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간첩 조작 사건 이철, 민향숙 부부(1) (2024년 1월호)

💌 편집장의 커버스토리
결혼을 불과 두달 앞두고 조작된 간첩사건으로 사형수가 된 ‘신랑’ 이철. 그리고 그를 사랑한 죄로 영문도 없이 옥에 갇힌 ‘신부’ 민향숙.
옥중의 민향숙은 이철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문을 전해 듣습니다. 그래서 “이철이 잘있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3년6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비로소 이철을 면회 간 민향숙은 ‘무사’한 신랑의 얼굴을 대하고서야 철망 너머 손을 꽉 잡고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밤마다 피눈물로 범벅이 되는 억장 무너지는 기다림’을 견뎌온 이들이, 무려 13년만에 결혼식을 올릴때 늦봄은 “대한민국이 생긴 이래 이런 결혼식은 없었다”며 진심으로 이들의 결혼을 기뻐했습니다. 함께 차에 올라 명동 일대에서 카퍼레이드까지 했으니까요.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무시무시한 현실. 온몸을 옥죄는 그 참혹한 시간을 이 부부는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월간 문익환』이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이철 양심수동우회 회장이 박용길 장로에게 선물한 산타클로스(1999). 매년 12월에 통일의 집에서 만날 수 있다.  
 
 
매년 12월이 되면 통일의 집에 등장하는 산타클로스가 있다. 오사카에 사는 이철 양심수동우회 회장이 1999년 선물한 노래하는 산타 인형으로 벌써 수십 년째 근속(?) 중이다. 마침 이 회장과 아내 민향숙 선생이 재일동포 사형수였던 진두현 선생의 재심 공판 방청차 입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철, 민향숙 부부는 문익환 목사의 시 ‘억장 무너지는 기다림’의 주인공으로 소개된 바 있다(🔗‘시 속의 인물’ 『월간 문익환』 2023년 5월호). 사료로 접한 경직된 사진 속 얼굴과는 다르게 이 회장은 누명을 쓰고 13년간 옥고를 치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소년 같은 웃음이 떠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남편의 지금 모습이 연애할 때 모습하고 똑같고,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민향숙 선생에게서 남편을 향한 믿음과 시련을 감내한 이의 강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 장소인 통일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두 부부는 목사님, 장로님께 먼저 인사드린다며 늦봄과 봄길 사진 앞에 섰다. 그리고 오랜 기억 속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통일의 집을 찾아 문익환 목사 부부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이철, 민향숙 부부. 
  
 

 ▶문익환 목사와의 인연 

“꿀이니까 따뜻한 물에 타서 먹어라” 출소하자 꿀단지 안고 불쑥 찾아온 늦봄

▶문익환 목사님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시는지? 
이철(이하 이): 제가 1975년에 서울구치소(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고 문익환 목사님이 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수감되셨는데, 그때 의무 병동 앞 운동장에서 환자복 입고 거기서 운동하시는 모습을 멀리서 본 것이 처음이고 그 이후로 감옥에서는 뵌 적이 없어요. 문동환 목사님은 저를 모르셨겠지만 복도에서 한두 번 인사한 적은 있고요. 당시 문익환, 문동환, 김대중 그분들은 요시찰 대상이라 함부로 말을 걸었다가는 큰일나지요. 

이후에 제대로 만난 것은 1988년 10월 3일 출소해서 안암동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이었는데, 문 목사님이 아주 좋아 보이는 단지 하나를 들고 오셨어요. 깜짝 놀랐지요. 꿀이니까 따뜻한 물에 타서 먹으라 하시면서 혈 자리를 꾹 누르시더라고요. 여기저기 누르시면서 어디 아픈 데 없냐 살피시고 몸조리 잘하라고 하시고는 가셨지요. 

저는 13년 동안 감옥 안에 있었기 때문에 대화는 못 했고, 이 사람(민향숙)은 3년 6개월 수감생활하고 나와서 문 목사님과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활동이라든지 함께했지요. 조만조 어머니(장모님)도 목사님과 가깝게 지냈고요.  

 

간첩단 사건에도 “내 딸”이라며 챙겨주셔

민향숙(이하 민): 1975년에는 문익환 목사님이 성서번역 하시던 때라 못 뵀고 문동환 목사님을 먼저 뵈었죠. 1979년 출소 다음 해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재야 모임이 있을 때 저도 함께 했고요. 문 목사님은 1985년 민가협 생기기 이전부터 장기수, 유가족들을 많이 돌봐주셨죠. 그때는 민주화·노동운동 하시는 분들은 많이 인정받는 시대였어요. 그런데 저희 같은 간첩단 사건은 다들 무서워서 운동하시는 분들도 저희 옆에 앉기 두려워하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문 목사님은 아무도 저희 손 안 잡아주던 그때 아주 따뜻하게 대해주셨고 갈릴리교회에서도 ‘내 딸’이라고 하시면서 너무 챙겨주시는 거예요.
  
