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

민향숙, 이철 (2023년 5월호)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향숙의 피눈물 기다림은, 살아 숨쉬는 기다림”
결혼식 3개월 앞두고 조작된 간첩사건…13년 만의 결혼식

 
◇1988년 10월 18일 결혼식을 올린 이철과 민향숙이 문익환 목사와 함께 꽃으로 장식된 차를 타고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박용수(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제공)
 
 
1988년 10월 28일 오후, 명동성당에서 뜻깊은 결혼식이 열렸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가 주관한 결혼식은 김수환 추기경이 집례한 본당 혼배미사에 이어 성모마당 썽풀이로 이루어졌다. 썽풀이는 박용길 민가협 대표의 인사, 민주인사들과 축하객의 축가 및 축시에 이어 축하공연이 펼쳐진 한바탕의 잔치요 축제였다. 마지막으로 문익환 목사와 신랑 신부가 함께 카퍼레이드하는 가운데 하객들은 양심수 석방과 민주화 촉구를 외치며 명동 일대를 행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결혼 3개월 앞두고 조작된 간첩 사건으로 옥살이

이날 결혼식의 두 주인공은 재일동포 이철 씨와 그의 한국인 약혼녀 민향숙 씨였다. 1976년 3월 예정된 결혼식을 3개월 앞둔 1975년 12월, 이철은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재일동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1월 22일 발표된 이 사건은 1970년대에 조작된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의 대표적인 사례였는데 구속된 21명 중 12명이 재일동포였다. 12월에 이철을 포함한 6명이 추가로 체포되었고, 40일간의 무자비한 고문 끝에 간첩의 누명을 쓴 그는 1976년 사형이 확정되어, 13년을 복역한 후 1988년 10월 3일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민향숙도 이철에 이어 1976년 1월 연행되었고 간첩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부당한 이유로 3년 6개월의 옥살이를 겪은 후 만기 출소하였다. 
 
 

늦봄, 향숙 이야기 들으며 “정말 정말 가슴 아파”

이철의 석방 직후 이루어진 두 사람의 결혼은 13년의 고통, 13년의 기다림 끝에 이룬 사랑의 승리였다. 13년의 기다림! 결혼식이 열리기 2년 전(1986년), 늦봄은 아내에게, ‘접견장에서 이철, 향숙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정말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옥중편지 1986. 8. 4)
 
요 며칠 향숙의 기다림이 가슴이 메이게 느껴져서 기다림이 무엇이냐는 것을 생각해 오던 참이었는데 … 지구가 해를 열두 바퀴 도는 만큼 깊고 깊고 또 깊은 어두움, 향숙의 가슴에 앙금으로 앉은 그 어두움 - 그게 기다림 아니겠소? 그 깜깜한 어두움을 할퀸 수도 없는 손톱자국들, 거기서 스며 나오는 붉은 피가 기다림인 거죠. 앞으로 땅이 해를 여덟 번 더 돌더라도 그 어두움에 묻혀 버릴 수 없는 빛나는 눈빛이 기다림의 뜻인 거군요. (옥중편지 1986. 8. 4)
 
그러면서 늦봄은, 기다림은 지쳐버리지 않는 일이며 치열한 싸움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향숙의 기다림을 격려하고 응원했다. 또한 승리를 확신했다. 
 
우리 모두의 기다림을 한꺼번에 이루어 줄 기다림, 큰 기다림을 우리는 지금 모두 끙끙 앓고 있는 것 아니겠소? 기다림, 그거 지쳐 버리지 않는 일이지요. 기다림에 져버리지 않아야죠. 향숙에게, 그리고 그날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격려를!! (옥중편지 1986. 8. 4)
 
이렇게 기다림이란 치열한 싸움이군요. 미움을 굴복시켜 정복하는 사람의 치열한 싸움이군요. 그 싸움은 저 어두움과 싸우는 일이기 전에 악으로, 아니 미움으로 변질하려는, 약해지는 자기의 마음과 싸우는 일이군요. (중략) 기다림에 지쳐 쓰러지지도 않고 기다림에 절망해서 어두움에 항복하지도 않은 영혼, 향숙의 영혼의 승리를 노래할 날이 오고야 말 테지요. (옥중편지 1986. 8. 5)
 
 

“향숙의 피눈물 기다림은, 살아 숨쉬는 기다림”

시 「억장 무너지는 기다림」은 위 옥중편지와 비슷한 시기에 쓰였다. 시 속에서 늦봄은, 면회할 일이 미뤄져 사흘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기다림’이라고 말하는 건 죄받을 일이라고 자신을 꾸짖었다. 심지어 어머니(김신묵 여사)를 향해 자신이 출옥하기를 기다리는 건 어머니답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적었다. 향숙이의 피눈물 나는 기다림에 비하면.
 
