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여 통의 편지를 통해 애틋한 사랑을 기록으로 남긴 문익환-박용길 부부
“나의 마음문 열쇠를 드립니다. 자유로이 열고 들어오세요”
◇ 문익환 목사 그림 옆에서 미소를 띠고 있는 박용길 장로
문익환 목사가 감옥에서 부인 박용길 장로와 주고받은 3,000여 점의 서신. 최근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된 이 편지들은 독립운동-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의 대표적 기록이지만, 역사의 한복판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격랑을 헤쳐간 아름다운 사랑의 기록이기도 하다.
국가지정기록물은 아니지만 이전의 편지들도 흥미롭다. 결혼 전 시나가와(品川) 교회에서 전도사와 봉사자로 함께 하다가 1940년부터 서울로 만주 용정으로 각각 떨어져 지내던 연애시절, 결혼 후 미국 유학 시절(프린스턴 신학교, 유니온 신학교), 그리고 전쟁 중 도쿄에 있을 때의 편지들을 보면 ‘사랑꾼’ 늦봄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다. “붓을 달린다” 는 표현으로 나타난 늦봄의 서신에는 부인에 대한 지극한 마음이 요소요소 ‘달달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편지를 통해 나타난 그의 애틋한 사랑꾼의 모습을 찾아보기로 한다.
◇동경 일본신학교 시절 문익환과 요코하마 공립여자신학교 시절 박용길
“잊으라 하시니 잊는 척 해보리이다”
▲우여곡절 많았던 연애시절
1938년 요코하마 한인교회에서 열린 관동조선신학생회 모임에서 갓 스무 살인 문익환 앞에 나타난 열아홉 처녀 박용길은 꿈에서 본 연분홍 코스모스의 청초함 바로 그것이었다. 그 청초함 속에 담긴 따뜻한 마음씨는 세월이 흘러도 다함이 없었다.
둘 사이의 사랑은 깊어갔지만 1944년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폐병으로 문익환이 휴양 중인 사실을 알고 박용길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쓰린 심정은 절절하게 당시 편지에 녹아 있다. 애끓는 마음들을 모아 ‘붓을 달린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잊어버리라 하시니 잊어 버리는 척 해보리이다. … 괴롭다는 말보다는 쓰라리다는 말이 더 적합할 듯 합니다. … 마지막으로 이것만은 약속합니다. 자비의 사랑이 거지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런 사랑을 베푸시려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다만 응하리이다. 상처가 때로는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낫는 것처럼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응하리이다.(1941.11.13)
박선생―.
이렇게 늘 편지하는 것이 좋지 않으시다면 끊겠읍니다. 혹시 양친님께 걱정을 끼치섰으면 안심하도록 여쭈어 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마음문 열쇠는 드립니다. 자유로이 열고 드러오고 싶은 때에 드러오십시요. (1942.03.09) 조선 평북 대유동에 있는 박용길에게 용정가중앙교회에서 문익환 보냄
용서하십시요, 이렇게 길게 쓰는것을. 그러나 박선생이 주위의 강압때문에 정신을 채리지 못하는 것만 같아서 깨우쳐 드리려는 심산임을 알으소서. 지금까지 잘 싸우셨으나, 이제 주저앉으면 참말 공든 탑이 무너지겠읍니다. … 모-든싸움을 박선생에게만 마껴 버리지 않으면 않될 것을 생각하면 미안하기 그지없으나 어떻게 하겠읍니까. 다시 일어나서 싸워 주십시요.
파도 하나 일지않는 항구와 같은 선생의 가정에 비하여 여기는 산뎀이 같은 파도가 몰아치는 망망한 대해와 같을 겝니다. 저는 아직까지 이 수고와 고통을 신앙으로 같이 떠메줄 수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읍니다. 그리고 박선생만은 신앙으로 같이 질 수 있을 줄 믿고 그 속에서 참 위안과 기쁨을 발견하실 줄 믿었든 것 뿐입니다. (1941년 말경)
금강산에서 휴양을 잘 마친 문익환은 마침내 x-ray 검사에서 폐병 완치 판정을 받고 박용길과 백년가약을 맺을 수 있었다. 1944년 6월 17일의 일이다.
