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이해동 목사 부인이자 동지, 이종옥 여사 (2023년 6월호)

“우린 신나게 싸웠어요, 당당하니까”

고난 헤치고 '둘이 걸은 한 길' 

 
[편집자 주] 무거운 인터뷰가 될 거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아주 신나고 흥겨운 만남이었습니다. 생사를 넘나들며 고난의 길을 걸어온 부부. 비장한 마음으로 수첩을 꺼낸 우리에게 부부는 오히려 과거로의 시간여행처럼 그 시절을 재미있게 들려주십니다. 권총을 머리에 겨눈 절체절명의 순간을 말씀하시면서도 웃음을 잊지 않으십니다. “이 사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니까요?”
그렇게 저항하며 살아온 시간들이 힘드시진 않으셨냐는 질문에는 대번 정색을 하십니다. 
“당당했으니까, 우린 정말 당당했거든. 그러니까 싸울 수 있었지요”
『월간 문익환』 6월호는 이해동 목사님의 사모님이신 이종옥 여사님을 만났습니다. 남편 이해동 목사님도 함께 했습니다. 평생 한 길을 걸어오신 두 분. 두 시간 넘게 ‘신나게’ 말씀해준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일산 자택에서 서로를 환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이종옥-이해동 목사 부부


“우리가 한빛교회로 처음 왔을 때 젊었던 시절인가 봐요. 그땐 우리 더블데이트도 했거든요. 그렇게 문익환 목사님 부부하고 넷이 광화문에 있는 찻집이며 카페도 가고, 맥줏집도 가고 그랬어요. 그 시절엔 그렇게 즐기기도 했어요” 늦봄 부부가 표지를 장식한 『월간 문익환』 2022년 10월호를 건네자, 당시를 떠올리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여사에게는 그 시절이 꿈같았다. 

이종옥 여사. 이해동 목사의 부인이자 동지였다. 오죽하면 이해동 목사의 회고록도 『이해동 이종옥의 살아온 이야기: 둘이 걸은 한길』일까. 
 
◇젊은 날의 이해동 목사와 이종옥 여사

 
이 여사는 유신과 군부독재로 험난한 시절, 박용길 장로와 함께 고난을 헤쳐 나갔다. 가시밭길로 뛰어든 남편들의 옥바라지를 하며 소용돌이 같은 역사의 현장에 휩쓸려 들어갔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과 1980년 5.17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두 사건으로 남편이 구속되자 두 아내는 서로 동지가 됐다. 함께 치열하게 싸우며 다독였다. 이 여사는 지금까지도 구속자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계속 이어 가고 있다.
 
 

 ▲문익환 목사-박용길 장로 부부와의 인연 

“본받을 게 너무 많은 진짜로 좋은 분”

▶박용길 장로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문 목사님 부부는 본받을 게 너무 많은, 진짜로 좋은 분들이에요. 
박 장로님은 폐품 이용을 참 잘하셨어요. 길에 버려진 콜라병 뚜껑에다 털실로 뚜껑을 씌워가지고 식탁 위에 놓는 냄비 받침을 만들기도 하고… 아이디어가 아주 많았어요. 그분은 손 뜨개질을 아주 잘하셔요. 그래서 그렇게 만들어서 선물 하나씩 주기도 하셨죠. 누구도 따라 못 할 정도로 좋은 분들이었어요. 음식도 남기면 혼내시던 아주 알뜰하신 분이셨어요.

‘사랑의 친구들’ 바자회 할 때는 장로님 코너를 따로 마련했어요. 바자회 한다고 하면 골무도 만들어 오시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하셔서 사람들이 박 장로님 물건을 많이 팔아줬지요. ‘사랑의 친구들'은 제가 시작부터 25년 넘게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어요. 올해도 10월에 할 예정이니 우리 목사님이 타 주시는 커피 마시러 오세요.

