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2월 <인간적인 문익환>

[시 속의 인물] 12. 윤동주

[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스물아홉 젊은 동주는 제 속에 살아있습니다” 

동주와 함께
동주의 몸이 되어
동주의 마음으로…

 
◇숭실중학교 재학시절의 문익환과 윤동 

  
 동주가 없는 문익환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스물아홉 살 젊음으로 동주는 지금도 제 옆에, 아니 제 속에 살아 있습니다.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혼연일체가 된 그의 시 정신이 그가 자리를 비운 이 역사를 살아가도록 늘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빌면서 지난 46년을 살아온 셈입니다. 동주와 함께 동주의 몸이 되어, 동주의 마음으로. (옥중편지 1990. 6. 1)
 
 

소학교 6년-3개 중학교 함께 다녀

 1945년 2월 16일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두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진 윤동주. 그는 전태일, 장준하와 함께 늦봄의 인생행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자신의 생일날 늦봄은 지난 생애를 되돌아보는 옥중편지에서 동주와 자신과의 관계를 위와 같이 집약적으로 표현했다.
 동주의 몸과 마음이 된 늦봄. 그렇게 말해도 될 정도로 늦봄은 동주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소학교 6년을 함께 다녔고 세 개의 중학교를 함께한 친구 같은 형이 동주였던 것이다. 두 사람이 각각 연희전문학교 진학과 일본 유학으로 갈라진 후에도 방학이 되면 으레 서로 만나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속을 털어 이야기를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동주 형의 추억」 『문익환 전집 6권』 수필)

 

‘동주가 없었기에 내가 시인이 되었다’

 늦봄은 윤동주가 살아있었다면 자신은 시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동주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시인이 되었다는 말을 편지와 수필에서 자주 되뇌었다. 내용의 40%가 시 형식으로 이루어진 구약성서의 번역을 시작할 때(1968년) ‘동주가 있었더라면’ 하고 아쉬워했고, 구약의 시를 시답게 번역하기 위해 결국 자신이 시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고 시인이 되었다고 했다.
 동주 형을 잘 알기에, 또 동주를 대신하여 시를 배우고 시인이 된 만큼, 늦봄은 동주의 시를 자신만의 독자적인 통찰로 분석하고 설명해 냈다. 늦봄의 수필집에서 제목과 내용상으로 동주의 시가 중심이 된 글은 모두 여섯 편이다(전집 6권 수록 기준). 1968년 발행된 윤동주 시집에 처음 글을 썼고, 1972년 연말에 1편, 1973년 2편, 1차 수감 직후 1976년 4월 게재된 글, 1988년 신문 기고문 등이다.
 
 
◇연세대 윤동주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문익환의 ‘동주형의 추억’ 친필 원고. 
 
 

‘동주는 시간과 역사를 의식하며 시를 써’

 동주의 시에 대한 늦봄의 견해를 한두 가지 살펴보면, 우선 그의 시를 이해하고자 할 때 시 자체만을 읽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동주가 자란 곳, 배운 것, 부닥쳐 살았던 역사를 너무 잘 알고 있었던 늦봄으로서는 이 모든 요소를 토대로 그의 시를 이해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시를 바라보는 기준점이 달랐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보는 동주의 안목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시 세계를 가늠해 보기로 하자. 동주는 자연을 바라보며 시를 쓰지 않았다. 그의 시는 대부분 시간과 역사를 의식하면서 쓴 시들이다. 특히 1941년~1942년대 그의 성숙기에 쓴 시들이 그렇다. (「교차하는 한 처음과 한 끝」 『문익환 전집 6권』 수필)

 늦봄은 동주의 마음도 읽었다. 두 사람은 안중근이 권총 사격 연습을 한 독립운동의 산실에서 자랐다. 학교 운동장에서 태극기를 펄럭이며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소리 높이 부르며, 모든 작문의 마무리는 민족 독립으로 귀결되도록 써야 한다는 의식을 자연스럽게 배워왔다. 기독교를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했고, 독립을 열망하는 강한 의지를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키워왔다. 늦봄은 동주가 쓴 시 ‘초 한 대’에 그 절절한 마음이 나타나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 군국주의가 욱일승천하던 1934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중학교 2학년이 이렇게나 역사를 달관했다’며 놀라워한 시가 바로 ‘초 한 대’이다
 
 윤동주 시에 일관한 것은 빛의 승리였다. 어둠이 집채 같아도 팔랑이는 작은 촛불에 밀려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믿는 마음이었다. 매를 본 꿩처럼 도망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믿었다. 일본 군국주의의 마수가 아무리 드세어도 이 새벽에 탄생할 그리스도 예수의 작은 촛불 앞에서는… (「초 한 대」 『문익환 전집 6권』 수필)

 늦봄이 쓴 시 중에서 동주라는 이름을 한 번이라도 언급한 시는 7편이다. 이 중 「마지막 시」는 1977년 죽음을 각오하고 결행했던 21일간의 옥중 단식 시작 직전에 유서처럼 남긴 작품이다. ‘죽어서 산다’는 스승 김재준 목사의 말을 생각하며 ‘동주와 같이 별을 노래하면서’ 죽음을 살겠다는 늦봄의 결기가 비장하다.

