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과거에서 온 편지>

1981년 2월 25일 자 박용길의 편지 (2024년 2월호)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은 곁에 있어야지”

 
 
계절을 따라가며 읽던 편지가 어느덧 2월이 되었습니다. 이번엔 모처럼 서로 사랑이 넘쳤던 부부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골라보았습니다. 늦봄이 “슬픔의 깊이를 보게 되었다”고 했던 세번째 감옥 시절인 1981년 2월 25일에 박용길이 쓴 편지 입니다. 2월의 날씨는 봄이 곧 올 것 같다가도 다시 쌀쌀해지곤 하지만 옛 편지 속에 남겨진 부부의 애틋한 마음은 따뜻하기만 합니다. 
  
 
◇1981년 2월 25일, 박용길이 쓴 편지
 
 
 ▲편지 본문
제21신 1981. 2. 25 (수) 
날씨가 다시 쌀쌀해 졌어요. 세일극장(*수유리에 있던 극장. 지금은 없어짐) 앞까지 안경 여러 개를 손질하라 갔다가 시집 사러 종로서관(*문익환과 용정시절부터 친구인 장하구가 경영하던 서점)까지 가려던 것을 그만두고 도라왔읍니다. 너머 바람불고 추워서요. 불기 없는 데 계시는 분들 생각하면 송구스럽지만요... 저녁에는 교회에 가서 3.1운동 61주년에 대해 출애굽기 14장을 읽고 마태복음 20장 23절을 읽고 글들을 읽었어요. 도라오는 길에 반찬거리도 사고요.  
이것저것 정리하다가 당신이 그전에 쓰신 편지들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감회에 젖었읍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생애에서 짝지어 주신 당신께 잘해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꽉 차 있어요. 슬기가 부족한 탓도 있겠고 성의를 다하지 못한 것도 있겠지요. 요사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과히 춥지나 않으신지? 음식은 어떠신지?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은 곁에 있어야지 발이 땅에 붙지 않는 생활입니다. 그래도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믿고 기다려야죠. 이 달도 저물어 가는데 춘삼월 호시절이 오려는지요.  

 

쌀쌀한 2월, 옥중의 남편을 걱정하며…

이 편지를 썼을 당시 늦봄은 공주교도소로 막 이감된 지 얼마 안된 때였습니다. 바로, 1980년 5월 17일 한밤에 중앙정보부로 연행되고 전두환 계엄사령부가 만들어낸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연루자로 재판을 받던 끝에 다음 해 1월 23일에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선고 받은 직후였지요. 민간인 신분이라 재판을 받았던 육군교도소에서 이곳으로 거처가 옮겨졌습니다. 

그러고 나자 세번째 감옥 편지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아내는 공주교도소 첫 면회를 마치고 2월 5일에 첫편지(1신)를 시작으로 매일같이 감옥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이감된 지 얼마 안 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늦봄이 걱정되었지만 늦봄은 잘 지낸다며 살갑게 식구들에게 안부를 전해왔습니다(문익환, 1981. 2. 19). 하지만 이 편지를 쓰던 날에 날씨가 또 쌀쌀해지자 남편 걱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춥고 길어…

물론 아내의 생활도 보통은 아니었습니다. 편지 속의 그날, 25일도 아내는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들은 많기만 했고 마음은 복잡했던가 봅니다. 지금은 없어진 수유리 세일극장, 문익환과 용정시절부터 친구인 장하구가 운영하던 종로서적은 자주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박용길의 편지엔 그해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길어 연탄을 무지 무지 땠다”고 나와 있는데 2월엔 눈도 많이 내려서 “내린 눈이 녹고 쌓이는 바람에 땅이 질어서 장화 없이 못다니겠다”고도 적고 있습니다(박용길 1981. 2.21~24). 상황이 이렇고 보니 불기 없는 데 있을 남편이 떠오를밖에요. 아내는 남편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이 가득한 편지를 쓰며 한 구석에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서 “발이 땅에 붙지 않게 생활”하고 있다며 그리움도 함께 보냈습니다. 하지만 딱히 도리가 있는건 아니어서 아내는 “어서 날이 가야 3월 면회를 갈수 있다(박용길 1981.2.23)”고 벼르며 매일 매일 감옥으로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면회갔더니 동상걸린 빨간 손…

기다리던 3월의 면회날은 어땠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녀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날도 바람불고 추운 2월의 날씨였고 90 노모를 모시고 공주까지 갔었는데.. 불기없는 방에서 지내던 남편은 결국 동상에 걸려 있었습니다. 3월 면회를 한 날 돌아와서 쓴 박용길의 편지에는 남편을 만날때 느꼈던 서글픈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당신의 빨간 손이 눈에 밟혀서 못 견디겠읍니다. 공주는 유난히 추운것 같이 느껴졌어요. 왜 손, 발이 얼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읍니다. 하느님께서는 견딜수 없는 시련은 주시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잘 보이지도 잘 들리지도 않는 몇 분을 위하여 90 노인을 모시고 간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박용길 1981. 3. 7).
 
 

늦봄 “당신의 편지가 나를 젊게 해”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 발이 땅에 붙지 않게 생활하면서도 걱정과 미안함, 그리움까지 끌어안고 살아야 하다니 남편만 생각하는 남편덕후 아내의 삶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에 문득, 그때로부터 12년 뒤로 시간을 건너가 보았습니다. 이때도 늦봄은 여섯번째 감옥에서 가석방을 얼마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도 한 가정을 이루어 1년이 모자라는 50년을 살았는데, 우리도 꽤 커졌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당신을 만나 엄청나게 커졌다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49년이면 15,897일인데 그 많은 나날, 늘 새로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 당신의 하냥 젊은 마음이 나를 늙지 않고 계속 자라게 해주었죠. 그러니 나같이 복받은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그같이 복된 하루가 오늘 또 하나 쌓이는군요. 당신의 편지에 날아 들어오는 늘 새로운 마음이 하루하루 나를 젊게, 복에 겨워 살게 하죠. 기다림이라는 게 인생에 힘찬 긴장감을 준다는 거 요새 새삼 느끼는군요. 모레 만날 걸 기다리며. 당신의 사랑 늦봄(문익환 1993. 2. 10)”


역시나 사랑은 해피엔딩입니다. 늦봄은 이런 말을 어떻게 생각해낼까요? 남편은 아내에게 둘이 함께 한 15,897일 내내 행복이 현재 진행 중이라며 “당신 때문에 늘 새로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을 받은 봄길도 대단합니다. 봄길의 편지를 읽으며 그녀가 늦봄 덕후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늘 했지만 가만 보면 123개월 감옥에 가는 바람에 아내를 독수공방하게 만들었던 늦봄도 마음만은 누구보다 아내 덕후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로를 “둥근 달님”과 코스모쓰”라고 불렀고 “문태평과 연분홍” 이라고도 칭했으며 우리가 “봄길과 늦봄”이라고 부르고 있는 문익환과 박용길의 편지가 오늘만은 든든한 반쪽 되기 비법서로 느껴지는군요.

 
 ◇ 느낌이 닮은 부부, NCC 인권위 사무실에서 일본과의 저자세 외교반대 시위하면서 앉아있는 문익환과 박용길 


<글: 아키비스트 지노>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와 함께 걷고 있는 아키비스트. 늦봄과 봄길의 기록을 아끼고 그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


[키워드]
세번째 수감
공주교도소 
사랑꾼 늦봄 아내 덕후 남편 덕후

월간 문익환_<과거에서 온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