 

“한신대 시절 두 분은 신학생들의 선망의 대상”

▶문 목사님 부부를 언제 처음으로 만나셨는지요?
저는 남편이 한빛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하면서 처음 뵀어요. (이해동 목사는 한신대 재학 시절 스승으로 문익환 목사를 만났으며 1970년 한빛교회로 오면서 더욱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우린 목사님 가족과 거의 매일 만나면서 한 식구처럼 지냈어요. 교회에서 얻어준 전셋집이 한신대 근처에 있었거든요.

문 목사님은 아주 키가 컸고 호리호리했어요. 얼굴은 귀공자처럼 하얗고. 한신대학교 사택 안에 사실 때 부부가 아주 다정했어요.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죠. 언제나 팔짱 끼고 다니셔서 거기 신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주무실 때도 꼭 손잡고 자고, 싸워본 적이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우리가 티격태격 싸우면, 왜 싸우면서 사냐고, 우리는 한 번도 안 싸우고 싸움도 안 해봤다고 하시곤 했죠.

 

 ▲ 3.1민주구국선언 사건 

사진 속 장준하 “네가 하려무나”

▶문익환 목사님이 왜 3.1구국선언에 나선 거지요? 
(이해동 목사) 3.1절을 앞둔 2월 어느 날이었대요. 문 목사가 책상 앞에서 돌아가신 장준하 사진을 보면서 “3.1 절이 돌아오고 있는데 네가 살아있었다면 이대로 넘어가지는 않았을 텐데” 이렇게 혼자 넋두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진 속 장준하가 “네가 하려무나” 그러셨대요. 이건 마치 문익환 목사님이 신이 들린 거 같은 거였죠. 

 

처음엔 그저 심부름하러 갔다가… 

▶이해동 목사님은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이해동 목사) 그 일이 있기 전 하루 전날 문 목사가 저녁때 갑자기 나보고 집에 좀 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집사람과 같이 밤에 갔죠. 갔더니 성명서를 타이핑해서 교회 등사기로 밀어달라고 했어요. 그때는 내가 주보도 만들고 하니까 심부름을 시킨 것이었지요. 호근(문익환 목사 장남)이가 타이핑하고 삼일절날 아침 새벽에 우리 집으로 와서 나하고 문 목사님하고 같이 등사기로 밀었어요.

(이종옥 여사) 이 목사가 등사기를 밀고 문 목사가 그걸 한 장씩 빼면서 한 40장 정도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걸 뿌린 거예요. 그날 명동성당에서 미사가 있었고 이우정 선생이 성명서를 읽었죠. 그리고 그냥 다 별일 없이 집에 왔어요. 사실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어요.
 
 

“박정희가 김대중 때문에 뿔따구가 난 거야”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커진 거죠?
(이해동 목사)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은 진짜 몰라요. 
첫날은 아무 일도 없었는데 3월 2일 밤 11시부터 갑자기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참 이상했죠. 박정희가 보고를 받았는데 거기 명단에 김대중이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박정희가 김대중 때문에 뿔따구가 난 거죠. 

하나님은 어떤 사건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건이 된다는 게 ‘사건의 신학’이란 거예요. 만일 김대중이 연루가 안 됐더라면 사건화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김대중이 걸려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고 외신들이 달려들었죠. 결국 김대중이 있었기 때문에 재야하고 합쳐지는 계기가 되었죠.

 

남편의 전화 “그냥 다 얘기해줘라”

▶남편이 잡혀갔는데 여사님은 괜찮으셨어요? 
나는 끝까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버티고 있었어요. 미리 증거가 될 등사 원지 등을 세숫대야에 다 태우고 싹 없애버렸죠. 그런데 나중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어요. (문 목사님이) 다 얘기했으니까 그냥 얘기해줘라 그러셨어요. 모른다고 버티고 있다가 다시 얘기하려니깐 그땐 좀 창피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수사관들에게 “다시 해요” 그랬어요. 문 목사님은 뭘 못 숨겼어요. 어느 집에서 뭘 먹었던 얘기까지 다 해버리셨다니깐요. 안병무 박사 집에서 빈대떡 먹은 얘기까지 다 하셨대요. 참 순진하셨죠. 하하.
 
