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11월<늦봄의 벗들>

[시 속의 인물] 9. 방제명 선생

[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의형제 같은’ 방제명 선생

 
“방제명이란 사람, 언제 보아도 배 맛처럼 시원하다고 생각지 않니?”
 
◇겨레말 갈래 큰사전 출판 당시 박용수선생 사무실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와 방제명 선생
 

HID 대장으로 백여 번이나 북파

여섯 번째로 수감 중이었던 1992년 10월 26일, 늦봄은 이날을 궁정동에서 총성이 울린 치욕스러운 날이 아니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린 영광스러운 날로 기억하고 싶다고 썼다. 동시에 또 한 사람의 사내를 떠올렸다.
 
오늘이 되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군요. 백두산 기슭에서 산삼 천 뿌리나 먹고 자랐다는 신의주 사내, 그 이름 방제명이지요. 미군 HID의 대장으로 38선 북쪽에 백여 번 넘어갔다 왔다는 사내요. (옥중편지 1992. 10. 26. *HID는 1950년대 북파 공작 담당 육군첩보부대)


늦봄은, 방제명이 안중근 의사가 좋아 아침마다 남산 안중근 의사 동상 앞에 가서 성호를 그으며 새날을 기다린다더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를 안중근과 함께 떠올린 이유다. 오래전에 그가 안동교도소 접견장에 나타났을 때, 늦봄은 저편에서 번득이는 그의 대머리를 쳐다보고 손뼉 치며 “저 대머리가 하느님의 모상이구나”라고 외쳤는데, 후천개벽 하는 접견장이었다고 썼다. 

이 편지보다 두 달 전인 8월 27일, 늦봄은 시 <방제명>을 썼는데, 이 시의 내용을 10월 26일 편지 속에서 거의 똑같이 반복하며 봄길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경주여행 당시 방제명, 문익환, 안순심(유원호 부인), 방제명 부인, 박용길 일행이 걸어가는 모습 
 

늦봄 별세한 날에도 마지막 점심 함께해

방제명 선생은 늦봄을 형님이라 불렀고, 그와 같은 신의주 태생으로 늦봄의 방북에 동행한 유원호 씨와 더불어 셋이 의형제처럼 지냈다고 한다. 세 사람은 자주 점심을 함께 먹었는데 94년 1월 18일 늦봄이 별세한 날에도 마지막 점심을 함께했다. 늦봄과 방 선생은 가족끼리도 매우 친했다. 늦봄이 여섯 번째 수감 중이었던 92년 새해에 방 선생 가족은 늦봄의 집으로 인사를 와서 떡국을 먹었다. 늦봄이 풀려난 직후인 93년 3월에는 늦봄 부부와 방 선생 부부가 같이 경주를 여행하는 시간도 가졌다. 반면 허물없는 사이로서 늦봄이 그를 크게 질책한 경우도 있었다.

 
왜 사람이 그래? 앞으로 나를 형으로 계속 모시려거든 술을 딱 끊고 밥을 먹으라고. 그런 건 기백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야 (중략) 형 때문에 자포자기할 필요는 없어. 나를 따르려거든 나처럼 제 몸을 철저하게 사랑하라구. 그러지 않으면, 내 동생 될 자격이 없으니까. (옥중편지 1991. 7. 22.)


늦봄이 방 선생을 언제부터 알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늦봄이 89년 방북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90년 10월 이후 처음 만나서, 재수감되는 91년 6월까지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방 선생도 89년 6월에 드러난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관련하여 불고지죄로 불구속기소 되어 1심에서 기소유예, 90년 8월 대법원에서 확정 선고를 받았는데, 그 이후 유원호 씨의 소개라든가 하는 어떤 계기가 있어 늦봄을 만나게 된 것으로 추측해 본다.

 

밀입북 연루 재판에서 자기 소신 주장

방 선생은 밀입국 사건 연루 재판 시 1심 기소유예 선고 후 제출한 항소이유서에서, 자신은 육군 첩보부대에서 북한에 갔다 온 장교로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으로 첩보부대 본부 보안과장도 했던 사람이라 밝히면서, 직업적으로 간첩을 알아볼 수 있는 근성으로 판단하건대, 앞뒤 정황이나 논리상 서경원 의원이 절대 간첩 행위를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법부를 향해서는 검찰이 차려주는 밥상을 물리칠 용기를 가지라고 외쳤다.

