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헌정음반 작곡가 류형선 예술감독(1) (2023년 11월호)

“난 40년차 문익환 덕후…” 

문익환 헌정음반 <뜨거운 마음> 작곡가, 류형선 전남도립국악단 예술감독 
 
💌 편집장의 커버스토리
1991년 4월, 연세대 대강당. 청년 류형선은 문익환 목사 바로 앞에서 헌정곡 ‘그대 오르는 언덕’를 부르게 됩니다. 예정에 없던 돌발 상황. 가수도 아닌 작곡가가, 그것도 노래의 주인공 늦봄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불러야 한다니... 목사님의 눈도 못마주치며 새색시 처럼 수줍게 노래를 마치자, 늦봄이 무대위로 천천히 올라왔습니다. 그리곤 가만히 청년의 두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가능성 앞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온통 가능성일 뿐이다”

‘문익환 덕후’였던 청년의 마음 한가운데를 관통한 이 한마디는 그의 삶의 지표가 됩니다. 이제 중년이 된 작곡가에게 아직도 ‘덕질’을 계속하는 이유를 묻자 유쾌한 대답이 돌아옵니다. “어쩌겠어요, 이미 사랑해 버린걸~” 『월간 문익환』 11월호엔 40년째 ‘덕질’중이라는 그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경기도 과천의 과천교회 음악실에서 만난 류형선 감독. 이 교회의 성가대를 이끌고 있다. 
 
 


"늦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스펀지처럼 흡수되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 경기도 과천역 인근의 과천교회에서 전남도립국악단 예술감독 류형선 작곡가를 만났다. 과천교회는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 앨범을 함께 만든 인연이 있는 주현신 목사가 시무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성가대를 이끌고 있는 류 감독은 자기를 가리켜 ‘문익환 덕후’라고 고백했다(*덕후: 마니아를 뜻하는 일본어의 한국식 표현). 두 시간여 동안 신앙, 음악, 시 등 여러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매번 흐름은 깔대기처럼 문익환 목사로 귀결되고 말았다. 40년 덕후 경력을 자랑하는 이부터 2년 차 신입 덕후인 취재진까지 두루 모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겠다. “문익환 목사의 말 하나하나가 스펀지처럼 나에게 흡수되었다”. 수많은 대중에게 쏟아낸 늦봄의 언어가 유독 청년 류형선의 가슴에 꽂혀 아직까지 그 안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삶의 좌표를 찾기를 간절히 바라며 안테나를 뽑고 기다린 외로운 청년에게 문익환 목사는 딱 맞는 주파수가 아니었을까.  
 
 

 ▲문익환 목사와의 인연 

20대 때 교회에서 설교 듣고 다 받아적어

▶ 문익환 목사님을 언제 처음 알게 되었나요? 
저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교단 소속 교회 중고등부를 다녔기 때문에 문익환 목사님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그런 분위기였죠. 마치 봄 되면 들에 꽃이 피는 정도의 느낌으로 문익환 목사님을 알았어요.   
 
▶ 그러다 어떻게 문익환 목사님을 특별하게 생각하게 되셨나요? 
제가 83학번입니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속에서 떠나지 않는 목사님의 말들이 있어요. 기독교에 관해서 하신 말씀, 그 표정까지 딱 기억나고, 염색체 같이 말씀들이 내 안에 용해된 느낌으로 20대를 보냈어요. 

69년 (『공동번역 성서』 번역일로)  한빛교회를 그만두시고 프리랜서 목사였으니까(웃음), 제가 다니던 잠실중앙교회(현 잠실희년교회)도 여러 번 오셔서 설교하셨죠. 그러면 말씀 한 톨도 안 버리려고 다 받아적고 그랬어요.  젊은 시절에 내 안에 담겨있던 문익환 목사님은 통일지사, 민주화 운동의 대부, 이런 말로는 잘 표현이 안 돼요. 제일 잘 표현하는 말이 ‘문익환 덕후’, 그 말이 맞아요. 
 