 

기발한 시위 아이디어, 안기부도 감탄

▶재판정 밖에서 여러 가지 시위를 많이 하셨는데….
안기부 사람들이 그랬대요. 도대체 그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오냐고! 재판정 밖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로 다양한 소품들을 활용해서 시위를 이어갔죠. 

첫 번째 소품은 양산이었어요. 보라색 양산에 ‘공개재판해라’ ‘양심수 석방해라’ 크게 썼어요. 차 두 대로 10명이 이동하는데 자동차가 신호등에 걸리면 잽싸게 내려서 양산 5개를 앞차에 갖다주고 뒤에 우리가 하나씩 나눠 가지고 그걸 법원 근처에 가서 쫙! 펼쳤어요. 외신들이 막 촬영했죠. 양산을 뺏길 때 다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보라색 한복을 입기로 했어요. 다치면 안 되니까요. 저들이 우리 한복을 벗길 거냐, 어떻게 할 거냐… 그래서 나선정 총무하고 나하고 동대문에 가서 3천 원짜리 한복 열 벌을 사 와서 그다음 재판 날 입은 거예요.

재판장이 우리보고 십자군 같아 보인다고 한 적도 있었어요.
우린 주로 밖에서 시위하느라 재판정 안에는 잘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느 날 모두가 버버리 코트를 입고 재판정 안에 들어갔어요. 안에는 가슴에 십자가와 남편의 수감번호를 써서요. 

우리가 딱 들어가니까 형사도 놀라고 정보부도 놀라고… 우리가 방청권 가지고 들어간다는데 저희가 어떻게 말려요. 판사도 놀란 거예요. 그때 전상석 판사이던가…그분이 우리가 십자군 같아 보이더래요. 우린 참 신나게 싸웠어요. 당당했으니까요.
 
 
 ◇박용길의 보라 여름 원피스와 빅토리숄. 3.1 민주구국선언문 사건 부인들은 경찰들에게 뺏기지 않을 시위용품을 고민하다가 보라색 의상을 맞춰 입었다 보라색은 기독교에서 고난과 승리를 상징하는 색이다. 가슴에는 남편의 수인번호를 수놓았다. 이 옷을 입고 공개재판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 3.1 민주구국선언문 사건 당시 공개 재판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일 때 사용하던 부채로 “민주인사 석방하라” 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버스에 태워 쓰레기 버리듯 하나씩 버려

그때 우리들을 공판정에서 막 잡아서 버스에 태워 태릉 푸른 동산 부근에 한 명씩 ‘버리기’도 했어요. 제일 먼저 악질인 사람을 갖다 버린다고 하던데 내가 제일 먼저 떨어졌죠. 그러면 다시 택시를 타고 한 명씩 ‘주워서’ 싣고 다시 왔죠. 그때는 전화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땐데 참 이상하게 다 이게 선이 닿더라고요. 그래서 제일 먼저 내린 사람이 택시 잡아타고 쫙~ 오면서 그다음 다섯 사람 태우고… 결국 형사들보다 우리가 먼저 법원에 와있었죠. 법원 근처에서 시위해야 되니까. 우리가 그렇게 시위하면 외신이 우리를 다 촬영하고 보도하니까요.
 
 

 ▲ 1980년 5.17 사건(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권총을 들이대고 모가지 뺏어 간다고…

▶연행 당시 많이 놀라셨을 텐데요
주일 전날인 토요일 밤 11시쯤 이해동 목사가 설교문을 쓰고 있는데 형사들이 들이닥쳤어요. 이 목사는 내일 설교하고 자진 출두하겠다고 버텼죠. 근데 권총을 들이대고 모가지 뺏어 간다고 그러더군요. 잊을 수가 없어요. 이 목사가 그래도 당당하게 대문을 열고 나가는데 나를 돌아보는 얼굴이 하얘지더라고요. 그때까지도 안 떨었어요. 근데 딱 대문을 닫고 가는데 그때부터 진정이 안 되더라구요. 얼마나 떨리는지. 죽이러 가나 보다 이렇게 생각이 드니까 말도 못 하게 떨렸어요.
 
