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

인혁당 재건위 사형수 8인 (2024년 3월호)

[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파아란 불길이 치솟으며 뼈까지 재가 되었는데 난 어찌 된 거죠?”

  
 
매년 4월 9일이 되면 늦봄은 1975년 4월 9일의 몸서리치던 현장을 떠올리곤 했을 것이다. 그날은 늦봄에게 충격이었고, 슬픈 날이었고, 한편으로 역사적인 날이었기 때문이다.
  
75년 4월 9일은 나에게 있어서도 역사적인 날이 되었군요. 억울한 시신을 끌고 응암동성당으로 향해 가던 영구차가 도중에 경찰에게 탈취되던 응암동 큰길이었죠. 내가 경찰과 처음 몸싸움을 한 것이. 그날의 영웅은 누가 뭐래도 문정현 신부였지요. 그 뒤로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워진 문 신부, 김승훈 신부, 함세웅 신부 등과 안면을 튼 것이 시신을 빼앗기고 응암동성당에서 허탈감에 빠져 있는 자리였군요. (옥중편지 1992. 2. 13)
 
 

경찰, 송상진 주검 강제로 탈취

응암동에서 빼앗긴 억울한 시신의 이름은 송상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대법원의 사형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교수형이 집행된 사형수다. 그를 포함한 사형수 8명의 가족은 마지막으로 장례미사라도 드리고 싶은 생각에 억울한 주검들을 응암동 성당에 안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고문의 흔적들이 드러날 것이 두려웠던 경찰은 시신을 강제 탈취해 화장장으로 가져갔다. 겨우 송상진 씨의 시신만이 응암동 성당으로 향하는 도중, 녹번동 삼거리에서 경찰은 또다시 강제로 시신을 탈취하려 했다. 가족은 물론 시신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차 밑에 드러누워 저항했지만, 경찰은 크레인으로 차를 들어 올려 벽제 화장터로 가서 가족 확인도 없이 화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문정현 신부도 차 밑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경찰이 차를 끌어내면서 다리가 차 바퀴에 깔렸다. 이후 문 신부는 내내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다.
  
◇김신묵 권사 영결식에서 문정현 신부와 인사나누는 문익환 목사 

 
당시 성서 번역에 참여하고 있던 늦봄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로 유지되는 독재정권에 대해 부글부글 끓는 심정을 억누르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고문과 조작으로 만들어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 대법원의 사법 살인에 이어 바로 다음 날 새벽 사형 집행까지 이루어지자, 늦봄은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동생 문동환, 문정현-규현 신부 형제, 이희호 여사 등과 함께 응암동 현장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며 저항하는 대열에 함께 했다.

 
◇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 가족과 박용길 장로. 대구에서 1991년 4월 9일.
 
 

늦봄, 8명의 사형수 애타게 불러

늦봄은 이날 현장에서 겪은 충격과 분노를 담은 시 두 편을 연이어 썼다. <사월의 비가- 여덟 분의 아벨을 생각하며>와 <길-5- 우리 모두의 가슴 터지던 응암동 길>. 여덟 분의 아벨은 억울하게 죽은 사형수 여덟 명(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을 가리킨다. 늦봄은 시 속에서 여덟 분을 애타게 부르며 가슴 터져 죽을 것 같은 억울한 심정을 토해냈다.
  
응암동과 인혁당을 회고하는 늦봄의 글과 강연을 보면, 여덟 분의 ‘억울함’은 두 가지 측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이들은 아무런 죄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기에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억울한 일은 그보다(주: 4월11일 김상진 열사 할복자살) 이틀 전인 4월 9일, 바로 오늘 있었던 일입니다. 3년 전 오늘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 간 여덟 분은 다 생활인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투옥된 것도, 처형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자유와 민주주의가 소중한 줄 알아 그것을 사는 생활인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대낮의 날벼락을 맞은 것이니, 어찌 기가 막힌 일이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공산주의자로 살다가 죽기라도 했다면 덜 억울했을 거죠. (1978. 4. 9 갈릴리교회 설교)
 
 
둘째로, 다시 무죄를 다툴 기회를 박탈당한 채 바로 처형되었기에 억울하다는 것이다.
  