십 년이나/ 하루 세 끼니 먹을 때마다/ 밤마다 혼자서 자리에 들 때마다/ 피눈물로 범벅이 되는/ 이제는 마흔을 바라보는 노처녀의 기다림도 있는데
(문익환 시 ‘억장 무너지는 기다림’ 중)

기다림, 그거 지쳐 버리지 않는 일이지요. 기다림에 져버리지 않아야죠. 향숙에게, 그리고 그날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격려를!!
(문익환 옥중편지 1986. 8. 5)
  
 
◇갈릴리교회(장소 한빛교회) 모임에서 문익환, 박용길 부부와 조만조(박용길 우), 민향숙(앞줄 흰 상의) 모녀 
 
◇조만조, 민향숙 모녀가 문 목사 부부에게 보낸 성탄 카드.
“예수님 같으신 문 목사님, 성모 마리아 같으신 사모님 두 분께서 우리들을 사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1985. 12) 

  

“목사님 정말 평양 가시는 거 아니죠?”

▶문 목사님에 대해 기억나는 일화는? 
민: 문 목사님은 누가 자가용을 내준다고 해도 항상 대중교통을 이용하셨어요. 이렇게 다녀야만 사람들하고 대화도 하고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고 하시면서요. 대화를 나누다가 목사님 마음에 딱 꽂히는 게 있으면 그걸 주제로 삼고 강연을 하시더라고요. 

또 허름한 차림으로 운동 현장에 꼭 나타나시는 안태영이라는 분이 있는데 아주 목사님을 끔찍이 생각한 분이었지요. 문 목사님 큰 아드님이 목사님 생신이라고 아주 좋은 셔츠를 선물해 드렸는데 안태영 님이 오니까 턱 내주시기도 하시고. 강연비 들어오면 또 필요한 사람 주고. 옆에서 보니까 계속 그렇게 아낌없이 주셨어요.
 
이: 제 기억에 남는 일화는 88년 10월에 출소, 결혼하고 이듬해 새해에 목사님께 인사드리러 왔을 때예요. 목사님께서 만나자마자 하시는 말씀이 방금 지은 시가 있는데 들어보라며 읽어주시는 거예요. 그게 ‘잠꼬대 아닌 잠꼬대’였던 거죠. 저는 듣고 놀라서 “목사님 정말 평양 가시는 거 아니죠. 큰일납니다.”라고 했더니 “철이는 몇 년 동안 감옥살이했지?” 물으셔서 “13년입니다.” 대답했는데 “나도 이번에 들어가면 철이 비슷하게 되겠구만.” 하셨어요. 설마 진짜 가실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짐작건대 저희가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의 최초의 독자일 텐데 그것이 영광이고 기쁨입니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 이건 진담이라고
(문익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 제1연)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조작 사건 

“이철은 사형집행됐다고 하더라” 

▶조국에 공부하러 왔다가 간첩으로 몰려서 사형수까지 되셨는데요. 
이: 1심, 2심, 3심 다 사형이었습니다.

민: 사형 집행일만 기다리고 있었죠. 저는 3년 6개월 선고받고 광주로 가버리고 이 사람은 서울구치소에 있었으니까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요. 그때는 크리스마스나 부처님오신날 그 좋은 날에 꼭 사형집행 시켰잖아요. 어머니가 저 면회 오셨을 때 “이철 씨 잘 있어요?” 물어보고는 어머니 표정 보면서 눈치만 살폈지요. 잘 있다는 대답은 들었어도 제가 눈으로 확인 안 하면 모르는 거니까. 

이: 그때 서울에서 광주로 이감 온 사람이 “이철은 사형 집행됐다고 하더라” 했답니다. 그래서 잘 있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한 거죠.   

▶수감 중인 분이야 말할 것도 없고 민 선생님도 그 긴 시간 동안 고초가 심하셨을 텐데요.
민: 제가 여기저기에서 석방 운동할 때는 다시 중앙정보부로 붙들려간다는 각오로 다녔어요. 항상 경찰이 따라붙어서 오늘 집회 나갈 거냐고 물어보면 저는 안 나가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는 나갔지요(웃음). 이철 씨가 사형을 받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태에 있으니까, 제가 무섭고 두려울 게 없더라고요. 나도 고문하고 죽여보라는 심정으로 그냥 나서게 된 거예요. 
 