‘십 년이나/하루 세 끼니 먹을 때마다/밤마다 혼자서 자리에 들 때마다/피눈물로 범벅이 되는/이제는 마흔을 바라보는 노처녀의 기다림도 있는데’
(시 「억장 무너지는 기다림」)


늦봄은 향숙이의 기다림을 통해 절망이 아닌 희망과 의지를 말하고자 했다. 원산과 함흥 뒷산에 묻힌 어머니들이 있었다. 아들들은 잠시 피난 가는 거라며 열흘이면 돌아올 것이라 말했다. 하나 30년 4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했고 어머니들의 기다림은 무덤이 되어버린 채 흔적조차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향숙이의 기다림은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기다림’이었다. 늦봄의 표현처럼 ‘꺾어진 삭정들에 다시 잎 피우고 꽃 피울, 민족사의 소중한 한 마디’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시 「억장 무너지는 기다림」)
 
늦봄이 시를 쓴 지 2년 후 이철은 석방되었다. 향숙의 기다림이 잎을 피웠고 꽃을 피운 것이었다. 두 사람이 아기를 얻게 되자 늦봄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철, 민향숙이 새애기를 받아 얼마나 행복할까? 향숙의 기다림은 새잎이 돋아날 마른 가지의 기다림, 역사의 산 토막이라는 게 무엇이냐는 걸 실감하게 해주는군요. (옥중편지 1989. 7. 5)
 
 

“우리 기다림은 즐겁기조차 하다”

1992년 7월, 늦봄 자신의 총 수감 기간이 햇수로 13년에 이르는 시점이었다. 향숙의 피맺힌 기다림을 되새기면서, 그것과 비교하면 자신의 기다림은 즐겁기조차 하다는 말로 ‘의지와 위안’의 마음을 아내 박용길과 함께 나누고자 했다.
 
오늘 당신에게서 들은 이야기 중에 정말 가슴 찢어지게 아픈 이야기는 철의 딸이 한순간도 아버지가 보이지 않으면 몸부림친다는 이야기였소. 향숙이 13년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던 그 찢어지는 아픔이 유전인자로 딸에게 가서 그렇게 나타나거든요. 이번에야 나오지 싶어 기다리다가 나오지 않자, 목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지요. 당신도 10여 년을 옥바라지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기다림은 향숙의 기다림과 비교하면 즐겁기조차 한 거 아니에요?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도 처절한 것이 될 수도 있군요. (중략) 오늘따라 혼자 나가는 당신의 모습, 전에 없이 계속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면서 나가는 당신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더군요. 그러나 철이와 향숙의 기다림 생각하면, 이거야 약과죠. 나야 이 안에서 얼마나 보람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당신도 민족사의 전진에 큰 몫을 하고 있고요. (옥중편지 1992. 7. 8)

향숙의 기다림은 승리했다. 늦봄이 생각했던 이인모 노인과 그 부인의 기다림도(옥중편지 1992. 12. 5) 결국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끙끙 앓고 있다고 늦봄이 말한 ‘큰 기다림’은 아직 요원할 뿐이다. 기다림은 지쳐버리지 않는 것이며 치열한 싸움이라는 늦봄의 말을 되새겨본다.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문익환 옥중편지
이철 재심 재판 진술서. 천주교인권위원회(http://www.cathrights.or.kr/news/articleView.html?idxno=5339)

 
◇ 문익환 목사가 민향숙의 어머니 조만조여사의 손을 잡고 춤추고 있다. ⓒ박용수(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제공)
 
 
이철은 일본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안중근 의사 이야기와 함께 한국인임을 잊지 말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일본에서의 차별을 경험한 그는 대학에서 일본 이름을 이철로 변경했고 졸업 후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어 1971년 한국을 방문한 후 1973년 고려대 대학원에 유학했다. 숙명여대에 다니던 민향숙과 교제하여 1976년 3월 결혼을 앞두고 1975년 12월 구속되었다. 고문의 고통에 혀를 끊는 자살을 시도했고, 허위자백으로 약혼자를 지켜주려 했지만, 약혼자도 간첩방조 혐의로 구속되었다. 충격을 받은 그의 아버지는 그가 수감되던 날에, 어머니도 1979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직후에 세상을 떠났다.