재판이라는 게 오판이 있을 수 있거든요. … 이제 이만하면 무죄라는 것을 증명할 반증이 나올 가능성이 없다고 인정될 만큼 충분한 시간을 두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될 때에야 처형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혁당 사건과 같이 대부분의 피고가 형이 확정된 지 24시간도 되기 전에 처형되어 버렸다면, 그것으로 그 사람들은 억울한 증인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1988년 서울 민통련 주최 ‘민주통일시민학교’ 강연)
 
고문과 조작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을 사형수로 만든 사법 살인과, 잘못된 판결을 뒤집을 시간도 빼앗아버린 야만적인 행위로 인한, 그야말로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은 민주 정부 수립 후 재심을 통한 무죄 판결로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처형된 억울함이 조금이라도 덜어졌을지, 통탄스럽다.
 
 

인혁당 사건이 민주화 투신 계기 

응암동의 일은 늦봄이 민주화운동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대개 장준하의 죽음이 직접적인 계기라고 알고 있는데, 이 말을 들은 늦봄은, 장준하 죽음 4개월 전에 벌어졌던 인혁당 사건 사형집행이 ‘큰 충격’이었다며 장준하 죽음과 함께 응암동 현장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1985년 『말』지 창간호에 실린 신홍선-문익환 대담)
 
늦봄은 4월 9일 사건의 발생 배경에 대해 이렇게 되돌아보았다. 민주주의와 통일 희망을 짓밟아버린 박정희 정권의 실체를 깨달은 국민들의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장준하가 주도한 유신헌법 철폐 100만 명 서명운동과 동아일보 광고 탄압에 맞선 국민들의 광고란 메우기에서 분노에 찬 민의가 표출되었지만, 정권은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조작한 사건이 민청학련과 인혁당재건위 사건이었다.
  
형이 확정된 지 15시간 만에 여덟 사람을 처형한 일은 박 정권의 비장한 결의를 나타낸 거죠. 반유신체제 운동은 그 어떤 것이든 무자비하게 분쇄하겠다는 결의를 국민에게 과시하려는 것이었지요. 정부의 그 결의를 다 알면서 장준하 씨는 이에 정면 도전하니까 희생양으로 민족 제단에 올려졌죠. (옥중편지 1992. 2. 13)
 
늦봄의 표현 그대로 75년 4월은 ‘견딜 수 없는 숨 막히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억울한 시신이 ‘길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아낙의 가슴이 뻥 뚫리고 파아란 불길이 치솟으며 뼈까지 재가 되었는데 난 어찌 된 거죠?’라며 물었던 것은, 49년 전의 일일 뿐인가? ‘시무룩하니 모여 섰던 진달래 어설픈 꽃잎들은 핏기 바래 가는 슬픔을 차마 가누지 못해라’라고 했던 억울한 4월, 그와 다름없는 4월을 앞두고 있다.
 
◇인혁당 사건 희생자 26주기 추모문화제 리플릿

<글: 조만석>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 편지
문익환(1999). 『문익환 전집 4,5』 통일2,3. 사계절출판사
천주교인권위원회(cathrights.or.kr) 「인혁당 사형수 8인의 진실」
 
사월의 비가(悲歌)
-여덟 분 아벨을 생각하며

문익환

이루 다 이름할 수 없는
풀바람 꽃바람 별바람들의
흐드러진 사랑의 몸짓에서
어쩌다 태어났더냐?
 
아-
벨/아벨/
아벨/아-
벨/아벨/아벨/아-
벨/아아아아아아아아

 
허리 부러진 태초의 산기슭에는
머리 터진 아벨의 피
지금도 흐르고
 
자다란 개나리꽃 나팔들이
네 가닥으로 찢어지며
불어제끼던 눈부신 새봄의 찬가
그만야 함몰하는가
 
―아벨의 피는 꽉 목이 잠겼다―
시무룩하니 모여 섰던
진달래 어설픈 꽃잎들은
핏기 바래 가는 슬픔을
차마 가누지 못해라.
 
길-5
-우리 모두의 가슴 터지던 응암동 길

문익환

풀 길 없는 원한 맺힌
바람에 황사 이는 오후
해야 오늘도 저 먼짓길 끝나는 데로
영락없이 떨어졌다가
내일 아침이면 또 눈부시게
속초쯤에 상륙하겠지만.
 
당신은
돌아갈 수 없는 이 길을 왜 왔는지 알 리가 없지
그냥 끌려 왔으니까
 
왜 모두들 이렇게 멋대로 굴지
왜 날 갖고 이러지
성당에 들른다고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답디까
 
마지막 가시는 길
그냥 너무 억울해서 그러는 것뿐이라오
 
길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아낙의
가슴이 뻥 뚫리고
파아란 불길이 치솟으며
뼈까지 재가 되었는데
 
난 어찌 된 거죠?

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