 

“목사님, 설교문 저 주시면 안 돼요?”

▶ 문익환에 ‘입덕(덕후가 되기 시작함)’한 계기는 뭐였을까요? 
내가 왜 문익환을 존경하는 젊은 세대 중 한 명이 되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유가  있더라고요. 첫 번째로 문익환 목사님은 진보적인 크리스찬 청년들에게 가장 좋은 좌표를 줄 수 있는 아주 적임자였던 거예요. 당시 크리스찬이 아닌 선배들에게서는 해답을 찾기 어려운 고민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만약 학생 운영위원회가 일요일에 열리면 나는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것이 내 인생의 일부이고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에 회의를 못 하는데 이게 존중을 못 받아요. 그런데 문익환 목사님은 청년·학생 운동 현장에서 누구도 ‘선생님’이라고 안 불러요. 다 ‘목사님’이라고 부르지. 그걸 보면서 목사님을 통해 크리스찬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이 설명이 되었죠. 그 이후에도 진보적이면서 크리스찬인 이 두 가지 정체성에 대한 가장 적합한 솔루션을 주시는 분이었어요. 

다른 이유는 문익환 목사님이 시인이셨잖아요. 제 원래 꿈이 시인이었기 때문에 시인의 감수성이 늘 안에 있는데 문익환 목사님의 말씀은 그 어느 연설가의 연설보다도 제 안에 시적 레토릭(설득력)으로 스펀지가 물을 빨아먹듯이 쏙쏙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덕후가 되었죠. 목사님 설교 끝나면 앞에 가서 “설교문 저 주고 가시면 안 돼요?”하면서 받아가지고 복사해서 교회 청년회보 만들고 그랬죠. 

 

“타인의 아픔이 나의 통증이 되는가 성찰해 보라”

▶ 기억나는 말씀은? 
제 신앙적인 뿌리는 언젠가 기독교회관에서 강연했을 때의 말씀 그대로예요.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과 변별되는 것이 무엇이냐? 타인의 아픔이 나의 통증이 되는가 성찰해 보라.” 예수의 생애를 한마디로 말하면 타인의 아픔이 나의 통증이 되는 것이고, 신앙은 타인의 아픔이 나의 통증이 될 때 비로소 작동하는 것이다. 이 말이 지금도 꽂혀서 어딜가나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다음에 제가 예술관을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어요. “그 통증 때문에 노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가 내 삶을 보다 나은 사람으로 치유해 주는 것” 내 예술의 좌표, 작곡가 인생의 좌표가 만들어지는 거죠. 

 

 ▲음악 

김민기 노래 듣고 작곡가의 꿈

▶ 시인에서 작곡가로 진로를 바꾼 이유는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5년 동안 꿈이 시인이 되는 거였고 가고 싶은 대학도 있었어요. 그러다 고2 때 김민기  씨의 노래를 듣고 ‘이렇게 음악을 통해서 시를 쓸 수 있구나’라는 걸 알았어요.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작곡까지 하면 내가 시인들보다도 내가 더 변별력 있는 재능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제 눈에는 작사 잘하는 작곡가가 김민기, 정태춘 정도밖에 안 보이더라고요(웃음). 
 
 

예술적 성취물로 타인과 소통 

▶ 민중가요도 작업을 하셨지요?
‘그대 눈물 마르기 전에’, ‘동지여 굳세게’ 같은 노래들이 있는데 그것을 제가 작곡가로서 작품활동이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작곡가로서 예술적 성취물을 타인과 소통한다는 것은 그보다 좀 더 엄중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당시 진보적인 기독 청년이었던 제 입장에서 노래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 한 것이었죠.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에서 발행한 『늦봄 문익환 목사 성가집』을 들고 있는 류형선 감독.
 