공안 통치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겁주는 통치 방법 아니냐며 울분을 토한 방제명. 늦봄이 그에게서 발견한 매력이 있었다.
 
방제명이란 사람, 언제 보아도 배 맛처럼 시원하다고 생각지 않니? 방제명이나 백기완 같은 사람을 내가 좋아하는 까닭을 알겠니? 그들에게 있는 남성적인 면일 거다. 나에게는 너무나 결여되어 있는 남성적인 면, 내가 그리도 갖추어 갖고 싶으면서도 없는 남성적인 면을 그들에게서 보거든. 그리고 그게 그렇게 좋고. (옥중편지 1992. 6. 8)
 

안중근 숭모, 순국 82주기 추모 미사 열어

그에 대해 이런 호감을 표현한 후 늦봄은 7월에 시 <방제명>을 썼고 10월 26일 편지에서 또 한 번 더 언급한 것이었다. 안중근을 숭모했던 방제명 선생은 ‘안중근 의사 순국 82주기 추모 미사’를 열기도 했다. 늦봄은 이를 칭찬했다.
 
안중근 의사 눈을 감으신 날, 방제명의 열성으로 미사가 드려지게 되었으니 어찌 기쁜 일이 아니리오! 많이들 모였겠지요. 그 어른도 오늘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시겠지요. 당신 기념 미사를 드린다고 해서라기보다는 이번 선거 결과 민주주의가 되살아나고 민족자주가 신장되는 것이 기쁘시겠지요. (옥중편지 1992. 3. 26)
 

일본 신사 파괴 활동 인정 못 받은 채 작고

그는 89년 1심 재판에서 실질적으로 무죄 선고와 다름없는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도 통일과 민주화에 반하는 정권에 저항하며 항소를 마다치 않는 기개를 보였다. 신의주 일본 신사 파괴 활동과 몇 달 동안의 감옥생활, 해방 후 월남, 입대와 HID 복무, 5.16쿠데타 당시 친형의 문제로 인한 강제 전역, 밀입북 사건 관련 재판 등, 항소이유서에 나타난 그의 굴곡진 인생을 통해 지난 시대의 험난했던 파도를 되돌아볼 수 있다. 그는 신의주에서의 활동을 근거로 독립유공자로 지정받으려 무척 애를 썼으나, 목격자 증언 이외의 물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한 채 2002년 작고했다.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김형수 (2018). 『문익환 평전』. 파주: 다산책방
문익환 (1999). 『문익환 전집 2권』시집2. 사계절출판사
오픈아카이브. 「방제명 항소이유서」 외 

 
방제명

문익환

백두산 기슭에서 산삼 천 뿌리나 먹고 자란 신의주 사나이가 있다. 이름은 방제명
국군 HID의 대장으로 38선 북쪽에 백여 차례나 갔다 왔단다
“대장님……” 서둘러 배를 타고 쫓겨오면서 뒤에 남기고 온 찢어지는 소리 들려 와 한 달씩 위스키만으로 살아가도 끄떡없던 몸이란다
강원도 어느 절간의 어느 스님의 염불 소리로 가슴의 불을 끄다가
가슴의 불이나 끈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 들어 천주교로 개종했단다
“좋아 그 결심 좋았어”
선선히 풀어놓아 주던 스님의 마음이 요새도 하늘처럼 높아 보인단다
“내가 언제 교회를 믿었나 하느님을 믿었지”
이 말을 남기며 평양 사제관을 나섰다는 안중근이 좋아
아침마다 남산 안중근 동상 앞에 가서 성호를 그으며 죽을 날을 기다린단다
그 방제명이 안동교도소 접견실에 나타났다
손이 닿지 않는 저편에서 번득이는 그 대머리를 쳐다보다가
“저 대머리가 하느님의 모상이구나” 나는 감탄한다
“형님, 모상만 가지고는 안 되지 않아요?”
“그 말을 할 수 있는 모상이면 되는 거야”
후천개벽하는 접견장이었다

1992. 8. 27
 

월간 문익환_11월<늦봄의 벗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