 

59일 동안 생사 몰라… 국보위에 실종 신고

그렇게 군인에게 잡혀간 남편의 소식은 59일 동안 소재는커녕 생사조차 파악할 수 없어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찾아 다니다가 국보위에 실종 신고까지 했었어요. 물론 소재는 조사하고 있는 사건이라 알려줄 수 없다는 답만 일주일 후에 받았지만요.

 

재판 내용 기억했다 기록하고 정리

재판정 안에 어떤 것도 소지할 수 없어서 재판 내용을 머릿속에 저장했다가 밖에 나와서 기억을 되살려 기록하고 정리했어요. 남편들 것뿐만 아니라 학생들 내용까지 서로 나누어서 맡았죠.
재판정엔 가방을 들고 갈 수 없어서 몰래 볼펜심을 속옷 사이에 넣고 갔는데 볼펜심이 녹아내려서 들킨 적도 있어요. 빼앗긴 건 물론이고 옷도 얼룩으로 다 버렸어요.

감옥으로 보내는 편지에서는 검열을 피하고자 우리끼리 암호를 사용했어요. 박용길 장로는 수유리댁, 이희호 여사는 홍 권사로 표현했죠. 돼지집은 실제로 돼지를 키웠던 김종완 의원댁이었어요. ‘오늘 이순신이 신림동에서 바빴다’라고 표현하면 오늘 서울대에서 큰 규모의 시위가 있었다"라고 이해하는 방식이었죠. 안기부에서도 우리에게 별명을 붙였어요. 일종의 암호 같은 건데 제가 도봉산3이었어요. 도봉산1은 박용길 장로, 도봉산2는 이문영 박사의 아내인 김석중 씨였죠. 
 
 

 ▲유쾌하고 당당했던 동지들 

“조상한테까지 과태료 물리고 싶냐?”

 ▶한승헌 변호사와 ‘형’ 논쟁
(이해동 목사) 작년에 작고한 한승헌 변호사와 참 친하게 지냈어요. 동갑이긴 한데 누가 형인지 서로 옥신각신했죠. 내 공소장엔 생일이 10월 5일로 되어있거든요. 한승헌은 생일이 9월 28일이에요. 내가 한 일주일 정도 늦는 거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내가 7월 7일생이라 더 빨랐어요. 한 변호사에게 나보다 두어달 더 늦게 태어났다고 하니 아니라고 주장했죠. 법정에서 인정신문 할 때 생년월일 10월 5일이냐고 물었을 때 “네” 대답하지 않았느냐며. 그러면서 “조상한테까지 과태료 물리고 싶냐?” 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부인 자고 가지 말라는 조항이 어디 있냐?”

▶이문영 박사 행형법 해석
박용길 장로 김석중 씨(이문영 박사 부인) 나 이렇게 셋이서 전국 교도소를 순회했어요. 한번은 이문영 박사가 수감 중인 순천교도소에 갔는데 김석중씨가 면회하고 나오면서 깔깔거리며 웃는 거에요. 그래서 왜 그렇게 웃냐고 묻자 “이 박사가 행형법 어디에도 자기 부인 여기서 자고 가지 말라는 조항은 없다고 자기 마누라 자고 가게 해달라”고 그랬대요. 우리들도 빵 터졌었죠.
 