 

“이거 완전히 엉터리구나” 알아채

▶어떻게 남편의 무고를 확신하셨나요?
민: 남편하고 저하고 대화 중에 어느 쪽의 우월성을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간첩이 아니라고 확신했어요. 남산에 조사받으러 갔는데 여기저기 방에서 비명, 죽는 소리가 들려서 이철 씨도 여기서 틀림없이 고통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서를 쓰는데 온갖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하고, 이철 씨가 직접 썼다는 진술서를 보여주는데 글씨체는 맞지만 내용이 다 틀려서 ‘이거 완전 엉터리구나!’ 알아채고 자신이 생겼어요. 

 

면회장 철망 너머 손을 꽉 잡고…

▶첫 면회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민: 제가 조사받고 재판받고 광주교도소에서 3년 6개월을 살다 나와요. 이제 살았는지 죽었는지 봐야 하니까 출소하자마자 서울에 갔죠. 사형 집행장이 서울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면회장에 간수들이 죄다 구경한다고 들어와서는 우리가 무슨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느낌이었어요.

이: 저는 바로 한 달 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은 상태였어요. 근데 마침 출소한 약혼자가 왔다고 하니까 뭔가 그림이 되잖아요. 그래서 간수들이 신기해하면서 주위에 동그랗게 서서 보고 있었어요. 

사형수는 미결수라 머리를 길렀는데 이제 기결수가 돼서 머리를 빡빡 깎았죠. 머리 깎은 모습이 부끄러워서 아내에게 학생 같고 이상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교도소에서 많이 봐서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했어요. 그리고 보통 면회장은 유리 벽에 구멍이 뚫려있잖아요. 그런데 첫 면회는 특별히 철망으로 된 곳이었어요. 철망 너머로 손을 잡았더니 이 사람이 내 손을 손가락으로 꽉 잡고 한참을 안 놓더라고요. 

민: 그때 면회 마치고 구치소 언덕을 내려오는데 제 기억으로는 나뭇잎들이 나보고 굉장히 기뻐하는 것처럼,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살아있다는 그걸 확인하니까 그 순간을 나뭇잎까지 함께 기뻐했던 것이 떠올라요. 

 
◇통일의 집 뒷동산에 올라 문익환 목사의 벽화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이철, 민향숙 부부.
 
 

“저렇게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석방 운동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민: 이감된 대전교도소로 어머니하고 면회 갔는데 이철 씨가 하는 말이 “한 평 남짓한 방이지만 그래도 조국 땅에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속이 너무 상해서 막 욕을 했어요. 면회 마치고 계단 교도소를 내려오는데 눈물을 감출 길이 없더라고요. 세상에 저렇게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는 게 기가 막혔죠. 

간첩단 사건이 사회적 인식이 안 좋다고 주목받지 못했을 때  제가 유학생 간첩단 유인물을 제일 먼저 썼어요. 우리나라가 통일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간첩 조작 사건을 숨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저도 그렇게 연루되지 않았으면 몸 사렸을 거예요.  근데 제가 당하고 보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아픔을 같이하는 사람하고 나가서 싸워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그 시대가 한 발이라도 안 나가면 어찌할 수 없는 시대였으니까요. 간첩단 가족이라고 하면 운동 현장에서 기도 못 펴고, 그냥 앉아만 있었어요.    
 
저희 가족들은 알고 있읍니다. 그들의 이 순수한 조국애를 유신체제 유지를 위한 정치적 제물로 악용했던 저 엄청난 모략극임을! 공산주의자, 빨갱이, 간첩 등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조국의 멍에였읍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40일간 중앙정보우와 보안사에서 고문을 받으며 견디다 못해 이미 작성된 자백에 동의한 것이 그들의 죄라면 죄입니다. 
(민향숙이 쓴 ‘재일동포 정치범 43명 석방을 촉구하면서’ 중, 1987. 7. 6)
 
 
◇민향숙 씨가 작성하고 민가협이 배포한 재일동포 정치범 43명 석방 촉구 유인물
 

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깨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주눅 들지 말고 정면돌파를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얘기하면서 돌아다닌 거예요. 

민: 1987년인가 서울대 광장에서 연설하는데 “조국을 사랑해서 조국을 알기 위해 공부하러 온 청년학도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고 사형수까지 되었을 때 여러분의 형제자매들은 그 시간에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라고 외쳤더니 학생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도 들지 못하더라고요.  너무 가슴이 아리고 못 견디겠어서 그런 얘기를 한 거예요. 그때 문익환 목사님이 그 인간의 아픔을 그대로 다 보고 계시면서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셨기 때문에 그걸 저희는 잊지 못하죠. 

 
 ◇문재린 목사 별세 후 통일의 집에 세배 온 조만조, 민향숙 모녀(1986. 1. 1)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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