제가 불건강하다는 것이 좀 문제가 되어서 피차 괴로움을 받았나 합니다. 그러나 인젠 걱정할 것 없는 건강이 증명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읍니까. (1942. 5. 6)
◇안동교회에서 결혼하는 문익환, 한복에 면사포를 쓴 박용길
“밤마다 꿈에서 당신을 만나오이다”
▲프린스턴 유학시절
(박선생에서) 사랑하는 아내 용길,
참으로 보고 싶고 그립구려. 배에서는 잠만 들면 당신 꿈을 꾸었고 여기와서 안정되니 거의 걸르지 않고 밤이면 당신을 만나 오이다. 얼마나 수고하오. 무거운 몸 가지고 무거운 살림살이 몹시 고될 줄 아오. 미안한 생각 금할 길이 없소마는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참아주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외다.(1949.09.26)
◇1950년대 초 정전회담 통역관 시절 창경궁에서 문익환과 박용길
"나의 코스모스에게… 당신의 달님이"
▲부인을 부르는 다양한 호칭들
문익환은 편지에서 부인 박용길을 다양한 호칭으로 불렀다. 박용길은 이런 호칭들을 따로 정리하기까지 했다.
◇늦봄이 편지에 쓴 호칭을 봄길이 하나하나 정리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 나의 코스모스에게 (1966.4.28)
-봄길 가을 코스모스에게 > 당신의 늦봄
-바우 할미에게(1979.3.27)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봄길인 당신에게 > 당신의 늦봄(1979.8.2)
-봄길 당신에게 > 당신의 늦봄(1979.9.1)
-당신 나의 봄길에게 > 당신의 사랑 늦봄 씀(1979.9.11)
-바우 할머니에게 > 당신의 사랑 (1979.10.31)
-당신에게 > 당신의 달님(1981.2.13)
-바우 할멈에게> 당신의 짝(1981.3.8)
-봄길에게 > 당신의 마음 늦봄 씀(1981.4)
-당신에게 > 당신의 사랑 늦봄, 다시 당신에게> 사랑(1981.5.6)
-37년을 하루같이 살아온 당신에게 > 사랑(1981.6.11) : 결혼 37주년을 맞이하는 달
-당신에게 > 사랑(1981.7.24)(1981.8.5)
-당신께 > 당신의 한 바다(1991.9.9)
-바우 보라 할머니, 나의 사랑 코스모스에게 > 당신의 사랑 늦봄 (1981.10.9)
-할머니 보라꽃에게, 또다시 할머니 보라꽃에게 >
-온 벌판 젖빛 올라 파란 봄길, 맨발로 봄 기운을 밞으며 걷고 싶은 나의 봄길에게 > 한정 없이 늦은 늦봄(1982.12.4)
▲“우리사이 호칭에서 남녀차별 찌꺼기가…”
당신의 편지에는 언제나 ‘당신께’인데 나는 늘 ‘당신에게’라고 써왔다는 걸 어제야 발견하고 나도 ‘당신께’라고 쓰기로 했소. 남녀 차별을 철저히 배격하느라고 하는데도 우리 사이에도 어느새 그 찌꺼기가 남아 있었군요. 나의 ‘했소’ 투와 당신의 ‘했어요’ 투야 하나는 남자의 말투요, 하나는 여자의 말투니까 남녀 차별은 아니겠지요. (1986.8.29)
“지구상에 우리만큼 축복 누리는 내외가 있을까?”
