어가 이질화 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틈틈이 기록한 12페이지 분량의 남북 언어 대조표. 


통일맞이 자주 평화 통일 민족회의(민화협) 통일연대 상임고문과 6.15 남북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 남측준비위원회 명예대표를 지냈다. 1995년 김일성 1주기, 2000년 로동당 창건 55주년 초청 인사로 북한을 방문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고 2005년 이 같은 남북 화해-협력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통일운동에 앞장선 공로로 통일부장관 이재정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는 봄길(2005)
   
◇ 박용길이 수훈한 국민훈장 모란장
 

<글: 오남경>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여행과 사색을 위한 숲길 산책을 무척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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