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이달의 사건>

고난의 1월… 입원과 별세의 시간 (2024년 1월호)

1990년 9일간 입원, 1994년 1월 18일 별세  

 
 
◇서울의대 학생회에서 건물 외벽에 문익환 목사의 석방을 촉구하는 구호를 붙였다. 

 
1989년 12월, 수감 중인 늦봄의 건강이 걱정스러운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1심 재판을 치르는 한편 방북에 대한 적지 않은 오해와 비난을 감내하느라, 늦봄은 옥중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극심한 신체 통증을 느끼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족들은 걱정 끝에 병원 치료를 요구하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에서 12월 내내 농성했다. 재야에서도 서명운동을 벌이고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로 행진하는 등 늦봄의 석방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가족들, 병원치료 요구하며 농성

12월 말 종합 진찰이 필요하다는 서울대병원 의견을 재판부에 전달했고, 재차 검진을 거쳐 허혈성 심장질환과 신부전증 등의 치료 필요성을 인정받아 마침내 1990년 1월 16일이 되어서야 입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입원 기간은 불과 9일, 충분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늦봄은 1월 24일 안양교도소에 재수감되어야만 했다.

가족들은 국민께 드리는 호소문을 광고로 게재하여 염려와 응원을 보내준 국민들과 동지들께 감사를 표했다. 호소문에서는 ‘법과 제도와 관습의 이름으로 가장 소중한 생명권을 억압받고 있는 이 땅의 모든 민중들의 아픔과 눈물을 저희들의 것으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94년 1월 갑작스런 별세

4년 후인 1994년 1월 늦봄은 또다시 안타깝고 숨 가쁜 시간을 맞고 있었다. 통일을 위해서는 범민련 조직 차원을 벗어나 남한 정부까지 포함하는 온 겨레가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착 상태로 접어든 남북 관계 속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 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1993년 4월 여섯 번째 수감생활을 마치고 석방된 직후부터 ‘통일맞이 칠천만겨레모임’을 추진해 온 늦봄은, 대중적 통일운동 전개를 위한 마지막 의지를 다지던 1월에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압박 속에서 갑작스럽게 별세했다. 이로써 벽을 문으로 알고 박차고 나가며 그가 겨레와 함께 꾸었던 통일의 꿈도 오랜 기간 멈춰서야 했다.

 
◇늦봄의 마지막 편지. 1월 18일 범민련 위원장들에게 보냈다. 
  
◇문익환 목사 장례식이 열린 한신대학교.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문 목사의 얼굴을 그린 대형 걸개 그림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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