▲옥중에서 챙긴 기념일과 생일
너무 섭섭해 마시오. 오늘이 당신의 예순일곱번째 생일이라는 걸 당신이 챙겨 주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날 뻔했으니. 오늘도 접견장에서 아무리 뜯어 봐도 당신을 예순여덟 살 난 할망구라고 볼 사람은 없을 거라. (1989.10.20)
◇어느 음식점에서 부인 박용길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문익환
일흔 돌을 맞는 당신께
정말 감개무량하군요. 쉰까지만 살았으면 하던 문익환이가 21년 덤으로 쉰 살을 넘겼고, 여섯 달 살고 홀로 살 각오로 시집온 박용길이가 45년을 살고도 인생은 70부터라고 생각하며 돌상을 받게 되었으니. 지구상에 우리만큼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내외가 또 있을까 싶군요. … 인생은 70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생일 축하를 받으시기 바라오. 나도 지금 그 심정이니까. (1989.10.20)
일흔두 해를 살아오는 동안에 마흔여섯 해는 나와 함께 살아온 세월 나는 그 세월이 한없이 행복하고 복된 세월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그 행복과 축복의 대부분은 당신의 마음씨에서 오는 것이었다는 것은 나의 느낌만이 아니죠. 객관적으로 남들이 모두 그런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닐까요. …
아무튼 72년을 회고하면서 인생은 살만하다고 느끼지요. 지난 10여 년은 옥바라지의 연속이기는 했어도 석방될 날을 기다리면서 서로 그리워한다는 것도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일들이었지요. 지금도 그런 생의 연장이지만 아무튼 72회 생일 크게 크게 축하. 그 축하라는 게 모두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말이 되겠군요. 당신의 사랑 늦봄(1991.8.27)
당신께
어제 오랜만에 언니의 사랑을 받으며 생일을 맞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구려. 요새는 잔치를 차린대도 며느리 셋, 딸, 또 동서도 힘을 모아서 요리를 분담해서 준비해오니까 즐겁기도 하고 쉽기도 하고 얼마나 좋은지 어제 명열이도 왔겠군요. 앉아서 계산해 보니까 76년 이후로 이번까지 열 한 번 나 없는 외롭고 서러운 생일을 맞이했군요. 어제도 오늘도 당신 생각을 많이 하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오직 고마울 뿐이군요. 나만큼 행운의 제비를 뽑을 사람이 이 땅에 몇이나 있을까요. (1991.9.1)
“당신은 눈웃음에 난 마냥 기쁘기만 했다오”
▲‘달달한’ 사랑의 멘트들
나의 봄길님,오늘 아침 잠언 12장을 읽다가 주책없는 아내는 등뼈 갉아 먹는 벌레와 같지만 어진 아내는 남편의 면류관(4절)이라는 구절에 딱 부딪혀 정말 정신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오. 어머님도 아버님의 면류관이셨지만 당신도 어머님 못지않게 나의 면류관이거든요. 당신의 사랑(1990.9.7)
그러고 보면 우리도 한 가정을 이루어 1년이 모자라는 50년을 살았는데 우리도 꽤 커졌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당신을 만나 엄청나게 커졌다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49년이면 15897일인데 그 많은 나날 늘 새로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준 당신의 하냥 젊은 마음이 나를 늙지 않고 계속 자라게 해주었죠. 그러니 나같이 복받은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당신의 사랑 늦봄 (1993.2.10)
49년을 살면서 엄청나게 커졌다는 이야기를 쓰면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빠뜨렸군요. 그게 뭐냐. 옳은 일을 위해서 괴로움을 겪는 것을 기쁨으로 이겨내 주고 있다는 점이지요. 여기 있으면서도 가족 때문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구요. 걱정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당신이 나 이상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살아주고 있다는 것, 내 몫까지 빛나게 살아주고 있다는 게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당신의 이런 격려가 나를 키워주었죠. 또다시 감사하면서. 당신의 사랑 늦봄( 1993.2.11)
봄길님께, 일 년 사시장철 나는 늦봄이고 당신은 봄길이니 언제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죠. 내가 이 나이에 10대 소년 소녀의 사랑 노래를 쓴다는 거 우리의 봄은 가시지 않을런가 보지요. 오늘 접견장 건너 쪽에서 나에게 계속 날려 주던 당신의 봄 눈웃음에 나는 마냥 기쁘기만 했다오. 당신의 늦봄 (1991.8.14)
◇같은 곳을 바라보는 한마음의 부부, 박용길-문익환
“당신 없이 내가 없고 나 없이 당신이 없으니…”
▲이심전심 사랑 고백
나의 사랑하는 짝 용길에게,
당신 없이 내가 설 수 없고, 나 없이 당신이 설 수 없는 것이 틀림없소. 사실인가 하오. 그래도 나는 당신을 참으로 마음껏 기쁘게 못해 주는 것 같아서 늘 마음에 걸리오. (1952.7.11)
당신께,
이 옆에 사람 인 자가 당신과 나라는 느낌이 있어서 보내 드립니다. 영롱한 구슬이라 생각하고 아름다웠는데 자세히 보니 약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조금 김이 샜지만 그래도 예쁘면 예쁜거죠. (1991.10.18)
◇봄길이 늦봄에게 보낸 ‘사람 인’자가 그려진 편지
<글: 오남경>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여행과 사색을 위한 숲길 산책을 무척 좋아합니다.
월간 문익환_2월 <인간적인 문익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