 

‘무한 뜨개질’로 징벌방 수감 해제시켜

▶김종완 의원 징벌방서 빼내기
김종완 씨가 강릉교도소에서 징벌방에 들어갔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항의하기로 했죠. 교도소 소장 방에 찾아가서 아무 소리 않고 무작정 뜨개질을 했어요. 가서 한마디 말도 일절 안 하고 그저 앉아서 뜨개질만 했어요. 교도소 측에서 할머니까지 있는데 여자들을 쫓아낼 수도 없고 난감해했죠. 자기들도 퇴근해야 하는데 못하고 무작정 기다려야 하니…

그래서 얘기를 했죠. 김종완 씨를 저 징벌방에서 내놓으라고. 그랬더니 징벌방에서 해제하겠으니 제발 돌아가 주시라고. 그래서 김종완 씨가 다행히 나올 수 있었어요

 

진짜 솥까지 갖고 와서 “우린 집에 안 가”

▶김대중 전 대통령 면회 투쟁
육군 교도소에서 수감 중인 김대중 씨 면회를 안 시켜주는거에요. 면회는 수요일 한 번뿐이라며 아예 육군 교도소 문을 잠갔어요. 그래서 우린 면회하기 전에 집에 못 간다 그러면서 투쟁했죠. 박 장로님은 철문 같은 데 올라가서 꼭대기에서 문을 흔들고.

우리가 그런 쇼를 잘했죠. 유인호 교수 사모님이 양평 집에서 갖고 온 솥을 꺼내 왔어요. 면회 시켜주기 전에 우리는 한 발도 떼어놓을 수 없다고. 우린 여기서 밥도 라면도 끓여 먹고 그러겠다고. 솥을 꺼내 갖고 오니까 정말 난리가 났어요. 오죽하면 기동대까지 다 와서 우리를 삥 둘러서 섰어요. 우린 못 가니까 강제로 끌어가라고 난리를 쳤죠. 강제로 우리를 어떻게 끌어내겠어요. (책에 의하면 결국 면회는 하지 못하고 모두 강제로 해산이 되었다고 한다.)
 
 

“서울 사람이지만 광주로 본적 옮기겠다”

▶ 이문영 박사 당당한 최후진술
이문영 박사는 정말 용기가 있는 분이었어요. 법정에서 최후 진술할 때였는데, 당시 김대중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무서운 분위기였죠.  조금이라도 형량을 줄이기 위해 김대중하고 상관없고 윤보선계라고 진술하는 이도 있었지만, 이문영 박사는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이 세 가지를 또박또박 말씀하시면서 당당했어요. 

첫째, 김대중 씨가 이렇게 부당하게 억압당한다면 밖에 나가서도 똑같이 하겠다. 
둘째, 나는 본래 본토박이 서울 사람인데 내가 나가면 내 본적을 전라남도 광주로 옮기겠다
셋째, 내가 나가면 교회 교적을 핍박을 받는 한빛교회로 옮기겠다.

 
가보처럼 여기는 동지들의 친필 서명 백자 
◇이해동-이종옥 부부가 독일로 떠나기 전 많은 동지가 우이산장에 모여 친필이름을 쓴 백자. “항심만리” 글귀 아래 각각 친필로 이름을 써서 구운 백자를 선물로 주었다.

“이거는 우리 집밖에 없는 그런 대단한 거예요. 우리가 독일로 떠난다고 우이산장에 모두 모여서 다 저렇게 이름을 적었어요. 돌려가면서 서명하고 다시 유약을 발라 구운 거죠. 전부 본인 필체죠. 누가 대신한 거 없어요.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는 거예요.”

부부가 가보처럼 보관하는 백자는 거실에 들어서면 무엇보다 먼저 볼 수 있도록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이해동, 이종옥 수고를 기억하며’ 문구 아래에는 문익환, 박용길, 함석헌, 이우정, 안병무, 김석중, 이문영, 박형규, 예춘호, 유인호, 김종완, 김상현, 이정순, 이성자 등의 이름이 쓰여 있다.

 
<글: 오남경>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여행과 사색을 위한 숲길 산책을 무척 좋아합니다.



[참고 문헌]
이해동 (2014) 『둘이 걸은 한 길 1』. 대한기독교서회
이해동 (2014) 『둘이 걸은 한 길 2』. 대한기독교서회

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