1988년 10월 석방되어 두 사람은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후 일본에 인사차 다니러 간 두 사람에게 한국 재입국이 거부되었고 오사카에서 노동 일을 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1991년 이철은 ‘재일 한국 양심수 동우회’를 만들어 활동하며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에 힘썼다. 양심수 전체의 명예 회복을 추진하며 개인 차원의 재심 청구를 미루다 2013년에야 재심을 청구, 2015년 2월 40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1970년대 남북 화해 분위기로 남파 간첩이 줄어들자, 독재정권은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공안몰이를 계속했다. 그로 인해 130여 명에 이르는 피해자가 발생했고, 2010년부터 시작된 재심에서 신청자 36명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양심수 동우회는 2018년 ‘제3회 민주주의자 김근태상’을 수상했다. 민향숙의 어머니 조만조 여사는 두 사람의 수감을 뒷바라지하면서 1985년 민가협 출범 때부터 민향숙과 함께 적극 활동하였다.
 
억장 무너지는 기다림

문익환

내일은 민통련 수련회이고
모레는 주일날이어서
글피나 오겠어요
사흘이나 기다려야 하는군
그러나 그걸 기다림이라고 하는 건
죄받을 소리지
아침마다 지저분한 꿈자리를
밝은 웃음으로 씻어 주는 햇살
사흘씩이나 구름과 빗소리 속에 갇혀 있다고 투덜거린다면 이건
벼락 맞을 소리지
십 년이나
하루 세 끼니 먹을 때마다
밤마다 혼자서 자리에 들 때마다
피눈물로 범벅이 되는
이제는 마흔을 바라보는 노처녀의 기다림도 있는데
어머니
내가 나가는 걸 기다리는 건
어머니답지 않은 부끄러운 이야깁니다
그러나 향숙이
그 물어뜯고 싶은 향숙이의 기다림
그건 아직도 무덤은 아니야
그건 아직도 살아 숨쉬는 향숙이의 가슴이야
가슴 쿵쿵 울리는 철이의 염통이야
갑돌이의 무덤 좀 생각해 보라고
잘사는 김 대감네 밥상을 눈앞에 그리며
빈속에 눈침 삼키던 갑돌이
갑순이 김 대감 소실로 들어가는 날
그 잔치를 배 터지게 먹고 피똥 싸며 죽은 갑돌이의
잡초만 무성한 무덤
꺼져 가는 무덤
밤만 되면 잠 못 이루고 엉금엉금 동네로 기어 내려와
이 부엌 저 부엌 기웃거리다가
동이 틀 녘이면 뒷산으로 올라가
겨우 잠드는 억장 무너지는 그 무덤 좀 생각해 보라고
열흘 안에 돌아올게요 하며 떠나간 아들
30년 40년 기다리다가 숨이 멎은
어머니들의 억장 무너지는 무덤들
원산 뒷산 중턱에서 함흥 청진 산기슭에서
자취도 없이 꺼져 가는데
이보라고 향숙이
향숙이의 기다림은 아직도 살아 숨쉬는 기다림인 거야
꺾어진 삭정들에 다시 잎 피우고 꽃 피울
아직도 살아 숨쉬는
민족사의 소중한 한마디인 거야
 
◇ 민향숙이 이철에게 준 묵주. 사형수였던 이철이 서울구치소에서 광주교도소로 이감되기 전날 밤 교도관에게 부탁하여 전달했다(1977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 11옥사 3번방에 ‘재일동포 양심수- 고난과 희망의 길’이라는 주제로 전시되어 있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재일동포 양심수- 고난과 희망의 길’ 내부 전시물.
영상 속 민마리아는 민향숙, 레미씨는 이철(레미지오)을 지칭한다.
 
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