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과거에서 온 편지>
1979년 3월 1일 자 박용길의 편지 (2024년 3월호)
“목이 터저라고 여러 번 소리높이 불렀읍니다”
늦봄이 “봄길도 산모퉁이 하나만 돌면 나서게 될 듯(문익환, 1979. 2. 19)”하다고 느낄 무렵이 되자 3월이 왔습니다. 3월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절부터 국경일로 지정하여 기념하는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 민족운동으로 기록된 ‘3.1절’로 시작되지요. 3월의 편지는 1979년 3월 첫날에 쓴 편지랍니다. 1919년에 태어난 박용길이 이 날을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했는지 그 진심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이야기가 담긴 편지를 읽어봅니다.
◇문익환, 1979년 3월 1일, 박용길이 쓴 편지
▲편지 본문
1979. 3. 1 (목)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라
한강물 다시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나라를 보소서
동포여 이날을 길이 빛내자”
(선열하라는게 존칭어라는군요)
목이 터저라고 여러 번 소리 높이 불렀읍니다. 온통 만세소리로 뒤덮이고 피로 물들었을 60년 전의 거리를 회상하면서 조용하기만 한 하루였읍니다. 3대 생과부*들이 앉아서 에스델서를 읽으며 예배드리고 “기미년 독립만세 60주년”이라고 대문에 써 붙였읍니다. 여러 곳에서 전화가 오고, 오늘 모두 어떻게들 지내셨는지 궁금하군요. 3일 의근이 생일인데 성심이에게서 와이샤쯔 선물이 왔어요. 내일은 나가서 당신께 들르겠읍니다. 3월이 되니까 또 면회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좀 늦게 해야겠죠. 아버님이 오시면 보고싶어 하실 테니까요. 귀, 손이 좀 어떻세요. 빨간 귀와 손이 눈에 아른거려 못견디게 굽니다. 모두 모두 건강하셔야 할텐데요. 오늘은 이만. 역사적인 날인데 이것으로 문안드립니다.
용길
* 3대 생과부란 시어머니 김신묵의 남편은 캐나다에 있고, 박용길의 남편은 감옥에 있고, 며느리 정은숙의 남편은 독일로 유학을 떠나 혼자 있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60년 만의 3.1절 “가슴 설레”
박용길은 1919년생이지만 10월 24일(양력)에 태어났으니 그해 3월 1일엔 아직 복중 아기였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그해에 그토록 큰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 특별한 날에 대한 마음 빚은 쌓였던 게 아닐까요. 60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나 다시 맞은 기미년 3.1절을 박용길은 가슴설레게 기다리는 중입니다.
“우리 선열들이 생명을 걸고 이르킨 거사 전날이군요. 오늘은 하루종일 붓글씨를 많이 썼읍니다. 3.1절 노래도 쓰고 기미년 독립만세 60주년이라고도 쓰고 3.1절 전야제라고도 썼습니다. 내일은 3.1절 가슴설레는 날인데 우리 모두의 염원인 민족통일을 빌면서 하루를 뜻깊게 지내야겠읍니다(1979.2.28(수) 밤)”
대문에 ‘독립만세 60주년’ 써 붙여
기다림 끝에 맞은 3.1절 60주년이 되던 날, 박용길은 “온통 만세소리로 뒤덮이고 피로 물들었을” 그날의 거리를 상상해 보았지만 실상은 조용하기만 한 하루였습니다. 그래도 그들만의 특별한 의식은 별 탈 없이 진행되었지요. ‘3대 생과부’가 모여 예배를 드리고 “기미년 독립만세 60주년” 이라고 쓴 붓글씨를 대문에 써붙였습니다. 곁에 있어야 할 사람들은 비록 없었지만 그렇게 역사적인 하루, 문익환 목사네 집의 시시콜콜한 풍경은 편지에 담겨 감옥으로 날아들었습니다.
늦봄 편지로 이어 본 부부의 삼일절
과거의 편지를 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편지가 쓰여진 맥락입니다.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지요. 그래서 이 글을 쓰려면 주고받은 늦봄 편지를 살피고 그 시점의 면회 기록도 찾아 보고 관련된 부분이 있나 확인해보곤 합니다. 편지에 나오는 사람, 사건, 감옥 안팎의 상황들까지 찾을 수 있는 정보들을 모으고 확인하려는 이유는 편지의 맥락을 파악하고 정확한 독해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신의 끝을 향하고 있었던 그때 문익환은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서대문 감옥에 있었습니다. 당시 쓴 문익환의 편지를 보면 봄길의 붓글씨 쓰기에 남편의 격려도 한몫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3.1절에 대한 사랑이 봄길뿐 아니라 부부 모두의 것이었다는 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내어 붓글씨를 필사적인 심정으로 쓰시오… 작품을 하나하나 만들어 간다는 것이 공허한 생을 기쁨과 보람으로 넘치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오”
“3.1 독립만세 60주년이 눈앞에 다가왔군요… 그날을 맞을 생각을 하니 지금부터 가슴이 떨리는 군요(문익환 1979. 2. 19).”
옥중 찬송가에 든 그날의 ‘서약’
박용길의 3.1절 사랑의 증거는 또 있습니다. 바로 문익환의 옥중 찬송가 속에 들어있는 ‘서약서’입니다. 이 찬송가는 문익환 목사가 감옥에서 사용했던 것인데 자주색 빌로오드 천으로 감싸져 있고 감옥에 반입되던 도서가 당국의 허가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도서열독허가증’이 여러장 붙어있습니다. 또, 찬송가 안에는 여러 글들이 붙여져 있는데 서약서는 그중 하나입니다.
◇ 문익환이 감옥에서 사용하던 찬송가에 박용길이 3.1절을 맞아 쓴 다짐이 붙어 있다
처음 이 서약서를 발견했을 땐 내용보다 이걸 쓴 아내와 찬송가에 붙어있는 상황이 흥미로웠지만, 그보다 너무 낡고 훼손된 찬송가의 모습이 안타까워 아카이브의 <
🔗훼손된 기록물> 코너에 소개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1979년 3월 전후에 쓰여진 다른 편지들도 함께 읽다보니 당시 반주자가 없게 된 금요기도회와 갈릴리교회 상황, 그리고 이 서약을 한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기미년은 제 해가 아니예요? 3.1절 60주년을 맞아 저는 금년에 훌륭한 반주자로써 봉사할 것을 하느님께 맹세하렵니다. 도와주실거예요. 정말이예요. 전에 어머니가 늘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배운만큼 나누어주어야 한다고…(박용길, 1979. 2. 26)
1919년생 박용길의 3.1절 사랑은 ‘극성’스러운 노력이 함께 했습니다. 3.1절을 걸고 한 약속을 지키려고 하루에 “찬송가 600곡을 다 훑으며” 이런 모습을 ‘극성’이라고도 자평했지요. 극성은 몹시 왕성하고 적극적인 모양을 말한다지요. 얌전만 빼서야 새 역사가 될 수 없다고 봄길이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글: 아키비스트 지노>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와 함께 걷고 있는 아키비스트. 늦봄과 봄길의 기록을 아끼고 그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
[키워드]
두번째 수감
서대문구치소
3.1 절, 삼일절, 금요기도회, 갈릴리교회, 옥중찬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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