 

‘동주의 마음은 민주 열사들의 마음’

 「동주야」에서는 동주가 늦봄 자신처럼 늙어가지 않고 29살의 영원한 젊음으로 멈춰 버린 것을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긴다. 민주화를 외치며 몸을 불사른 많은 젊은이가 동주의 「서시」와 그의 죽음을 떠올리며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것을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붓을 꺾는 시대에 숱스런 우리말로 시를 쓰고, 그 시로 민족에게 밝아 오는 앞날을 보여 주어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는 일, 그 일밖에 그 시대의 어둠과 싸우는 적극적인 길이 또 어디에 있었을까?’ (「교차하는 한 처음과 한 끝」 『문익환 전집 6권』 수필)
 
 늦봄의 수필에 나오는 이 부분을 동주의 마음 대신 민주화 열사들의 마음으로 대입해 생각해도 전혀 낯설지 않다.

 동주는 후쿠오카 감옥에서 마음속에서 수많은 시를 써내었을 것이다. 비록 원고지로 옮겨 겨레에게 보여주지 못했지만. 늦봄은 빛을 보지 못한 그의 외마디가 지금의 젊은 시인들의 작품활동에서 나타나 보인다는 반가운 사실을 동주에게 전하고자 했다. 젊은 시인들이란, ‘송곳 끝으로 푹푹 쑤시는 아픔 같은 걸’(옥중편지 1992. 4. 16) 느끼게 한다고 늦봄이 평한 김남주 같은 시인들 아닐까. 그들의 시가 너무 뛰어나서 동주의 시가 습작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다 해도 괜찮다고, 동주의 젊음이 우리 핏줄 속에 살아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 늦봄은 생각했다.
 
 
◇1945년 고향에서 치러진 윤동주 장례식. 문익환의 부친인 문재린 목사(영정사진 왼쪽 첫 번째)가 주관했다. 
 
 

동주는 망국의 슬픔, 늦봄은 분단의 슬픔

 동주의 시 세계에서 넘쳐나는 것이 슬픔이라는 것, 그러나 그 슬픔은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겨레의 슬픔이었음을 깨달았다던 늦봄은, 20대 초반 동주의 마음에 짙게 배었던 망국의 슬픔이 40년 지난 후 자기 가슴 속에서 조국 분단의 슬픔으로 번져 나왔음을 절감했다. (「동주의 가을, 동주의 슬픔」 『문익환 전집 6권』 수필) 동주가 슬픔 속에서 강인한 의지로 시를 쓰며 빛의 승리를 믿었듯이 늦봄도 동주의 그 마음을 새기며 통일의 길을 걸어갔다.
 
 해환(동주)이 한범(송몽규)이 앞에서 열등감을 느꼈고, 나는 그들 앞에서 열등감을 느끼면서 자랐는데, 그들은 가고 제일 못난 제가 남아서 그들이 꿈꾸던 민족해방을 위해서 살려니 숨이 찹니다. (어머니에게 쓴 옥중편지 1986. 12. 9)
 
어머님 … 동주와 같이 땅에 묻힌 아름다운 말들을 하나하나 그의 언덕에서 파내어 어설프게나마 불러보고 싶은 마음이 때때로 눈물로 허물어질 때면 정말 죽고 싶도록 슬퍼지지만, … 동주의 무덤을 보러 가기 위해서라도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옥중 편지 1979. 10. 31)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문익환(1999). 『문익환 전집 6권』 수필. 사계절출판사
 
 
◇ 윤동주 시 관련 늦봄 수필
글 제목 게재한 곳 게재 날짜
동주 형의 추억 윤동주 시집 1968
교차하는 한 처음과 한 끝
- 윤동주의 시 세계
크리스찬문학
제5집
1973
내가 아는 시인 윤동주 형 문학사상 1973년 3월호
초 한 대
(1972년 12월 성탄 전날 한빛교회 설교)
제3일 1973년 12월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월간중앙 1976년 4월호
동주의 가을, 동주의 슬픔 한겨레신문 1988. 9. 22.
 
  
동주야

문익환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 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 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쿠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 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그 앞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습작기 작품이 된단들
그게 어떻단 말이냐
넌 영원한 젊음으로 우리의 핏줄 속에 살아 있으면 되는 거니까
예수보다도 더 젊은 영원으로

동주야
난 결코 널 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니

(1988년 하반기 작품 추정. 박래전 열사 88년 6월 분신 후 쓴 시)
 
 
마지막 시

문익환

나는 죽는다
나는 이 겨레의 허기진 역사에 묻혀야 한다
두 동강 난 이 땅에 묻히기 전에
나의 스승은 죽어서 산다고 그러셨지
아 ―
그 말만 생각하자
그 말만 믿자 그리고
동주와 같이 별을 노래하면서
이 밤에도
죽음을 살자

(1977년 1차 수감 중 죽음을 각오하고 21일간의 단식을 결행하기 직전에 쓴 시)

월간 문익환_2월 <인간적인 문익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