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나와 늦봄>
‘평화나무 농장’ 원혜덕 (2024년 1월호)
방북 직전에 오셔서 글씨를 주셨고
방북 출옥 후 오셨기에 쉼을 드렸죠
◇문익환 목사 30주기 특별전 ‘생명과 평화: 밥알들의 양심’에서 축사를 전하는 원혜덕(왼쪽), 김준권 부부.
30주기 특별전에 ‘늘 푸르거라’ 문익환 목사 붓글씨 전시
강북에 있는 ‘통일의 집’에서 늦봄 문익환 목사님의 30주기 기념 특별전 ‘밥알들의 양심’이 열리고 있습니다. 문 목사님이 평생 추구하신 생명과 평화를 주제로 한 전시입니다. 문 목사님의 유물과 함께, 목사님의 생명과 평화 사상에 공감하는 많은 작가들이 제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2024년이 30주기인데 특별전은 7월까지 열립니다. 새해엔 꼭 한 번쯤 들러보시길 바라겠습니다. 언덕에 있는 소박한 ‘통일의 집’에 들어가셔서 유물과 작품을 하나하나 둘러보시면 함께 평화를 만들어 나가자는 문익환 목사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저는 2023년 11월 개막식에 남편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주로 작가들이 참여했지만 우리가 개막식에 참석하게 된 연유가 있습니다.
◇ 통일의 집 안방에 전시 중인 문익환 목사의 ‘늘 푸르거라’ 붓글씨(1989년 봄, 원경선 소장).
<풀무원 동지들 늘 푸르거라>
통일염원 45년 새봄 늦봄 문익환
늦봄, 농장 여러 번 찾아와 주무시고 가셔
위의 글이 쓰인 액자는 이번 문익환 목사님 30주기 특별전이 시작되면서부터 ‘통일의 집’에 걸려 있습니다. 그동안은 우리집에 걸려 있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과 나의 아버지는 뒤늦게 만나셨습니다. 서로 모르고 계신 것은 아니었지만 두 분이 깊은 유대감을 갖게 된 때는 연세들이 많이 드신 후였습니다. 늦은 만남을 만회라도 하듯 두 분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셨는데 이는 신앙 안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두 분 다 기독교 신앙인입니다. 말로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신앙을 삶으로 실천하는 두 분이기에 서로 강한 동지감을 가지셨던 듯싶습니다. 문 목사님은 여러 번 농장으로 아버지를 찾아오셔서 말씀을 나누시고는 가끔은 주무시고 가셨습니다. 농장에 머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고 하셨습니다.
1989년 봄 방북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오시고 바로 투옥되셨다가 나오셔서도 제 아버지가 계신 농장에 찾아오셨습니다. 좀 쉬고 싶다고 하시며 부인이신 박용길 장로님과 함께 오셔서 일주일간 머무셨습니다.
녹두전 만들어 드렸더니 “맛있다” 하셔서 감사
그때 공동체 주방을 맡아 식구들의 하루 세 끼 밥을 하던 내가 문 목사님 내외분께 좋아하시는 음식을 여쭤봤더니 녹두전이 드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해본 적이 없는 첫 솜씨로 전을 부쳐 드렸더니 두 분 다 맛있다고 하시며 많이 드셔서 기뻤던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보다 3년 늦게 태어나신 문 목사님께서 77세의 연세로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몹시 비감해 하셨습니다. 평소에는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던 아버지였는데 장지를 따라가시며, 다녀오셔서는 마음을 못 가누어 하셨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전태일과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돌아가실 때까지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헌신하신 분입니다. 1976년 첫 구속 이후 6차례에 걸쳐 생의 후반 18년 중 10년 3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셨습니다.
농장의 젊은이들에게 ‘풀무원 동지들 늘 푸르거라’
1989년 3월 방북직전 문익환 목사님이 이 글씨를 써 가지고 오셔서 제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여러 차례 오셨고 어느 날 이 글씨를 주셨기에 그때가 언제인지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통일 염원 45년’, 그리고 ‘새봄’이라 쓰신 것을 보고 문 목사님께서 방북 직전에 주고 가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가까운 분이 농장을 방문하시면 저녁 시간에 공동체 식구들을 모이게 하셔서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문 목사님은 당신의 말씀을 열심히 듣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마음에 새겨지셔서 <풀무원 동지들>이라고 쓰신 것이겠지요. 아버지는 이 글씨를 표구하여 공동체 가족들이 모여서 예배도 보고 회의도 하는 강당에 걸어 놓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우리 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자담건설 류현수 대표가 얼룩진 액자 말끔히 표구
이 액자는 얼룩이 져 있었습니다. 아버지 집에 비가 새서 벽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액자에 스며들었던 흔적입니다.
자담건설의 류현수 대표가 지난가을에 우리 집을 방문했습니다. 국경선평화학교 건물을 지어준 그는 2023년 봄에 우리 교육장 안에 화장실을 아담하게 지어주어서 고맙기도 하고 인연도 깊어진 사람입니다. 류 대표는 문익환 목사님이 사시던 집을 기념관인 통일의 집으로 바꿀 때 복원공사 해 준 분입니다. 그는 액자의 글씨가 얼룩진 것이 우리만큼이나 안타까웠나 봅니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얼룩을 없앨 수가 있다면서 아는 표구집에 부탁하겠다고 떼어가지고 갔습니다. 얼마 후 깜짝 놀라게 깨끗해진 액자를 곱게 포장해서 직접 들고 다시 왔습니다. 남편과 둘이 다시 자리를 정해 걸어주고 돌아갔습니다.
그 이야기를 류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그 포스팅을 본 ‘통일의 집’ 문영미 선생님이 내게 전화해서 그 액자를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필적이 담긴 그 액자를 30주기 특별전에 전시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통일의 집으로 간 이 액자는 특별전이 끝나는 2024년 7월까지 통일의 집 안방에 걸려있을 것입니다. 문익환 목사님과 박용길 장로님의 삶과 평화 사상이 어려 있는 유물들과 이번 특별전에 참여한 작품들을 대하면 이런 분이 우리 곁에 살다 가신 것에 감동하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으실 것입니다. 마음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혜덕 님은 한국 유기농의 아버지로 불리는 원경선 선생(풀무원 농장 설립자)의 넷째 딸로 남편 김준권 대표와 함께 경기 포천에서 '평화나무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유기농업의 최고봉으로 인정 받는 생명역동농법(Bio-Dynamic Agriculture)을 연구하고 실천하며 우리 먹거리를 지키는 일에 힘쓰는 40년차 농부이다.
◇ '민주열사와 함께하는 문익환 목사 30주기 기념문화제'에서 인사말을 전하는 원혜덕 농부(2024. 1. 13)
월간 문익환_<나와 늦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