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늦봄의 제자 한국염 목사(1) (2023년 8월호)
늦봄에게 배운대로…민중의 삶 함께하고 싶었다
“내가 일생에서 제일 잘한 일 두가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여성인권운동을 시작한 것, 그리고 독일 유학 때 교수의 삶을 접고 민중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에요”
그의 선택은 결국 보장된 삶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생을 여성신학운동과 이주여성 운동가로 헌신한 그는 덤덤히 말합니다.
“문익환과 문동환, 그리고 이우정...난 그저 한신에서 배운대로 선배들의 족적을 따라갔을 뿐입니다”
스승 문익환 목사처럼, 안정된 삶을 스스로 내던지고 고난의 길에 뛰어든 ‘늦봄의 제자’ 한국염 목사를 『월간 문익환』이 만났습니다.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한 한 목사. 그의 선택은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요? <편집장>
◇모교인 한신대 신학대학원 캠퍼스를 찾은 한국염 목사.
한신대학교에서 문익환 목사에게 강의를 들은 제자 한국염 목사를 만났다. 박용길 장로와는 기장 여신도회에서 활동하면서 깊은 인연을 맺은 분이다. 여성신학자로 또 여성운동가로 평생을 올곧게 외길을 걸어온 한 목사는 반백년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문익환 통일의 집과 소통하고 있는 귀한 분이기도 하다. 한신대 통일의 집 수장고에서 만난 한 목사는 나이가 무색하게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졌다. 맑은 음성으로 올곧고 또렷하게 운동가의 삶을 살아온 지난 이야기를 풀어냈다.
늦봄과의 인연들
결혼식 주례서면서도 학생 이름 깜빡
▶한신대 시절 문익환 교수님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건망증이에요.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 못 하기로 유명했지요. 심지어 결혼식 주례를 서면서 학생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 아버지 이름을 신랑 이름으로 이야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답니다. 또 하나는 대학원 시절 구약학 전공한 학생이 불과 둘 뿐이었는데 두 사람 이름을 모두 기억하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교내에서 만날 때마다 항상 “안녕하세요? 한국 염(한국 소금)입니다.” 하고 매번 인사를 드렸드니 훗날 다른 사람 이름은 기억을 못해도 한국염 이름은 알고 있다고 하셨어요.
문 목사님과의 학교 수업은 한 학기였지만 이스라엘사를 통해 신학에 새로이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내용과는 별개로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는 혼자 “하~” 하고 감탄을 하시면서 한 말씀 한 말씀 이어 나가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학점은 아주 인색하게 주셔서 교수님 과목에는 낙제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학생들이 전전긍긍했죠. 1점 모자라는 59점으로 낙제하는 학생도 있었지요.
◇한신대 교정에 서 있는 젊은시절 문익환 목사와 제자들
귀공자 타입의 얌전한 분이 설마…
▶3.1민주구국선언 때 놀라셨겠네요?
3.1민주구국선언문 사건이 났을 때는 충격이었어요. 귀공자 타입의 미남이고 온화한 미소로 잘 웃으시는 얌전한 분이셨는데 선언문을 쓰셨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오히려 문동환 박사님은 당연하다 생각들 했었지요.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이후 여신도회에서 박용길 장로님의 인권운동을 도와주면서 장로님의 다양한 아이디어에 놀라기도 했지요. 저 역시 큰 감명을 받아서 훗날 여신도회 간사로서 실무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어요.
가족처럼 지내…월급 쪼개서 과일 사주시기도
▶한신대 시절은 어땠어요?
한신대 시절 교수님들과는 가족처럼 지냈어요. 권위적이지 않고 여성이라고 차별하지도 않고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어요. 명절 때는 박봉인 월급을 갹출해서 학생들에게 과일을 사주기도 하셨구요. 강의실에서보다 인품과 삶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기에 당시의 교수님들에게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은총이라고 생각됩니다.
한신대 대학원에서는 기독교교육을 전공하면서 문동환 박사님과 1:1수업을 받았습니다. 성평등, 계급평등을 감명깊게 배웠죠. 문익환 목사님 등 통일 운동에서 족적을 남긴 선배들의 길을 제가 따라간거죠. 여성 운동의 이정표는 이우정 선생님이셨고 민중운동의 이정표는 문동환 박사님이었습니다.
제 결혼식 때 박용길 장로님이 오셔서 문익환 목사님의 첫번째 시집 『새삼스런 하루』를 선물로 주셨는데, 잘 보관하고 있다가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에 기증했습니다.
◇문익환 목사의 사료가 빼곡한 아카이브(수장고)에서 <월간 문익환>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한국염 목사.
한신대캠퍼스보존위원회 사건으로 친해져
▶박용길 장로님과의 인연
박용길 장로님과는 한신대 캠퍼스보존위원회 사건 당시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친해졌어요. 저는 기숙사, 문 목사님 가정은 사택에서 지냈으니까 휴교 때 식당 문 잠긴거 풀어가지고 밥 해먹었을 때 도움을 많이 받았죠. 이후 이우정 교수님과 기장 여신도회에서 활동하면서 더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여신협(한국 여성신학자협의회) 간사로 있으면서 여성 통일운동에서 문익환 목사님의 통일운동과 자연히 조우가 된 것이지요. 문익환 목사님과는 출옥하시고 기독교회관 로비에서 만나 함께 덩실덩실 춤을 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년 만의 숙제 마쳐
▶여성신학자 전기 『봄길 박용길』을 출판하셨는데…
1980년 창립된 한국 여성신학자협의회(여신협)의 통일신학작업반에서 사회운동, 인권운동, 여성운동을 하신 여신협 회원 분들 중 존경할 만한 분들의 활동을 조명하기 위해 여신학자 전기를 발행하기 시작했어요. 조화순(『고난의 현장에서 사랑의 불꽃으로』), 공덕귀(『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에 이어 박용길 전기를 발간하고자 출판위원회를 구성하였으나 당시에는 사정상 진행되지 못했지요.
여신협 총무 시절 여성 박용길의 자취를 아내가 아니라 여성신학자로서 조명하고자 ‘박용길 전기’를 제안했던 나에게는 숙제로 남아 있었지요. 이후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20년 『봄길 박용길』 이 발행되어 숙제를 마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 여성 지도자로서, 민주화 운동 시대에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한 투사로서, 통일의 여성 사도로서 독자적인 박용길의 위상을 발굴하고 자리매김하고자 했습니다.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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