 

비방 글들에 분노, 다방 DJ박스서 작곡

▶ 방북헌정곡 ‘그대 오르는 언덕’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요?
 ‘그대 오르는 언덕’은 신앙고백의 성격으로 만들었어요. 1989년 목사님 방북 이후에 일간지에서 온갖 비방의 글들이 실리는데 그날 분노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친구한테 전화해서 “야 나 오늘 수업도 다 빼고 학교 안 간다”하고, 기타 들고 다방 안 DJ박스에 쳐박혔어요. 거기서 하루 꼬박해서 만든 노래예요. 언론에서 조롱당하는 내 사람을 보디가드처럼 내 곡으로 지켜야 한다는 심정이었죠. 그걸 하고 나니까 오히려 내가 치유가 되는 걸 경험했어요. 제가 한 400여 작품을 발표했거든요. 거듭 곡을 쓸 때마다 이런 통증과 치유의 경험을 반복하니 다른 작곡가들과는 확실하게 변별되는 그런 작곡가일 수 있는 거죠. 
 
“버려진 사선 철길을 따라 민중의 가슴 차표를 쥐고 
그대 오르네 철책 면류관 쓰고 저 언덕을 오르네” (류형선 작사, 곡 ‘그대 오르는 언덕’ 부분)
 
“우리 교단에서 마음을 쏟으신 기도회가 새 빌딩에서 열렸읍니다. “그대 오르는 언덕”을 지으신 분이 연출을 맡아 좋은 노래들을 들려주었어요.” (박용길이 감옥으로 보낸 편지, 1992. 12. 7) 
   
  

아내와 통일의 집 방문했다가 결심

▶ 문익환 헌정음반 <뜨거운 마음>을 낸 계기는? 
아내 정경아 작가는 박 장로님과 각별했고 후에 박용길 전기 『봄길, 박용길』을 집필하기도 했는데요. 1998년 연애시절 정경아 작가하고 통일의 집을 방문했을 때 『늦봄 문익환 목사 성가집』이라고 해서 약간 조악한 인쇄물로 딱 전시돼 있더라고요.  이걸 들고 읽는데 찬송가 가락에 가사를 붙인 것들이 쭉 있는 거예요. 일종의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죠. 1982년 옥중작사라고 돼 있는데 차가운 겨울날 곡이 없으니까, 찬송가를 보면서 원곡과 맞춰가며 꼼꼼히 쓰셨을 거 아니에요. 저 같은 작곡가가 감옥에서 옆에 있었으면 곡 한번 써보라고 하셨을 텐데… 하는 마음도 들고. 문익환 목사님 돌아가신 날 눈발 날리던 노제에서 곡 만들어서 합창하던 것이 5년이 지났을 땐데 그 뜨거운 마음이 식지 않은 상태에서 이 성가집을 딱 보니 애처로운 마음, 연민 같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박용길 장로님께 “이것  가져가서 생각을 좀 많이 해보겠습니다” 하고선 집에 와서 바로 그날 쓴 곡이 ‘고마운 사랑아’였어요. 보통 가사와 멜로디를 써놓고 편곡은 메모만 해두고 나중에 작업을 하는데 그날은 그냥 편곡까지 순식간에 다 쓴 것 같아요. 하루 만에 딱 써놓고 이건 (정)태춘 형이 부르면 되겠다 생각했죠.  

 1년 후 2000년에 10곡을 실어서 첫번째 앨범을 내고, 2011년에 세 곡을 수정해서 11곡을 넣어서 리메이크했죠. 다 제가 작곡한 곡들인데 작곡료는 한 번도 안 받았어요. 
 
◇문익환 목사 헌정음반 <뜨거운 마음> 2000년 앨범(왼쪽)과 2011년 리메이크한 앨범(오른쪽). 류형선 작곡가는 2019년 6월부터 2020년  9월까지 12회에 걸쳐 『기독교 사상』에 「문익환 목사 헌정음반 <뜨거운 마음>을 기록하다」라는 글을 연재해 앨범 작업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1998년 5월 18일 통일의 집을 방문했을 때 류형선 작곡가가 선물로 남긴 직접 쓴 <비무장지대> 악보.  
  
[(2)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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